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오늘 다시 하나님 앞에 모인 우리 모두를 성탄의 구주께서 축복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성탄절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에 대해 여러 성경말씀들을 통해 확신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신약의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들을 통해서 주님을 알 수 있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예언한 기록을 통해서도 주님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신 말씀을 배운 뒤, 실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기가막히게 일치하는 경이로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제는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았죠.
오늘은 속죄를 넘어 세상을 심판하여 완전한 나라를 이루시고 통치하실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해 속죄만을 알면 반만 안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셔서 영원히 통치하시고 악의 세력은 영원히 심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 태어나시기 7백년전 살았던 이사야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가장 정교하게 예수님을 예언한 선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사야서 53장을 보면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그만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메시야가 오셔서 다스리실 영화로운 나라에 대한 예언 역시 예수님을 통해 정확하게 이루어 졌고 종말적으로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라고 예언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예수님은 다윗의 씨,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했는데 이사야선지자는 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했을까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니 결국은 다윗의 후손이나 같은 뜻이 됩니다.
다른 많은 선지자들의 메시야 예언을 보면 다윗의 왕권을 갖고 통치할 메시야가 위엄있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과 같이 왕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세울 왕국은 당연히 다윗왕 때 같이 부강하고 주변국들을 능가하는 그런 세상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그와는 다릅니다.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여러 곳에서 메시야에 대한 정보를 부분적으로 예언한 것이라 퍼즐처럼 짜맞춰야지 전체 그림이 나옵니다.
왜 유대인들이 이사야선지서에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된 메시야의 속죄사역을 무시하고 이 땅의 왕국만을 열망했을까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원하는 대로 믿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는 아예 관심조차 갖기 싫었던 것이죠.
삶이 지지리 고난인데 구세주 까지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삶이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받는 어린 양으로 오신 것은 우리의 죄악과 저주를 담당하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치유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죠.
주님이 연약해지심은 우리의 강함을 위해서이고 주님이 가난해 지신 것은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서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제대로 갖춰서 알지 못하면 유대인들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오늘 메시야의 출신에 대해서 이사야는 굳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왕손으로 화려한 이력을 가진 메시야를 상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시골사람이었던 할아버지 이새의 자손임을 상기시키는 것은 어제 밤 설교에서 들은대로 인간의 질고를 진 미천한 신분으로 오실 메시야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성육신의 겸손을 좋아하고 그 길을 따를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높여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지리라.
2절에 보면 그리스도 위에 하나님의 영이 강림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신적인 성품과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신데 왜 성령의 그 위에 강림하셔야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을 때 신성이 그대로 있으셨지만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성정만으로 사셨습니다.
신성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속죄자의 자격을 일찌감치 박탈시키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탄에게 받으셨던 세가지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실패한 아담을 대신해서 오신 제2의 아담이시기에 인성만으로 속죄를 완성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속죄는 천사도 할 수 없고, 모두가 죄인인 어떤 인간도 할 수 없고, 오직 죄가 전혀 없으신 사람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진리이므로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성으로는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사람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기적은 다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다른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영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마치 인간의 힘으로 한 것처럼 미혹하는 사상에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이 하신 일인지 아닌지부터 분별해야 하지만요.
예수님께서 메시야 사역을 하실 때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이시기 위해 많은 기적을 보이셨지 않습니까?
병자들을 고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일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적 능력으로는 그 모든 것을 충분히 하고도 남으실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고 아버지께서 하셨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뭐가 다른지 아시겠죠?
오늘 2절을 보면 메시야의 탁월하신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능력까지 다 성령께로부터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충만을 받고 행하시는 모든 기적과 능력이 바로 이사야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예언이 이뤄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할 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역하는 그 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래도 이뤄진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한 것이죠.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눈에 보이도록 예수님께 충만히 임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 존재를 증명해야 하실 때는 어떤 형태로든 보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비둘기같은 형체로 임하셔서 성령이 임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게 하신 것이죠.
왜냐하면 이사야선지자의 예언의 여러 곳에서 메시야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실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이뤄진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던 때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 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것도 역시 성령충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신다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면 성령충만을 분명히 받습니다.
어제도 말씀을 나눴지만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극심한 인간사의 질고를 짊어 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항상 고통 속에 살고 번민하고 우울하게 사셨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무거운 삶을 살면서도 성경에 보면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와 완전한 교감 속에 사역하셨을 뿐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힘을 통해 그 중대한 십자가의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시며 성령으로 능력을 입힐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의지하셨다면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구하고 충만을 받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성령이 강림하신 메시야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셨다고 합니다.
성령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셨듯이 우리도 성령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즐거워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겨우 겨우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만족하게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신나고 즐겁지 않으면 본인도 괴롭고 그걸 받으시는 하나님도 난처하실 수밖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말처럼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시는 하나님 경외는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고 우리의 뜻은 같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없는 것이죠.
성령충만해 있는 상태가 아니면 안됩니다.
다음 4절을 보면 메시야가 세상을 심판하고 판단할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속죄의 사역을 이루실 뿐 아니라 공의와 정직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치우치게 판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우리는 기분 맞춰주려고 아닌 것도 기라고 하고, 선심쓰는 칭찬도 하죠.
하나님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십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가 불의하고 거짓말을 지어내면 주님의 기준에 바로 적발됩니다.
주님의 공의롭고 성실하신 판단과 심판을 생각할 때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위선과 거짓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고, 반면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을 때 예수님이 모든 것을 바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알기에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법 재판을 통해 십자가형을 언도받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판단을 아시기에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라고 기도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생활의 정황 속에서 그 핵심에 하나님의 판단과 인정을 인식해야 합니다.
너무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에 목맬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 온전한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영원히 우리를 판단하시고 상과 벌을 주실 분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신경쓰지 않고 사람들의 판단에 놀아나는 것은 참 헛된 일입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내가 바른지 살피고 예수님의 뜻대로 참고 행하며 마지막날에 받을 칭찬과 인정만을 생각하는 진실된 사람들이 다 되길 소망합니다.
4절에 보면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교훈과 책망과 훈계의 말씀 그대로 장차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중에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심판하실까 두려워할 필요도 궁금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 행하고 있으면 이미 상을 받는 삶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미 우리 삶이 주님의 징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종말에 예수님 앞에서 그대로 판단 받을 점수입니다.
5절에도 보면 메시야는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허리띠에 공의, 성실 그렇게 써있다는 거예요.
공의롭고 성실하신 예수님 앞에 불의함과 불성실함을 숨긴채 뭔가 얻어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 것이라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6절부터 9절까지는 메시야가 다스리실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살고, 독사 굴에 어린 아이가 손을 넣고 장난치는 이런 나라가 메시야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유대인들이 꿈꿨던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세울 왕국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5절부터 8절까지의 평화로운 메시야의 나라의 모습은 종말적으로 이뤄질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완전한 나라를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르고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으시죠?
아닌가요?
천국이 그렇게 멀리, 그렇게 막연하게 여겨지면 안됩니다.
지금 이 땅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마치 사복음서 안에 제자들이 주님을 바짝 쫒아다니던 그 모습처럼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면 점점 미래의 천국과 현재의 내 삶과의 거리감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상극끼리도 평화가 있는 메시야의 왕국은 이 땅에서도 그런 화해와 평화가 점점 이뤄져야 옳습니다.
갈수록 적이 많이 생기고, 미운 사람이 늘어나고, 다툼이 많아지는 생활이 되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의 영이 충만히 우리를 주장하시게 되면 그렇게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벽이 없이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성탄절 아침,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예언 된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꼭 적용할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좀 손해보고 져주고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판단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성령충만을 받으셔서 그 모든 험난한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하셨듯이 우리에게 있는 모든 어려움과 문제들을 가쁜하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처럼 화평을 좇는 모두가 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2015년 성탄절 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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