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잡코리아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해를 보내며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냐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1위가 무엇이냐면 ‘어영부영 보낸 시간들’이었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다 후회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입니다.
후회가 잔뜩 묻어나는 제목입니다.
내 자식이 그 때 내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처럼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부모라면 망한 자식보다 더 마음이 아프게 마련입니다.
개역한글성경에는 ‘슬프다’ 라는 말이 앞에 있습니다.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지난 한 주간, 내 행동이 무엇을 주의하며 무엇을 따라 살았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주위에 널려있는 우상문화를 따르고, 탐욕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하루 하루 살았던 이스라엘이 망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은 국가의 패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본문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왕조가 이미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남유다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사야선지자는 바벨론제국에 의해 장차 남유다가 멸망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이스라엘백성들을 하나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얼마나 정교한지 바벨론제국을 멸망시키고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을 풀어 줄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고레스’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런 예언을 한 이사야선지자는 톱으로 켜져 몸이 두 동강이 나 죽었습니다.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회개하라는 말에 자신의 귀를 막고 선지자의 입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이런 죽음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들이 목숨을 내놓고 증거 한 사실과 그 예언들이 그러므로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신통하다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예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죽음을 통해 성경의 진실 됨을 보여주십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죽은 뒤 남유다는 예언대로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또 예언대로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 의해 패망합니다.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가 되었던 이스라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귀환명령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은 실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와 신탁을 받은 선지자들의 증언이고 모든 예언은 역사적으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지 않았기에 망했다면 우리에게도 예외라고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15장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 된 것이니
하나님이 동일하시니 상대가 누구든, 언제든, 당연히 말씀하시는 의도도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본문을 잘 살펴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12절,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이 우주와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땅의 무수한 우상신과 비교할 수 없는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완벽하게 구상하고 만드신 광대한 우주는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웅장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으신 동식물은 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보여줍니다.
어떤 아름다운 피조물도 자기의 잘남을 의식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창조하신 창조주의 지혜와 영광을 피조물의 본분을 다해 드러낼 뿐입니다.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즐겁게 피조세계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유일하게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앞에 서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들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시큰둥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양심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습니다.
인간의 양심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도록 DNA에 입력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창조자가 작품에 사인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 심재숙집사님 어머니께서 은혜롭게 병상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첫 번째 말씀드린 게 그것입니다.
어머니, 하나님이 계신 것 아시죠?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그럼 계시지’ 하시더군요.
어머니가 뭘 그 병상에서 거짓말을 하시겠어요?
그래서 그 다음 복음이 잘 연결되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진짜 진지하고 솔직하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못 들어서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해서 불순종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하나님을 못 봐서 잘 안 믿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 불순종한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하늘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시면 정말 예수님이 평소에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대로 그대로 사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의 욕망대로 삽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욕망과 예수님의 선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사는 것입니다.
갈등 없이 살면 불신자이고 갈등하며 살면 신자인 셈이죠.
인간은 정말 태생이 악합니다.
기회가 있으면 그게 드러납니다.
이번에 브라질이 준결승에서 1대7로 지고 나서 폭동이 일어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와중에 역시나 상점들이 약탈을 당했습니다.
축구 진 것하고, 상점 터는 것하고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요?
인간만이 양심이 가르쳐주는 창조주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죄를 짓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이스라엘이 옛 부터 자신을 보여주신 창조주하나님을 알면서도 그 명령에 주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과연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신 영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주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 명령을 주의해서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두 번의 이스라엘 구속을 말씀하십니다.
한번은 과거 조상들에게 있었던 출애굽의 구속입니다.
또 하나는 장차 바벨론 포로에서 다시 건져내실 출바벨론의 구속입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막을 통과할 때 기적으로 인도하셨던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애굽의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백성들을 누가 엑소더스 시켜주셨습니까?그들 스스로 독립운동을 해서 풀려나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싫다고 안 온다고 하는 그 백성을 이끌고 나오셨습니다.
이게 구원에 대한 죄인의 한계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죄인의 상태를 깨닫고 구원받으러 오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필요로 해서 나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 저 사람을 보내서 오기 싫은 우리를 가자고, 가자고 손을 잡아 끌어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죠.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러다 점점 내가 죄인이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필요하구나, 이렇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더하셔서 롯을 강권해서 소돔에서 끌어낸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끌려나온 게 감사하고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주시고 가나안의 주인을 삼아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신을 따라 가더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초코가 가출하고 돌아온 뒤 콧바람이 났습니다.
누가 왔다가 가면서 같이 가자고 하면 홀랑 문 밖으로 따라 나섭니다.
안에 있는 나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꼬리를 치며 따라 나갑니다.
하나님이 구속하고 이끌어 내시고 만나로 먹이시고 불과 구름기둥으로 광야에서 인도하셨더니 가나안에 잡신들에게 홀랑 마음을 뺏겨 우상신을 따라 간 것입니다.
멋대로 살며 믿을 종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버렸기에 그들은 가나안부족 보다 더 부패한 민족이 되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내 명령에 주의했더라면.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그들에게 두 번째 구속을 약속하십니다.
14절에 보면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고레스왕을 통해 바벨론을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20절에 보면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땅끝까지 반포하여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라.
바벨론 포로에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레스왕을 시켜 그 일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떡합니까?
이스라엘은 죄의 본성에 팔려 또 하나님 따르기를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구속이라면 인간 역사가 끝날 때까지 끝없이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사기가 그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반복되는 불완전한 구속을 완전히 종결지을 새 일을 행하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넌지시 계시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보내 모든 죄를 속하고 아예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점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53장을 보면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실 것을 예언하지 않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얼마나 완벽하고 치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예언하고 있습니까?
왜 이스라엘이 안식일마다 이사야선지자의 글을 읽으며 그렇게 메시야에 대해 무지했는지 정말 미스터리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했건만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그 명령에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심판받을 죄에서 우리를 건지신 구속자가 맞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이고 구속자이신 하나님은 또 자신을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여호와라.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죄값을 모두 갚아주신 구속자신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마땅히 행할 옳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조언을 듣고 어떤 기준으로 이 불확실한 위험한 인생을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명령에 따를 때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대단한 희생이나 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주의하고 따르지 않았기에 오히려 망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않았으리라.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평강이 없고 공의가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라가 망하고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게 된 것이죠.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무엇을 교훈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지 않으면 평강이 없고, 공의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서 살 때 우리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의해서 살 때 공의가 우리 삶을 견고하게 받쳐줍니다.
법을 어겼을 때 불안, 초조하듯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어기며 살 때 범법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굶어도 떳떳합니다.
마음에 평강이 사라지고 왠지 자꾸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해서 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한 주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우리가 주의해서 살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행동을 바꾸고 우리의 결정에 기준이 되었습니까?
너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대로 뭘 좀 양보하고 살았습니까?
거짓말하는 입술을 틀어막고, 남을 비방하려는 내 마음을 꾸짖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서 내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갈등이 되지 않았다면 그 상황이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게 아니라니까요.
제사와 함께 악을 행하는 것, 그것 때문에 누가 성전문을 차라리 좀 닫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아니면 그게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살지 않았는데 선한 삶은 없습니다.
나름 착하게 산 것 같지만 절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죽을 때 까지 따라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당장은 세상 가치관과 너무나 다른 성경의 가치관을 따르는 게 손해보는 것 같고 과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결국은 영육간에 유익이 넘칩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게 엄청난 손해 같지만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십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평강을 강 같이, 공의를 바다물결 같이 그에게 부어주십니다.
사람들도 그런 신자들을 존경하고 옳은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사람들도 다 우리를 판단하고 정확하게 저울에 달아 봅니다.
언젠가 읽은 이야기인데 정확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꽤 존경받고 성공적인 목회를 하셨던 어떤 교회 원로목사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이북이 고향이신 이 목사님에게 과거 결혼했던 아내가 있었습니다.
난리통에 결혼한 지 한달 된 아내와 헤어졌고 6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북한의 아내와 헤어질 때 복중에 있던 딸이 이산가족 만남을 신청해 온 것입니다.
놀라움과 반가움과 혼란 속에 목사님은 상봉버스를 탔고 북한에서 60년동안 자기를 기다렸던 아내와 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이죠.
그런데 전 아내와 딸을 만나고 돌아온 목사님이 이상해지신 것입니다.
항상 평온하고 부드러웠던 얼굴에 근심과 고뇌의 흔적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교회에 원로목사직을 내려놓고 조용히 가족과 함께 떠났다고 합니다.
두 아내를 둔 목사가 무슨 목사자격이 있냐며 신앙양심에 도저히 설교단에 설 수 없다며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장기려박사님은 북한에 두고 온 생사를 모르는 아내가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아내라 생각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사셨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가 하수와 같이 그들의 삶을 창일하게 두루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말씀을 적용하고 사는 것도 조금은 다를 것입니다.
다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우리 행동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말씀은 외적인 복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고 살 때 이 땅에서도 잘된다는 것입니다.
부도덕한 부자가 되는 것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산이 적어도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인정과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누구든 더 일을 맡기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이 땅에서 왜 굳이 잘 안되겠습니까?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게 한국교회라고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예수님을 믿는 삶의 전부인 성도들의 낮은 도덕심과 아량을 베풀 줄 모르는 야박한 모습에 세상에서 신뢰감을 잃었습니다.
세상보다 더 세속적인 교회의 모습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냄새도 안 난다는 것입니다.
조윤0 의원이 미국생활을 할 때 있었던 일을 쓴 글을 읽었는 데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11테러가 났던 날입니다.
다급한 마음으로 현금을 찾아 놓고, 생수를 사러 정신없이 마트로 뛰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수자리가 벌써 텅 비어 있었습니다.
미국사람도 난리 통에 사재기하는 데는 별 수 없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점원이 안내하기를 사고현장에서 생수가 더 필요할 거라며 주인이 생수를 전부 트럭에 실고 현장으로 달려갔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생수가 채워지길 기다려 한참 먹을 것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데려오기로 한 옆집 아이엄마가 그날 따라 많이 늦는 것이었습니다.
늦게 아이를 데려온 옆집 아이엄마는 머리가 좀 길어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좀 자르고 왔노라고 하더랍니다.
쌓아둔 생수병을 보더니 테러를 이기는 방법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모습에 조수석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평범한 가정주부의 이런 정신이 미국이라는 강국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또 조수석이 미국에서 법학대학원을 마치고 연방법원에서 인턴으로 잠시 근무할 때 일을 가르쳐주던 검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 수입보다 겸손하게 생활하세요. 변호사가 되면 대출받아 좋은 집, 좋은 차를 사고 싶게 마련입니다. 그러고 나면 국가에서 공직을 제안받아도 나서지를 못합니다. 공무원월급으로 대출금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죠. 나와 내 가족 외에 내가 속한 사회와 국가을 위해 기여하고 있는 지 늘 돌아보세요”뉴스시간을 도배하는 공직자들의 부정부패 사건에 신물이 나는 우리에게 얼마나 신선한 충격입니까?
미국건국의 기저가 된 청교도 정신이 아직도 그들의 재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 때 부도덕한 유럽의 도시들이 구원을 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술집과 매춘이 사라지고 정치인들이 각성하고 상인들이 정직해지고 범죄가 도시에서 사라진 사례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업무, 가정, 직장, 학문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에 주의한다면 분명히 우리의 발걸음이 닫는 곳에 작은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어떻게 말씀대로 사냐고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믿는다는 명목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지 분명하게 예수님이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양과 염소 비유를 보면 분명히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무리들 앞에서 한쪽은 영생에 한쪽은 영벌에 들어갈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냐가 아닙니다.
분명히 해야 할 선한 일을 했냐 안했냐가 기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행함으로 증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자기도 속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 지 자기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이 행함으로 그 믿음이 인증되고 있나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형식적인 제사를 드린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서 살 때 평강이 있고 삶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데 어찌 마음에 평강이 있고 일이 잘되겠습니까?
용서하라는 말씀대로 지키지 않으면 내 마음과 육신에 병이 됩니다.
가족조차 사랑하지 않으니 어찌 가정이 화목하고 견고해 지겠습니까?
거짓과 속임수를 버리지 않으니 누가 우리를 인정해서 좋은 자리를 맡기겠습니까?
말씀대로 주의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유익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본성대로 살면 분명히 망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예수님의 명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주의하며 산다면 우리의 평강이 강 같고, 의로움이 바다 물결 같으며, 우리와 자식들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014.7.13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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