사도행전

유라굴로 광풍(사도행전27장13절-26절)

남수연 2010. 10. 11. 09:10

 

오래 전에 거대한 태풍의 한 가운데서 표류하는 배 한 척을 주제로 한 스톰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성 곽과 같은 거대한 파도가 솟아올라 배를 집어 삼키는 광경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광풍이라고 부르는 성난 물결에 휩쓸려 다니며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한 척의 배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원하는 건 잔잔한 바다 위에서 뱃노래라도 부르며 순풍에 밀려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겠죠.

그러나 우리 인생이 그렇지 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 성도님들 나이면 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오늘 본문 처럼 예기치 못한 풍랑과 파도가 몰아닥칠 때가 있습니다.

인생 가운데 피해갈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바로 알고 대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닥치는 이런 시련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27장 전체는 일종의 항해 일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변도시 가이사랴에서 지중해를 통과해 로마로 향하는 2000여년 전의 항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항해술을 연구하는 아주 귀중한 해양 자료로도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이 죄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항해 도중 발생한 일입니다.

시기는 주후 6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박해하러 가던 다메섹의 한 노정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을 급반전하여 오직 복음 전도만을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다음과 같은 비장한 고백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60세의 늙은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성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며 당당하게 복음을 변증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외칩니다.

나는 가이사에게 상소하겠소

즉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판결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의 상소를 무시할 수 없던 유대총독은 그를 로마로 이송하도록 명령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행 곡물 운송선을 타고 군인들의 호위 속에 로마를 향해 가고 있던 중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배가 파선 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거의 보름 가까이를 이 광풍에 밀려 표류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달고 다니던 거룻배 하나를 끌어 올리는 데도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보름 간이나 쉴 새없이 풍랑에 뒤집힐 듯 요동치는 배 안에서 선원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살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황입니다.

배가 난파되기 직전에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배 안에 승선한 276명 전원이 기적적으로 구조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

난파 된 배에서 기적적인 전원 생존이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첫째로 바울에게 닥친 광풍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의 의미가 그렇듯이 본문에서 바울이 만난 이 시련의 의미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이송되게 된 배경에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체포되었을 때 주님은 사도행전 23장11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비록 죄수의 몸으로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뜻대로 바울은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풍랑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도 우리에게 고난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한 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으로 필리핀 선교지를 향했습니다.

필리핀에 교회 11개를 세우며 자신의 최절정의 젊음과 전성기를 주님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로 가는 선교사의 차를 향해 오토바이 두 대가 따라 붙더니 조준하여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4발의 총을 온 몸에 맞고 7시간의 긴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2차례의 추가 수술을 했으나 결국 장애 판정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신의 고갈로 캐나다에서 휴식기를 가지던 중 운동신경 마비가 기적적으로 한 순간에 회복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캐나다의 한인교회 청빙을 거절하고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필리핀 당국이 이유 없이 장기입국비자를 내주지 않아 결국 필리핀에서 추방되는 꼴이 되고 맙니다.

할 수없이 연고지도 교회도 없는 이슬람권 말레이시아로 입국하여 아무 것도 없는 빈 손으로 바닷가에 앉아 하나님을 향해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헌신과 충성의 댓가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오늘 사도 바울도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모는 풍랑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떠나는 길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압송되어 가는 것도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 뾰루퉁할 상황인 데 게다가 폭풍이라니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먼저 쏟아놓게 됩니다.

그러나 이 광풍은 사실 바울이 예견했던 재난입니다.

9절에 보면 금식절기가 지나 이미 겨울철로 접어들고 있어 항해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마행은 포기한 상태이나 선장과 군인들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미항이란 항구를 떠나 무리하게 뵈닉스란 항구로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그들에게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라고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압송하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무리한 항해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 바울과 같이 죄악 된 인간과 얽혀 살다 보면 인생의 풍랑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사야 45장7절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 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 대로 이 고난과 환난이 창조되었다면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오늘 이 광풍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24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즉 함께 배 안에 있는 자를 바울을 통해 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황제에게 나아가 자신을 변호하며 복음을 변증할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세계의 패권을 잡은 로마제국의 황제를 설득하여 땅 끝까지 기독교를 전파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황제가 아닌 이 평범한 275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의 소망대로 로마는 그로부터 300여년 후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사람 황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건 전도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순교를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평범한 뱃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상 도저히 살아 날 수 없는 상황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배를 타고 온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구원하는 일은 고난 가운데 있는 바울에게 주시는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과 축복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다니엘 12장3절에도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충성 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울은 광풍이 불어 닥칠 때부터 풍랑에 이리 저리 뒹굴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한 것은

20절에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진 다음이었습니다.

고난이 오면 우리는 물론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풍랑 속에서의 보름 동안 바울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오는 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풍랑을 만난 지 단 며칠 만에 응답을 받고 그들 앞에 섰다면 그 가운데 누가 죄수 바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때는 인간의 모든 잡은 것을 내려 놓을 때, 모든 소망이 끊겨 나갔을 때 다가온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 중에 할 일은 본문에서처럼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선원들이 처음에 짐을 풀어 바다에 버리고 나중에는 항해를 위해 버려서는 안 될 배의 기구들 까지 버린 포기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알고 그 의지하던 것을 놓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때가 하나님의 응답의 시간인 것입니다.

장애인 사역선교단체인 '세계밀알'의 총재인 시각장애인 이재서 교수는 '내게 남은 1%의 가치'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설명서'는 나중에 옵니다. 저는 실명의 고난을 겪은 이후 제가 왜 고난 속에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지나다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 설명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실현하시는 공식이 그렇습니다. '고난은 먼저, 설명서는 나중에!'

너무나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항상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임을 부인할 수 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담대한 전도자도 이 풍랑 앞에서 두려워했다는 것을

24절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압송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도 자청하여 죽음의 길을 들어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풍랑이 계속될 때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가 환란 가운데 있을 때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내게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죠.

오늘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으로 위로 하시는 줄 믿습니다.

어떤 시험과 어려움도 항상 두려워말라고 우리 곁에서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의지할 때 모든 인생의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두 번 째로 생각해볼 것은 백부장과 선원들의 입장에서 당한 이 광풍의 의미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생에서 어려운 상황은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다 닥쳐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던 선원들은 인생의 최대 위기에 맞닦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읽지 않은 앞 부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항해하고 있는 이 지역은 겨울철이 다가오면 동풍이 불어 닥쳐 항해가 위험한 지역입니다.

바울은 앞서 그들에게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10절에 보면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익힌 항해술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의 예언적 충고를 거절한 데서 그들이 심각한 풍랑 가운데 휩쓸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남풍이 순하게 부는 것 같으나 곧 돌풍이 몰아닥치고 거대한 파도가 위협하는 상황으로 바뀌자 그들의 모든 기술은 아무 소용없이 되버립니다.

경험이 많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계를 벗어난 뜻밖의 고난을 이겨낼 재간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들은 승선인원 276명과 엄청난 양의 곡물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선박을 잃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1절에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많은 경우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믿고 행동하다가 뜻밖의 낭패를 당함을 봅니다.

사실 우리의 고난과 시련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벗어난 데서 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살기를 결심하고 주님을 의지한다면 오늘 그들이 당한 것 같은 큰 타격과 손상을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만이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피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을 때 우리의 갈 길을 알려주시겠다고 합니다.

아모스3장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우리 주위에 나의 문제를 나누고 기도해 줄 믿음의 동역자가 많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 된 판단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교만함에 대한 결과로 고난이 닥쳤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정말 알 수 없는 고난의 신비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함이 고난을 통해 깨어지고 절대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은 비로소 전도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기회를 얻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고난의 문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지 모릅니다.

지금 내 곁에 고난당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나를 그 사람에게 보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고난 당하고 있다면 지금이 하나님을 만날 때인 것입니다.

1912년 4월 14일, 세계 최대의 해난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1만 6천 톤의 거대한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침몰입니다.

그 배에는 구명대가 승객수의 반 밖에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는 무려 1,517명이나 되었습니다.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인 죠 하퍼는 전도자였고 부흥사였습니다.

그는 시카고의 무디 교회에 설교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수 분 동안을 바다 위에 떠서 전도한 비장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그는 같은 형편인 한 젊은이에게로 헤엄쳐 갔습니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파도가 덮치며 두 사람을 떼어놓았습니다.

수 분 후에 다시 그들이 조금 가까워졌습니다.

하퍼씨가 좀 큰 소리로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했나?"

"아직 못 했습니다."

이 때 큰 파도가 하퍼씨를 삼켜 버렸습니다.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구원받았나?"하는 음성은 파도 소리에 실려 계속 젊은이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에 그 젊은이는 뉴욕의 한 교회에서 신앙 체험담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죤 하퍼씨의 마지막 구원자입니다."

지금 고난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바로 나를 보내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에 간과하기 쉬운 한 사람을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본서를 기록한 누가라는 사람입니다.

사랑받는 의원 누가라고 성경에 기록된 바 있는 바울의 가장 절친한 동반자누가가 오늘 이 배에 함께 승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과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성경기록자 중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누가가 성령의 도구가 되어 신약성경 둘을 기록할 수 있었는지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의 깊은 영성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풍요함은 평생을 함께 한 바울에게로부터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의사라는 존경받는 직업과 헬라인이라는 보호막으로 직접적인 박해와 고난을 피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던 누가는 이 보름 동안 풍랑과 사투를 벌이며 경각의 달린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체험적인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에 타고 있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누가 역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광풍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기독교에서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심으로 그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이 기독교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영혼에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우시죠?

저도 이런 저런 많은 고난 가운데 살았다고 생각했는 데 지난 1년간 정말 예기치 못했던 삶 앞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그렇듯이 훗 날에 지금 때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어디에 계십니까?

바울과 누가와 274명의 사람들이 보름 동안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풍랑에 몸을 맡기고 내동댕이 쳐질 때 하나님이 어디 계셨습니까?

하나님이 외면하고 계시다 갑자기 그 천사를 보내 주님의 뜻을 알려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세심하게 풍랑 속의 그 배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1미터라도 더 높은 파도가 배 곁에 오지 않도록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지키셨고 혹시라도 두려움과 탈진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있을까 지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더 가까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편애한다 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나에게 그렇듯이 내게도 편애하는 아이가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이 글에는 부족한 자식에 대한 애잔한 부모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잘난 자식이 상을 타왔을 때 자랑스러워하지만 어머니는 못난 아이가 상을 타왔을 때 돌아서서 눈물을 훔친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도 몸이 허약한 오빠를 유난히 편애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여 시험에 들고 쓰러졌을 때 우리를 편애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중에 울 때 우리를 편애하십니다.

오늘 광풍 속에서 276명의 사람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의 고난 가운데에도 항상 함께 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생의 항해에는 순풍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라도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고난 당할 것을 하나님은 미리 알고 계시며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결과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삶은 성난 파도와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야고보서5장13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항상 기도하며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욥기 11장 16의 말씀이 위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고난의 설명서를 보내주실 것이고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를 아름답게 빚으실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고난이 어차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면 저는 마지막으로 주님과 함께 고난받으시길 도전하고 싶습니다.

선원들과 같이 모든 것을 잃고 간신히 구원을 받는 고난이 아니라 바울과 누가와 같은 고난을 받으시길 도전합니다.

서두에 언급했던 이 선교사님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두 아들이 자신과 같은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힘든 고난을 겪은 그가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게하고 싶다는 것이 바로 알 수 없는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죄인 되어 묶여있는 것 외에는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후에 항해를 마치고 로마에 도착하여 재판을 위해 가택 연금 되어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2년 간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몇 년 뒤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합니다.

로마시민권자에게는 십자가의 사형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해 달라고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형제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갈 때 참수형으로 죽는 것을 너무나 미안해 했을 것입니다.

고난이야말로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요.

오늘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자 바울의 삶이 처절하고 비참하게 보입니까?

지금 하나님 앞에 있는 그의 모습이 과연 그럴까요?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이 인간에게 가장 숭고하고 축복 된 삶이라 믿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을 생각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