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이사야30장18절-26절(기다리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남수연 2015. 1. 7. 13:49

2015년 새해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좋은 양분을 먹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가 잘 붙어있기만 하면 올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영육간의 좋은 것들을 풍족하게 누리게 하실 줄 확신합니다.

예수님께 잘 붙어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몸인 교회에 잘 붙어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에서 더 주님을 알고 더 잘 섬기게 되는 것이지 세상 어디 가서 그걸 배우겠습니까?

세상은 아시다시피 우리에게 완전한 행복을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복은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입니다.

여성들이 많이 드는 명품 짝퉁 있지 않습니까?

명품과 짝퉁 구별하는 방법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죠.

비올 때 가슴에 품고 뛰면 명품이고 머리 위에 얹고 뛰면 짝퉁이라든지, 값을 물어볼 때 얼버무리면 짝퉁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명품이라든지.

최근 업그레이드 된 내용 중에 보니 새벽기도 때 들고 오면 짝퉁이고 주일 예배에 들고 오면 명품이란 말이 있더군요.

가짜, 거짓, 위선은 아무리 가져도 결핍만 더 느끼게 합니다.

짝퉁가방 백 개를 가지고 있어봤자 진짜에 대한 갈망과 자기 빈곤만 느끼게 되는 것이죠.

진짜를 소유하면 당당함과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알고 나면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도 하나님이 빠진 것은 가치가 없는 가짜라는 걸 알게됩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우리 하나님만이 변하지 않고 마르지 않는 최고의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영생의 복을 주셨고 매일의 삶을 윤택하게 하시고 기쁨과 은혜로 충만하게 하심을 믿으시죠?

새해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도 더욱 좋아하며 따르길 소망합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을 잘듣고 한 해 동안 잘 지킴으로 더욱 복있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곤궁에 빠진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새해 시작부터 영과 육의 문제들이 슬슬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하는 데, 말씀의 위력이 모든 것을 물리치고 힘찬 믿음으로 새해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먼저 새해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는 같은 본문을 가지고 새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8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기도응답을 기다리고, 은혜주시길 기다리고

그런데 오늘 본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본문 앞 부분을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을 안 듣고 노골적으로 척을 지려고 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지어 그런 자들도 기다리신다고 18절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다려준다는 것은 사랑한다의 다른 표현입니다.

못 기다려주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항상 자식을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기다려주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기죠.

대한민국 사교육1번지인 대치동 학원가 앞에는 학원 강의가 다 끝나는 밤10시면 수백개의 학원에서 학생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옵니다.

강남구청 주차관리과와 수서경찰서에서 30명이 투입되어 불법 주정차한 학부모 차량들과의 전쟁이 매일 밤 벌어집니다.

공부에 지친 내 자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태우고 가려는 부모들은 경찰이 흔들어대는 야광봉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차머리를 들이박고 들어옵니다.

저도 해봐서 잘 압니다.

어떤 부모는 첩보작전이라도 하듯 학원 앞을 살피며 주변을 돌다가 학원 문을 나오는 아이를 보면 차 문을 열고 소리를 질러 순식간에 아이를 태웁니다.

차에 탄 아이는 이걸 위해 부모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절대 모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는 자식인지라 사실 기다려주시는 아버지 마음 잘 모릅니다.

올해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것은 잘 모르겠고, 지난 일년 열심히 하나님만 기다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래 기다려도 하나님의 사인이 너무 안 느껴질 때, 우리가 영적인 피로를 느낍니다.

그럴 때도 우리가 이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끈기 있게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믿음은 감정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인즉슨, 우리가 내게 유리한 대로만 기억해서 그랬지 작년에 다들 하나님아버지 많이 애태워드렸습니다.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을 또 참아주시고 열매를 얻기까지 하나님은 올해도 우리를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이유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더 좋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기다리신다니요.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다는 뜻도 됩니다.

18절에 보면 일어나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시잖아요.

식사자리에 귀한 손님이 오면 먹다가도 다들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버지 앞에 나오는 순간 기뻐서 일어나서 맞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빈이가 들어오면 우리가 다 벌떡 일어나서 맞이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에서 이 장면을 아름답게 비유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쓰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본 아버지가 이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 을 맞추니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 앞에 돌아와 그 그늘아래 거하기를 정말 원하신다는 것을 본문에서 꼭 새겨두시길 바랍니다.

또 이 말씀은 아버지 앞에서 은혜와 긍휼을 얻지 못하면 세상 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힘겨운 우리의 일상에 눈을 맞추시고 함께 일하시는다는 사실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뭔가 자꾸 더 해야만 되고 내 것을 더 희생해야 된다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헌신하고 드린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가 드린 것은 결국은 우리가 받을 축복의 밑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은 그것의 열매를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새해에는 우리를 기다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언제든 일어나셔서 환대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는 모두가 되어야 겠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9절에 보면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내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실제 상황에 대고 하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앗수르의 침공이 배경으로 보여집니다.

이미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살육하고 예루살렘의 파멸도 경각에 달려있었던 것입니다.

침략자를 막아보려고 성전문짝과 기둥의 금까지 다 벗겨서 얼러보았지만 숨도 돌리기 전에 앗수르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해 온 것입니다.

백성들은 멸망의 공포에 질려 통곡하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너희에게 다시는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위기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초한 위기이고 징벌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부지런히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이집트의 군사 원조를 의지했고 금과 은을 동원해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 시도는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멸망이 코앞에 다가오자 남은 것은 두려움과 통곡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징계받는 백성의 통곡일지라도 이를 편히 듣지 못하십니다.

사사기101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곤고한 눈물을 보실 때 마음에 근심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눈물이 얼마나 부모의 마음을 조리게 합니까?

다윗은 시편에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성도의 눈물을 헛되이 흘려 버리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요한계시록 7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의 눈물을 아시지 않습니까?

작년에 흘린 눈물이 얼마나 되십니까?

내 인생에 설마 이런 일이 생기랴 상상도 못했던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어쩌면 눈물도 마르고 체념만 남은 삭막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올해도 우리 삶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는 눈물은 절망과 비통에 가슴을 쥐어뜯는 통곡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울면 눈물 뒤에 새로운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삶에 다시는 비통한 통곡은 없는 것입니다.

19절 하반절 다시 읽습니다.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을 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아버지께 들려야 응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탄식이 넋두리가 되면 안되고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해야만 사방이 에워싸인 환경에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데 왜 꼭 구해야만 들어주십니까?

왜 힘들여 부르짖어야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겁니까?

에스겔 3637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왜 굳이 구해야 하는지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꾸 마음을 열고 나가 대화를 시도하면 확신하건데 관계가 더 빨리 정립이 됩니다.

오늘 본문 당시처럼 이전에도 예루살렘이 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람나라와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남유다를 침략하러 왔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남유다의 아하스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다고 이사야서7장에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그 두 나라 왕이 결코 유다를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될 것을 확증해 줄 증거를 먼저 보여줄 테니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아하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712절에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증거를 주지 않으셔도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게 안될지도 모르는 데 하나님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냐는 말입니다.

그 때 이사야가 네가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아하스는 하나님께 징표를 구하지 않은 채 그 당시에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역대하282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세상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살 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우리를 나중에 공격합니다.

신자들이 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내면에 아하스와 같은 이런 불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했더니 낫지도 않던 데, 뭘 자꾸 기도해서 기도하는 우리나 치료 못하시는 하나님이나 피차 곤란해질 것 있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오늘도 분명히 응답하신다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든 간절히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들으시는 그 순간에 응답을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응답은 완성품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도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직장의 문을 두드리고 열리기까지의 많은 과정들을 어떻게 생략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문제들에는 너무나 많은 환경적 요인들과 사람들이 얽혀 있잖아요.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고 응답이 되게 결론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손해입니까?

하나님을 믿어드리지 않아서 괴롭게 하는 것이고, 내 힘으로 다 해나가려니 생으로 고생만 되지 별 뾰족히 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우리의 영육간에 어찌되었든 더 선하고 유리하게 응답이 되었고 지금 응답되는 과정에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승을 주신다고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라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하나님아버지의 풍성한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곤고한 인생을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예루살렘 성곽 안에 갇혀 그걸 먹고 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환난의 떡을 먹고 고생의 물을 실컷 마셔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때 우리 가정에 있었던 실패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대개 우리 삶에서 만나는 이런 고통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지 않은 우리 스스로의 실패입니다.

또 인간이 선택한 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온 고통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승을 주십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한 현실에서 시원하게 가르쳐주는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정말 어떨 때는 답답함이 꽉 차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승을 주시겠다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저도 힘든 시기를 꽤 오래 겪었지만 그때 분명히 제게 스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스승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들, 환경들, 또 믿음의 교우들, 그리고 우리의 죽은 양심을 새롭게 하셔서 양심의 소리를 통해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들을 통해 용기를 얻고 주님이 가르쳐 보이는 길을 따라 왔더니 어느 새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이 끝이 났더군요.

물론 우리의 궁극적인 스승은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신다고 하셨죠.

보혜사가 두 분이란 말씀입니다.

보혜사란 상담자, 교사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과거로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그 이상한 역사가 다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가르쳐 주시는 스승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의 해석이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전 부터 계획하신 인간의 속죄와 구원의 열쇠가 바로 주님이심을 십자가의 대속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또 성령님은 그 모든 것을 더 확실히 깨닫도록 우리를 비춰주시고 가르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숨기지 않고 보내주신 분명한 스승이 계십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그 스승은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갈 길을 하나님이 앞에서 환히 보여주시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앞 날 좀 시원하게 알고 싶은 것 아닙니까?

이걸 계속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이걸 해야 될지 저걸 해야 될지, 이 사람인지 저 사람인지.

그걸 우리는 알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기다리다 갑갑증이 생겨서 신자들이 점집도 가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스승은 그렇게 알려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뒤에서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에도 가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우리가 결정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도록 우리를 인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단 한 길만을 제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가장 좋은 한 길을 보여주셨다고 합시다.

그 길이 끝까지 가도록 만사형통한 길이겠습니까?

한 두걸음만 가면 세상의 악이 침투하고 욕망이 얽히고 그 길은 결국 인간사의 고통스런 또 한 길이 될 게 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로보트로 만드시지 않는 한 완전하신 인도를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스승을 주셔서 선악을 분별하고, 최선과 차선을 구별하고, 선택하고 버려야 할 것을 깨달아 가도록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래서 우여곡절이 많고, 한 방에 시원하게 길이 뚫리고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모든 게 되어야만 안심하고 좋아하는 태도를 우리가 좀 바꿔야 행복해집니다.

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 정도면 괜찮다 이런 자족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게 좋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스승과 동행하며 살아가면 그 길엔 어려움 중에도 평안이 있고, 답답한 중에도 소망이 있고, 아픔 중에도 위로가 충만하다는 것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그 길 끝에는 분명히 아름다운 성취가 있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결국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말로 우리 삶에 하나님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축복이 부어지는 모습을 23절에서 26절까지 아름답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우리가 애써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풍성하고 기름지게 축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참 즐겁습니다.

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집에 가축도 키질해서 겨를 골라낸 맛있는 먹이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으면 우리 주변의 많은 이들과 심지어 동물도 혜택을 같이 누리게 됩니다.

강아지도 갈비 뜯으며 우리 곁에서 산다니까요.

그리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이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반복되는 죄악으로 매맞고 상처입은 이스라엘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이 완전하게 싸매시고 고쳐주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우리는 죄악 된 생애를 살아오며 받은 상처와 아픔이 다들 있습니다.

상처는 나은 것 같지만 흔적은 언제까지 남아 있습니다.

관계가 나아지고 환경이 개선 되어더 우리 심령에 남은 상처의 흔적은 희한하게 건드리는 순간 여지없이 그전의 고통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부부싸움하면 다시 다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흔적까지 지우고 싸매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못하고, 거절당한 우리의 모든 아픔은 나를 사랑하셔서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날 때, 비로서 다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우리의 죄악의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쳐주시기 위해 오실 메시야의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신비한 성경입니다.

죄악으로 점철된 손댈 수조차 없는 부폐한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들 속에서 유일하고 영원한 해결책이신 메시야의 이미지를 점점 자세하게 조명해가며 놀라운 예언들을 쏟아놓습니다.

오늘 예언은 53장에 가서 더 분명해 집니다.

메시야의 속죄의 고난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완벽하게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명분을 얻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맞은 자리를 싸매주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니 심판과 사망의 고통이 사라진 것입니다.

 

새해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만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주신 스승의 음성을 따라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을 따라 갈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은 이 길을 통해 반드시 우리를 축복하시고 싸매고 고치셔서 행복한 한해가 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 안에 더욱 견고히 서는 한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015.1.4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