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것은 이사야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탄생하기 7백년 전 사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따지자면 2천 7백년 전 사람이죠.
1947년 봄, 이스라엘 사해 북서쪽 해변가에 한 목동이 잃은 염소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목동은 절벽에 있는 구멍에 혹시나 염소가 빠졌는가 싶어 돌을 던져 염소의 울음소리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동굴 안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굴로 들어간 목동은 여러개의 항아리와 그 안에서 가죽 두루마리둘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성경사본 중 가장 오래 된 사해사본입니다.
그 중에는 이사야서 두루마리가 있었는 데 과학적으로 측정 된 기록 연대는 주전 3백년 경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직접 썼던 원본은 사라졌고 사백년 정도 지나서 쓰여진 이 사해 사본이 가장 오래 된 이사야서 사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 베껴 쓴 사본들을 모아서 진위를 분별하고 집성해서 만든 것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사해사본에서 발견 된 이사야서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수천년을 거쳐 하나님은 말씀을 오류 없이 보존하셔서 우리에게 전해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사야서에는 7백년 뒤에나 오실 메시야의 탄생과 메시야의 십자가의 고난과 재림까지가 아주 많은 분량으로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 부분입니다.
어때요?
읽어보시니까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게 그냥 인정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53장을 읽어보면 어린아이가 읽어도 어, 이건 예수님이네 라고 알 수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알아가는 것이 견고한 믿음을 가지는 데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시간을 두고 매일 성경을 배우고 묵상한다면 주님을 구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회복하시는 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함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인해 우리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것이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 다 아시죠?
우리 인생에서 나의 구원자인 메시야 예수님을 진짜로 만났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언 된 축복들이 이루어진 것다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주님이 오심으로 우리 인생에 달라진게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째는 1절에 말씀한대로 고통 받던 우리에게 흑암이 없어진 다는 것입니다.
흑암이 있던 그곳은 하나님께서 멸시를 당하게 했던 땅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는지 이유야 너무 잘 알고 있으시죠?
오죽하면 하나님이 멸시를 하셨다는 표현을 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고통 가운데 버려 두셨다면 방관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축복받을 행위가 없는 사람들에게 무한정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두 가지 면에 다 저촉되는 것입니다.
일정 기간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세계에서도 마땅한 데 하물며 완전한 영적인 세계에서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속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 행위가 우리 보기에도 흠이 많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책망할 일이 많겠습니까?
우리 환경이 흑암 같은 절망과 고통이 계속된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원인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연단이면 인내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 뒤엔 축복이 따라온다는 게 성경의 영적 원리이고 약속입니다.
그러나 죄가 그 원인이라면 속히 돌이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되 자녀를 대함 같이 하신다고 신명기 8장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우리가 자녀들을 어떤 마음을 갖고 징계하는 줄 안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약속은 하나님의 징계가 또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고난 받은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겠다는 확고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 실패한 자리를 털고 나오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서셔서 주의 백성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죠.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르던 그 곳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약속이십니다.
그것도 3절에 약속하신 대로 이 나라를 아주 창성하게 하시고 즐거움을 풍성하게 더 하게 하신답니다.
하나님을 어떤 환란과 고난과 징계 가운데도 신실하게 믿는 성도들에겐 약속하신 즐거움이 반드시 임하는 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 즐거움을 어디에 비교하냐 하면 추수하는 즐거움,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요즘에 월급장이인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뜻밖의 성과급을 두둑이 받아 쓰고도 남을 돈이 통장에 넘치는 즐거움이라면 될까요?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이런 부요한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아직 못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이 좋은 것을 반드시 주시겠다 약속하신 것을 꽉 붙드시길 축복드립니다.
믿음으로 소망하고 입술로 고백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이것을 자꾸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주어졌는 데 믿음의 뒷심이 부족해서 탈취물을 눈 앞에서 놓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내하고 끈기 있게 기다렸다면 끝까지 소망을 놓치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이 무겁게 맨 멍에와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무겁게 맨 멍에가 무엇입니까?
우리 어깨에 떨어지는 채찍은 또 무엇인가요?
그것이 무엇이든 이 모든 것을 꺽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붙드시길 축복드립니다.
인생이 호락 호락하지 않음을 한 고비를 넘을 때 마다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매고 있는 이 무거운 멍에가 벗겨질 날이 과연 언제일지 막막하기만 할 때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묵묵히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우리를 압제하는 모든 환경에서 건지실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오늘 약속하신 대로 창성하게 되는 축복과 즐거움을 주실 줄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이것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의로운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다 아시죠?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명시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의인이 되고 약속하신 축복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의가 없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을 보고 의롭다고 지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좀 헛갈리시죠?
어차피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고난 존재 자체가 죄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 스스로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결정하시는 데 그것이 바로 이 한 아기를 통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이 한 아기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오늘 우리가 그 탄생하심을 기념하는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의 죄로 멸시를 당하고 압제를 당했던 것들을 내가 영화롭게 하고 창성하게 하겠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할 한 아기를 너희에게 주겠다 이 뜻입니다.
우리가 곤고한 인생길을 허덕이며 갈 때 하나님의 축복을 되찾을 방법이 더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인생의 풍요와 번영을 위해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까?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를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할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한 아기의 이름을 다섯 가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다섯 가지의 이름을 갖고 태어나신 것이죠.
인간은 보통 하나의 이름을 갖습니다.
자녀들을 낳고 이름 지을 때 꽤나 들 고심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태어 날 아이의 성별도 모른 채 이름을 짓는 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아들이어도 좋고 딸이어도 좋을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이름의 뜻도 중요했구요.
그런데 요즘 부모들이 아이 이름을 지을 때 선호하는 것이 남녀의 성별이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호하는 이름들이 민준, 지후, 준서, 서연, 민서, 지우, 서윤 이런 이름들이랍니다.
제가 일찍이 시대를 앞서갔던 것 같습니다.
인간 부모로서도 자식을 낳으면 모든 기대를 쏟아 붓고 아이에 대한 기대치를 이름으로 표현하게 되죠.
물론 이름대로 자식이 다 커줄리 없다는 게 문제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메시야 아기의 이름은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대를 갖고 지으신 이름의 뜻을 그대로 이 땅에서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의 뜻을 순서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이름은 기묘자입니다.
기묘자란 말은 우리 말에서 잘 쓰지 않는 말인데요.
기이하고 묘하며 대단히 좋은 것이란 뜻입니다.
영어가 더 잘 이해가 되실 것 같은 데 원더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놀랍고 멋진 이런 의미로 기억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원더플이란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기이한 분이신지 그 분 자신이 원더플이고 주님을 믿는 우리의 인생 또한 원더플로 바꾸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필그0선교회 정0광이란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6.25직후 영국인 회사에서 일을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의 특이한 행동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든지 언제고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원더플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가난했고 황량했고 정말 볼품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꾀죄죄한 아이들을 보고도, 재래시장에 가서도, 초가집을 바라보면서도 무조건 원더풀을 남발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름인 원더풀을 입에 달고 살더라는 것이지요.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허덕이며 살던 정목사님은 조상들의 믿음의 덕으로 자손대대 축복을 받는 미국과 유럽의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한 아기인 예수님이 우리 삶에 함께 하실 때 우리 인생을 원더풀한 인생으로 바꾸어 주실 줄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입으로 그들과 같이 항상 멋진 주님을 향해 마음 속에 원더풀을 외치시길 축복드립니다.
사소한 일에도 지나치게 눈꼬리를 올리지 말고 기묘하고 놀라운 예수님을 모신 자녀들 처럼 여유를 갖고 원더풀이라고 다른 사람을 격려해 주시길 원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우리 삶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아멘.
두 번 째 주님의 이름은 모사라고 합니다.
모사는 보혜사란 말 처럼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상담자이고 지혜로 모든 것을 이끄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탁월한 지혜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인도하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는 사복음서에 나타난 실화들을 통해 입증이 됩니다.
물론 우리 눈높이에 맞추신 주님의 지혜이지만 기록 된 주님의 말씀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주님의 지혜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지혜로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상담하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우리가 생각해내는 건 그야말로 하수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상담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주님 앞에 문제를 놓고 진지하고 골몰하게 기도할 때 번뜩이는 주님의 지혜와 해결책이 떠오르는 것 느껴 보셨죠?
내가 어떻게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을까 믿을 수가 없을 때도 있죠?
맞습니다. 안 믿어지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인게 맞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도 주님과 상담하며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매순간을 대처하며 살아간다면 큰 과오는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상담자가 되시는 주님의 이름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의 문제를 맡아 주시고 지혜를 주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세 번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뉴질랜드의 호적담당부서에서 부모가 출생신고하기 위해 가져 온 이름을 거절한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세 명의 부모가 아이 이름을 사탄이라고 지어와 출생신고를 하려 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대책 없는 부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라는 이름과 하나님이란 이름도 역시 부적합 판정을 받고 거절 당했다네요.
또 거절당한 이름 중에는 컴퓨터 자판에 있는 *이나 마침표나 슬러시를 이름으로 쓰겠다고 들고 온 괴상한 부모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날 범상치 않은 한 아기가 예언 되었는 데 그 아기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태어날 아기는 사람인데 그 이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모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헤쳐가며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포도나무인 주님께 붙어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과실을 맺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성경은 성령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애를 써서 우리 능력으로 이 세상 일을 하든 주님의 일을 하든 그게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하지 않고 내 생각과 의지로 했다면 그게 잘한 일이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이해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그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성을 가지고 성취한 모든 일은 그럴 듯해 보여도 실은 죄의 냄새가 나는 것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이 불쑥 솟아나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과 견주려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입니다.
저는 원래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지금도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적성에 썩 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말씀대로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주님이 능력을 주실 때 그냥 순종하며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깨닫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정신 차리면 전 언제나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예수님이시고 전 그냥 주님 곁에 붙어있고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과 함께 일합니다.
실수도 하고 좌절도 하고 낙심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전능하신 주님을 구합니다.
약한 우리를 바라보지도 말고 두려운 환경을 바라보지도 마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울 한 아기 예수님만 바라볼 때 우리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아멘.
네 번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한 아기의 또 다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본체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2장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 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결코 이 땅에 태어난 한 성인이 아니십니다.
물론 주님의 인격과 행동은 이 땅의 그 어떤 성인을 가져다 댈 수 없게 가장 완전하고 오류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완전한 인간이셨던 주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받아야 할 분만이 아니라 경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이천년 전에 유대 땅을 밟으셨던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시며 영존하십니다.
변함도 없고 다함도 없고 부족함도 없으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섬기며 살 때 우리를 압제하던 사탄의 멍에가 벗겨지고 어두움의 세력들이 꺾이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온전한 예배와 경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 삶에 날마다 추수하는 즐거움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다섯 번째 이름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평강이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마음에 평강이 있다면 이겨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문제 속에서도 평강이 없고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면 작은 난관도 이겨내지 못합니다.
성경은 두려움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평강의 왕을 우리 마음에 모시지 못했기 때문이죠.
물론 믿음이 연약한 우리가 시시때때로 흔들리고 불안해질 때가 수시로 있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평강의 왕인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다면 그것이 장시간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를 공황장애나 우울증이나 염려증으로 몰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게 당연히 아닙니다.
잠언10장 22절에서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근심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당연히 악한 세력이 우리 심령에 다가온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근심에 쌓여 수고해봤자 돌아올 게 슬픔 뿐인 인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왕이라 불리우는 한 아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두렵고 근심이 슬그머니 내 마음에 다가올 때 평강의 예수님을 부르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구할 때 우리 뼈를 마르게 하는 근심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일어설 줄을 확신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시고 구원하실 한 아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의 다섯가지 이름은 우리가 해결 받아야 할 문제의 실체들입니다.
놀라운 상담자가 되시는 주님과 인생을 함께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내 자신을 왕의 자리에 두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일평생 인간을 짓누르는 근심과 두려움을 거두실 평강의 예수님의 이름을 날마다 부르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는 아무 잘한 것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런 주님을 보내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을 열심히 따르며 예수님 안에서 약속 된 모든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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