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메시야의 고난 (이사야53장1절-9절)

남수연 2012. 4. 1. 23:53

 

 

오늘 본문을 읽었을 때 이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분이 떠오르셨습니까?

이 예언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확실히 느끼셨을 것입니다.

마치 본문의 기록자가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다니며 기록한 것처럼 생생하게 주님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죠.

놀라운 것은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선지자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백년 전 사람이란 것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구약성경에 이렇게 기막히게 예수님의 고난이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세히 읽고 또 읽어 보십시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예언 된 사람이 태어난 적이 있습니까?

이 예언의 내용과 똑같은 고난을 다 당하고 인류를 속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예수님 당시 매 안식일마다 낭독되던 이 이사야서를 읽고 배우던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메시야를 몰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보면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선지자가 반문합니다.

고대하던 메시야가 오셨을 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멸시하고 죽이는 것이 선지자의 눈에 너무나 기이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구원의 비밀은 모든 사람에게 계시되었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인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8장을 보면 초대교회 빌립집사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때 이 내시가 수레에 앉아 읽고 있던 글이 바로 오늘 이사야서 본문입니다.

빌립이 다가가 읽고 있는 내용을 알겠냐고 묻자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냐며 이렇게 말하죠.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도대체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고 고난 받는 이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빌립이 말씀이 지시하는 예수님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자 그가 즉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지금처럼 구약과 신약성경을 둘 다 갖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는 얼마나 축복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날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깨닫는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20%이상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데 나머지 사람들이 이 일에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가상의 신을 믿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전제로 합니다.

인격이 없는 목석 우상에 절하는 것처럼 인격적인 교제와 영적인 소통이 없이 믿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님께서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것이 반드시 나와 상관이 있어야 합니다.

내 머리로 인정 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진짜 교제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는 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포도즙을 마실 때 목으로 흘러 넘어가고 빵을 씹을 때 그 식감이 느껴지듯이 예수님을 실제로 믿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구원받은 믿음이고 거듭 난 믿음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가 그러길 원하시며 십자가에서 주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나누며 이 고난주간 주님의 십자가 아래로 바짝 다가가 주님의 고통과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거듭나는 은혜가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첫째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가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올 것을 예언합니다.

2절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올 여호와의 종 메시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예언을 시작합니다.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실 약속 된 메시야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얼핏 실망감이 비치기까지 합니다.

그가 본 그 분에게 화려한 왕복도 없고 장수의 갑옷도 없었던 것이죠.

너무나 평범한 예수님의 모습에는 압제자를 이길 권력도 명예도 없어 보이고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사람들이 결국 그 분을 멸시하고 따르던 사람들마저 주님을 버리고 얼굴을 가리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구약의 예언들은 메시야 그리스도가 다윗 왕가의 자손 중에 나올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다윗 왕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죠.

마태복음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며 족보가 등장합니다.

물론 태어나시던 당시 다윗왕가는 일제식민통치하에 몰락한 이씨 왕조나 마찬가지였죠.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 유대왕국을 다윗 왕의 통치시절처럼 번성케 할 것을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의 집안은 미천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아래 굶주리고 착취당하던 여느 백성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한 목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보잘 것 없는 배경 때문에 사역하실 때 종교지도자들에게 더 무시와 경멸을 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경우 제사장 가문의 후광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한 것과 비교가 되죠.

왜 예수님은 하필 미천한 사람, 삶의 곤고함 속에 힘들게 일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하는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삶 전체가 죄인들의 모든 저주와 고통을 짊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만 인간의 속죄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4절에 기록되었듯이 이 땅에서의 삶 전체가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죄로 인해 이마에 땀이 흘러도 먹고 살기 힘든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 하는 그 인간이 되셔야 했던 것이죠.

주님은 평생 가난하게 사셨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를 맡으셨습니다.

성전세금을 낼 돈이 없으셨고 끼니를 때우지 못해 무화과나무 열매를 찾느라 잎사귀 사이를 뒤적이기도 하셨습니다.

배신이 다반사인 우리의 인생처럼 제자들에게 버림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곤궁함 가운데 있다 해도 우리 형편을 너무나 익숙하게 이해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낮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지금보다 재정이 나빠지고 의식주가 힘들어지고 돈이 없어 남에게 무시당하게 될까봐 우리 인생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낮은 계층으로 살아야한다면 받아들이기가 힘드실 겁니다.

우리가 제이스도시락을 할 때 점심시간에 배달이 밀리면 막 독촉전화가 옵니다.

제가 몇 군데 배달을 해주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교회와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좀 싫은거예요.

평생 그래도 교사라고 대접받고 살다가 갑자기 배달인생이 되버린 것 같아 은근히 속이 상하더군요.

한번은 교회 행사에 주문받은 단체 도시락을 차에 실고 갔는 데 그 교회가 목사님이 교회가 어려우냐며 저를 아주 안됬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 진짜 마음이 상해서 오는 내내 기분이 얹잖았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별거 아닌 인생에서도 한 계단 내려오기가 이렇게 힘이 든데 그 때 제가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고 사랑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지극히 높고 영광스러우신 성자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입은 것도 충격적인데 그것도 부족해 무시와 멸시를 당한 천한 출신으로 오셨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단 한 계단도 내려가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조금만 무시당해도 얼마나 발끈합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상상 못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해 기꺼이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좀 지금보다 못한 환경이 되고 자랑하고 존경받을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입니다.

주님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1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때로 고난이 닥치고 돈이 없어 설움을 당하고 배경이 없어 무시를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더 낮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시고 영광 가운데 올리우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땅에서 나를 높일수록 영원한 천국에선 오히려 낮아지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지위와 환경에서 내 정체성을 찾으려니 낙심과 서운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은 지금의 초라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믿으시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 자존감을 확신하시고 소망을 붙들 때 어떤 환경에도 실망하지 않고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

 

그런데 3절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만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은게 아니라 우리들도 덩달아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할 때 왠지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자가 되느냐 비웃을 때 우리가 얼마나 곤혹스럽습니까?

뉴욕에 가면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쓴 노란 피켓을 들고 8년 째 노방전도 사역을 하고 있는 지용0목사가 있습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버스 안에서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홀로 서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맨하탄 등지에서 오직 노방전도 사역만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몇 년 전 한국에 오게 되어 매일 들고 다니던 그 노란 피켓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리를 걷는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예요.

정말 날아갈 듯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데 그때 주님이 그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벗으니 마음이 참 편하지?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예수라는 이름이 적힌 피켓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실상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를 잘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가슴 벅찬 이름입니까?

한 때 김준곤 목사님이 이끌던 대학생선교회 CCC 집회에서는 얼마나 뜨겁게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는지 모릅니다.

1995년 잠실운동장에서 열렸던 선교대회에서 김준곤목사님은 그 유명한 백문 백답을 외치게 하셨습니다.

백가지 질문에 백가지 답은 오직 한 단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외칩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그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인생에 어떤 문제에도 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진로를 인도해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실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

감당할 수 없는 이 고통에서 날 풀어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인생의 백가지 문제에 오직 답은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워 할 이름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를 가장 사랑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가장 귀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경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이사야는 대속의 고난을 당하는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합니다.

그 자신도 놀란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고 말씀해 오시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진 한 마리의 속죄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왕도 아니고 장군도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비로서 자신의 죄 값으로 드려왔던 양의 제사가 메시야의 속죄의 죽음을 뜻하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스스로가 우리 대신 죽음을 당하러 오시게 된 구원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4절과 5절에서 그의 눈에 예수님이 가시에 찔리고 창에 찔리는 아픔이 바로 자신의 허물 때문이고 자신이 당해야 했을 형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뼈가 어그러지고 온 몸이 상하게 채찍에 맞으신 것이 다 우리의 형벌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 당하는 주님의 모습 뒤에 그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모든 약함과 질병과 저주에서 벗어나는 인류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사야선지자가 눈물을 흘리며 6절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자신의 구세주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순순히 십자가에 누우시고 팔을 벌리시는 메시야의 모습이 제물로 바쳐지는 순한 양과 같다고 기록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이 오늘 확실하게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밝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당한 죽음은 하필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세상에 많은 고통스런 죽음이 있지만 십자가의 형벌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두 손과 발에 못을 박아 나무에 달아 놓고 피가 다 흘러내려 죽을 때 까지 두는 사형법입니다.

못을 박을 때 뼈가 으스러졌고 그 상처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요일 밤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유대 관원들에게 체포당하셨습니다.

새벽까지 제사장의 뜰과 로마법정을 끌려 다니며 심문을 받으시고 사형선고를 받아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신 시간이 오후3시입니다.

여섯 시간 그 극심하고 참혹한 고통을 고스란히 당하신 것입니다.

페션오브크라이스트를 보면 주님의 몸은 채찍에 맞아 피가 낭자하고 인간의 몸이라고 볼 수 없이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잔혹함에 오금이 저려 눈을 뜨고 차마 자세히 볼 수 가 없습니다.

아무리 인류의 죄를 모두 짊어진 죽음이라 해도 하나님의 심판이 어쩌면 저렇게 가혹할 까 몸서리가 쳐집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그렇게 일말의 긍휼도 없이 처절하게 심판하신 걸까요?

그 참혹하고 무서운 형벌과 죽음이 바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피조물이라도 정확하게 죄의 값을 매깁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은 하나님 스스로도 거스릴 수 없습니다.

불의와 죄에 대한 엄정한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자신의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듯이 하나님의 죄에 대한 공의의 속성은 아들이시라도 차별 없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시고 인간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공의로 형벌 받아 마땅한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죄를 덮으신 하나님의 사랑도 오직 십자가 아래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내가 형벌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반드시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 앞에 갚아야 할 내 죄의 값을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여전히 나를 높입니다.

여전히 나의 신앙행위로 받을 게 더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려 아직 자신의 죄 값을 정확히 계산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 구원 받는 믿음의 시작은 십자가를 깨닫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5장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또 요한복음16장8절에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진리의 성령이 충만히 임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과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길 매일 기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성령충만을 받아 구원의 깊은 감격과 감사가 충만한 성도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주님은 십자가의 그 사랑을 우리가 알길 원하십니다.

0이비인후과 원장인 이0진집사님의 간증을 잠시 소개하려고 합니다.

집사님은 90년전 통영에 살던 외할머니가 선교사의 전도를 받으며 믿음이 시작 된 3대째 믿음입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학생시절엔 수련회에 은혜를 받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손을 들고 서원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학진학을 놓고 고민하다 불같은 성격으로 목사가 되는 것이 적당치 않다는 생각으로 의대를 선택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마음대로 의대를 선택할 수 있다니 참 부럽죠?

의사가 되어 두 자녀를 두고 세상적으로 볼 때 부족함 없고 걱정 근심 없는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교회를 나갔지만 성경도 기도도 전도도 없이 그냥 습관적인 믿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고난이 다가왔습니다.

나이 40이 되자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캐나다 이민을 가기로 결정하고 영주권을 받고 짐도 다 부치고 출국 날짜를 5일 남겨 놓았을 때입니다.

초등학교5학년 된 아들의 온 몸에 멍이 들고 열이 나 병원에 갔던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정밀검사 결과 재생불능성 빈혈에 급성 전격 간염으로 간이 굳어져 죽어가는 불치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고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그 자신 있던 세상이 갑자기 무섭고 두려워지는 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마음이 다 녹아내리는 것이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드디어 내 인생에 개입하기 시작하신가란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이민은 취소되었고 아들의 투병생활로 응급실을 드나들며 눈물의 시간을 보낼 때 그의 소식을 들은 교회 집사님들이 릴레이 새벽기도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인 자신은 기도도 안하고 있는 데 교회식구들이 기도하겠다고 나서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 그냥 기도도 안 나오고 앉아서 울다 돌아 오곤 했습니다.

아들의 병은 점점 심해져 더 이상 수혈도 할 수 없고 골수 이식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골수 기증자의 골수가 맞지 않자 아들이 죽게 될거라는 무서운 생각이 점점 현실이 되 가는 걸 느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QT책을 보며 믿음으로 견디는 사랑하는 아들을 볼 때 아무 것도 못해주는 아빠의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어느 날 새벽 무너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 우리 아들을 데려가지 마시고 생명이 필요하시면 제발 저를 데려가주세요. 우리 아들은 좀 살려주세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데 마음 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제 알겠니? 그 마음이 바로 너를 살리려고 십자가에 오른 내 마음이다.

갑자기 감전이 오는 듯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당하는 모습이 떠오르고 바닥에 고꾸라져 통곡을 했습니다.

99%의 삶을 자기 위해 살고 나머지만 주님께 드렸던 인생이 부끄러워 울고 그런 자신을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에 울었습니다.

얼마나 기도하고 났는 지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며 이제 자신의 삶도 아들의 건강도 가족도 다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주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겠다는 마음에 천 명의 결신자를 얻을 때 까지 전도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병원에서 복음을 전해서 250명을 주님께 인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본문의 말씀대로 아들은 별다른 치료 없이 점점 증세가 호전되더니 작년에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난 일을 얘기하면서도 아들의 고통이 생각나 여전히 울먹이는 아버지의 사랑이 곧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번 한 주는 고난주간으로 지키며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대신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죄입니까?

하나님을 싫어하고 주님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살고 나 스스로 우주와 인생의 하나님이 되려는 죄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주신 하나님 형상의 선한 의지와 착한 양심을 따라 살지 못한 모든 악한 행실과 죄입니다.

이 죄들을 죽을 때 까지 반복해서 영원히 짓게 될 우리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며 믿을 수 있는 종교에 대해선 얼마든지 관대합니다.

인생의 주인을 자기로 삼고 신이 될 수 있는 종교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거룩하게 살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 종교는 격렬하게 배척합니다.

어쩌면 교회 안에서도 죄를 버리고 십자가의 사랑을 따르는 믿음보다 축복 받고 마음의 위로를 얻는 반쪽 복음만 전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속에 있는 죄를 항상 살피고 잘 다루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구속으로 나는 진짜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하시는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아들의 처절한 고통의 댓가로 구속하셨고 자녀 삼아 주셨으니 악한 자가 감히 만지지도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주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성령께서 은혜를 주시길 기도할 때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수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