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이사야30장의 말씀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침공 혹은 포위 된 상황으로 보여집니다.
우리도 어찌보면 사방이 불확실한 환경과 뒤숭숭한 문제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우겨 싼 이런 환경들 속에서 무엇이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힐지 마음이 항상 편치가 않죠.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문제의 해답과 우리가 따르면 복이 될 말씀을 오늘도 우리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올해도 우리의 믿음으로 안전하고 튼튼한 삶을 꾸려나가게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올해도 불안해하지 말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헤쳐 나갈 길을 가르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들이 에워싸인 상황에서도 구원받을 길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분명히 구원받을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상황이 적군이 포위하고 숨통을 조여오는 상황입니다.
얼마나 다급합니까?
하나님은 그런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조용히,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힘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내 생각과 다른 게 문제이고, 기다리기 힘든 게 문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이스라엘백성들은 정면으로 반발합니다.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쳐야겠다 는 것입니다.
이 위기를 넘길 방법을 내가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런 하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집트에 지원군을 요청해서 앗수르의 침략을 막아보려는 정책을 쓴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구원받을 길을 분명하게 제시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 하나님 방법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기도나 하고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의 위기에서는 외교력을 발휘하고 돈을 써서 용병을 지원받는 분명한 현실적인 방법을 써야 맞다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만 믿고 가만히 있다 독안의 든 쥐처럼 당하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의견보다 자기들의 작전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위기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성급하게 일을 해결할 때가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금은 가만히 기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일단 무엇이든 좀 하고 보자는 조급함이 불쑥 올라옵니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은 지금의 내 환경도, 어디로 발을 옮겨야 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지금의 형편도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도들의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관리 아래 일어납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하나님의 눈을 벗어나 어쩌다 되어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환경에서 우리는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숨통이 막히는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우리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은 그걸 통해 우리에게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일지라도 함부로 내려놓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헛디뎌도 흘러 떠내려갈 급류에서는 일부러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건넌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쓸어버릴 거대하고 드센 세속의 강을 건널 때 우리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이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게 하는 방편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조급하게 하고 얼른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더욱 잠잠히 하나님 앞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영화 속 인생처럼 그렇게 한순간에 달라지고 아침에 눈을 뜨고 났더니 유명해지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시계바늘을 아주 서서히 움직이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더 값어치 있는 우리 영혼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돈이 빨리 벌어지지 않는다고 조급해도 소용없습니다.
돈 빨리 벌면 갑질한다니까요.
우리가 그런 속물들이지 별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어머니와 함께 잠깐 일일 드라마를 봤습니다.
막장드라마 잘 쓰기로 소문난 임작가의 드라마였습니다.
거기서 여자와 일식집에서 밥을 먹던 남자가 여자에게 음료수를 시키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여자가 맹하게 일식집에서 오렌지쥬스를 시킵니다.
음식을 나르던 여직원이 오렌지 쥬스가 없다고 하자 남자가 직원에게 편의점가서 오렌지 쥬스를 좀 사오라고 합니다.
여직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찰라에 남자가 지갑에서 오만원 지폐를 꺼내더니 거스름돈은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직원의 표정에 금방 웃음끼가 어리며 냉큼 받아가지고 나가더군요.
이런 짓 좀 하고 싶어서 돈 많이 벌려는 것 아닙니까?
이정도야 요즘 있는 사람들이 하는 갑질에 비하면 애교 정도지만요.
하나님이 내가 모르고 있는 나를 너무나 잘 아셔서 위험한 도구는 미리 치워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하나님을 떠날 소지가 있는 사람에게 돈을 주시겠습니까?
건강하면 그거 믿고 운동장이나 필드에서 공이나 몰고 다닐 것 같으면 굳이 건강을 챙겨주시겠습니까?
좋은 직장주시고, 명예를 주시고, 보장된 미래를 주시면 하나님을 멀리할 게 뻔하다면 주님은 때가 될 때까지 보류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내게 없는 것 때문에 조급해하고 억울해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아무 거나 주는 게 아니고 선별해서 주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나를 안달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내 치부이고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는 가장 취약한 부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다만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돌이켜 조용히, 잠잠히 주님을 신뢰하면 구원을 얻고 힘을 얻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좋은 일을 이룰 힘과 환경을 반드시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외교적인 방법을 강구한 것이 왜 잘못이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살 궁리를 하고 당면한 문제들을 우리 생각과 기지를 발휘해서 해결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이 나쁘다고 말씀합니다.
본장의 1절을 보면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하나님께로 부터 받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죄라고 하십니다.
또 2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한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신자들이 이 땅의 생애에서 해야 할 영광스런 임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지 않은 모든 일은 내가 주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결국 그 일은 마귀가 주도권을 갖고 마음대로 사용하다 우리를 냅다 진흙창에 집어 던질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이렇게 항상 곤고하고 심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우리 삶에서 매일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우리 눈에 이 길이 당장 옳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이다 라고 확신하는 게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철썩같이 의지했던 것이 정말 살 길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완전한지를 아십니다.
우리가 계획한 일들이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축복받을 일인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퇴보하는 행위인지를 아십니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가 더욱 결심할 것은 이 선택이 과연 하나님이 축복하실 일인지 묻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두르지 말고 잠잠히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천천히 결정하고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러면 너무 진전이 없고 세월만 가는 건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이 한번 잘못된 선택으로 얼마나 길게 고충에 빠지게 됩니까?
저도 잘못된 선택으로 실패해 보아서 압니다.
안전하고 바른 길을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삼십살이 되실 때까지 하신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한 목수의 신분으로 나무나 밀고 망치질이나 하며 그 긴 세월을 하루하루 준비하며 사셨습니다.
우리가 그냥 있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다리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또 놀랄만한 훈련과 연단이 되고 우리의 자산이 됩니다.
하나님은 무한정 기다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내 가는 길이 안전하고 옳은 길인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구하며 잠잠히 하루하루에 충실하게 주님을 따른 것도 믿음의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기도해도 알 수도 없고 인도해주시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기도해서 빨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도 있지만 아무 사인도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며 하는 일은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성령께서 인도해주신 것이고, 고비고비 마다 섬세한 주님의 인도가 이끌어 주셔서 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범사를 선택해야 할 순간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지 기준을 만들어 놓아야 하겠죠.
지난 주에 말씀을 나눈 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른 길을 인도할 스승을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행동의 기준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수치를 당하지 않고 인생의 수렁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가 성경을 일독하며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의 인도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말씀이 분명하게 명시한 것은 핑계대지 말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또 우리가 하려는 일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인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결정하는 일이 예수님을 잘 따르는 데 더 도움이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면 그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된 직장이겠습니까?
또 내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의 방식에 맞는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방법을 따랐더니 일이 잘만 되더라고 한다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그건 결국 진정한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16절에 보면 우리가 말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쫒는 자들이 빠르리니
우리가 하나님을 따돌리고, 거역하고 따라간 그것이 곧 우리의 덫이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돈을 따라가면 돈이 덫이 됩니다.
건강을 문제로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면 건강이 덫이 되어 발목을 잡아 맬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그대로 되고 말았다는 것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과 동맹한 이스라엘에 분개한 앗수르가 모든 유다의 성읍들을 쳐서 파괴해버렸고 지금은 간신히 예루살렘만 남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17절 말씀입니다.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의지했던 것이 다 털리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렇게 다 털려나가고 꼭대기에 깃대만 겨우 남은 것 같다면 비참한 것이죠.
하나님을 불신한 이스라엘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약체가 되었는지 17절에서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너희를)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갈 것이다.
사소한 문제만 생겨도 부들부들 떨 만큼 심약해지고 감당할 능력도 자산도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3장10절에서 과거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하나님과 우리가 편을 먹을 때와 우리가 세상 방편과 편을 먹을 때가 얼마나 다른지 아시겠습니까?
이걸 꼭 아셔야 합니다.
후에 히스기야왕은 산혜립이 포위했을 때 성문을 걸어잠그고 하나님 앞에 그들의 전쟁포고문을 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약속하신 대로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18만오천명의 앗수르군대들을 전멸시켜 주십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우리가 힘을 얻고 세력을 얻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만사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올해도 더욱 의지하고 확고하게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두번 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도우심을 기다리되 정의의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인류에게 엄청난 소망이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제까지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결코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책망하고 탄식하십니다.
그런데 18절부터 난데없는 구원과 축복을 선포하며 정의의 하나님을 기다리는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정의의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것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해야 말이 맞지 않겠습니까?
정의의 하나님과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죄인들과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은 연결될 수가 없잖아요.
이스라엘백성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고 파멸을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죄가 그것으로 다 끝이 납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호된 벌을 당하지만 그들이 회개를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앗수르에 당하고, 다시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그 다음은 로마제국에 멸망당하고, 그걸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한계이고 죄인들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의하고 악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복을 받을 길을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절대 회개하지 못하는 불의한 이스라엘, 그 다음 풍요로운 축복,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모순이죠.
죄가 여전한 데 어떻게 그런 복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정의대로 하면 우리는 국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고 구해주려 해도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의 죄를 묵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때를 기다리신다는 것은 복안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이 세 가지 사이를 연결 시켜 줄 대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점점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가장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복안이 정체를 드러냅니다.
53장에 가서 선지자는 자기도 깜짝 놀란 이야기, 세상이 상상치도 못했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것은 도저히 구제할 길이 없는 우리를 벌하는 대신 다른 대속자를 보내셔서 우리 죄값을 대신 물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정의로운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실 방법은 죽어도 하나님을 따를 능력이 없는 우리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의 질긴 본성을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알고 벗겨내려 해도 안됩니다.
믿음이 성숙하면 그 사실을 잘 알게 되는 것이고 그걸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잘 포장하는 정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그 죄의 값을 예수님께 대신 물으시고 예수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믿는 자들을 대속하신 예수님의 공로로 더 이상 죄인으로 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3절 부터의 놀라운 축복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 죄인,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실 예수그리스도가 반드시 들어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까?
제가 눈이 좀 나빠져서 안과에 갔더니 망막에 황반변성이 온 것 같다고 전문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게 심해지면 실명하는 병이라고 합니다.
전 어릴 때 부터 눈이 너무 좋아서 안경 쓴 사람이 너무 부러웠던 사람입니다.
다른 데는 몰라도 눈에 병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강동 공안과에 가서 검사를 하는 데 어두운 진료실에 여러 사람이 마치 형량을 선고받을 사람들처럼 침묵 속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분이 상당히 묘하더군요.
내 눈의 상태를 저 기계에서 진단하는구나, 그리고 내 눈의 운명을 선고하면 앞으로 내 삶이 거기에 따라 달라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사뭇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 문득 든 생각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선다면 나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나고 평가를 받을텐데 내가 지은 죄와 숨겨졌던 악한 동기들이 다 드러난다면 정말 얼마나 두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 죄값을 다 지불완료하셨다는 보증이 되주지 않으신다면 내 장래의 영원한 삶은 끝장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습니다.
이사야서의 메시지는 아주 명료합니다.
다시는 굴욕과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될 메시야가 유일한 소망이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도 명료합니다.
매일 지지부진하고 구질구질하고 별볼일 없는 우리 삶에도 오직 희망은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이 시련의 삶에서 소망과 기쁨으로 인도하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안에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아들을 심판하셔야 했던 공의의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섬긴다면 어떻게 우리가 불의와 짝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받으신 처절하고 끔찍한 죽음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라면 여전히 죄와 뒤엉켜 살 수는 없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의로운 신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젠 하나님의 정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제 눈은 다행히 일반적인 노화현상이라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으라고 하더군요.
오늘 이스라엘백성들이 대적에게 포위를 당한 것은 하나님께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삶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 이사야선지자는 이렇게 되짚어 줍니다.
(너희가)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 무기력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도하시는 스승인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의지해서 단호하게 우리의 영역에서 죄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선 정의가 불의에 묻히고, 법의 헛점으로 죄가 버젓이 진실을 밟고 승리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아내의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살인행위를 저지른 남편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더군요.
없는 형편에 10억이나 되는 과도한 생명보험을 들은 남편이 가스벨브를 조작해 누출시켜 아내가 가스렌지를 켜는 순간 폭발해서 죽인 사건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정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반드시 남편의 인위적인 조작이라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법정이 남편을 무죄라 판결했어도 하나님의 법정에선 분명한 판결과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바울사도는 말씀했습니다.
아니, 매일의 우리 생각과 언행이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 앞에 다 드러납니다.
여전히 죄의 속성을 제거하지 못하는 신자들은 인생 채찍과 사람막대기로 근실하게 징계하시는 게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새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삶에서 징계를 불러오는 죄들을 멀리하고 우리 삶에 풍성한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보람있게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새해 우리가 따를 신앙의 기준에 대해 오늘 살펴보았습니다.
매일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힘을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정의의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 위해 죄를 대신 속죄해주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의지해서 우리 삶에서 죄를 털어버리고 제거하는 삶을 살게 되길 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 새해 표어대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게 되고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아름답게 나타나는 복된 삶이 되리라 믿습니다.
2015.1.11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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