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49장14절-21절)

남수연 2016. 2. 11. 01:09

설 명절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날을 지키기며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큰 복이 임하시리라 믿습니다.

부모님과 명절을 보내기 위해 귀향한 성도들께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함께 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버선 속 뒤집어 보이듯이 속 시원하게 내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고도 특이한 사랑의 인격자이십니다.

사람이 만들어 내고, 스스로 찾아낸 종교의 신중에는 어떤 신도 사람을 사랑하는 신은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참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신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창조했으나 자신을 반역하는 인간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하나님은 온 천하에서 유일하게사랑을 아시고 사랑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실감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부모의 사랑을 비유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확신이 부족하셨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잘 깨닫고 든든한 그 사랑을 의지해서 두려움 없이 힘찬 삶을 살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 이전엔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인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등지고 죄와 세상을 따랐다가 나라를 잃어버리고 먼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입니다.

이들의 상황은 죄를 지은 모든 인간의 형편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종으로 끌려가 자기 원대로 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죄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행복을 원하나 불행하고, 늘 앞길이 막히는 좌절 속에 사는 게 왜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삶의 주인인 것 같지만 실은 자기를 지배하는 다른 것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지배하고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세상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뜻을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일반인들이 생애 전부를 그런 속박아래 사는 것이라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그 악의 세력을 벗어나 영구히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오늘 죄악의 포로가 된 것처럼 죄를 짓는 성도들의 경우도 일시적으로 죄의 영향아래 있게 됩니다.

가령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내 본성의 욕구대로 살면 그 순간 죄에 묶이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라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난 뒤, 그로 인해 자유를 잃고 억압되어 본 경험 없으십니까?

양심에 가책이 되고, 창피하고, 혹시라도 들통이 나서 수치를 당할까 내심 불안해 하며 완전히 거짓말에 속박 당하게 되는 겁니다.

내 맘대로 해서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그게 바로 죄의 종이 되는 거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금방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다행이지만 오랫동안 성령과 양심을 어기고 딱딱하게 굳어진 죄는 심각하게 인격과 환경을 망가뜨리고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먼저 우리가 심사숙고할 교훈은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막 살다가 다시 죄의 종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만들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선한 삶을 벗어난 순간 죄의 종이 되어 손발이 묶이고, 고통과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바벨론의 포로생활의 이유에 대해 하나님은 사실을 말씀합니다.

앞 장인 484절에 보면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그들의 이런 지독한 교만과 죄가 재앙을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청해서 들어간 고난의 풀무불 가운데서 그들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때로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는 이유는 우리의 완고함과 쇠 힘줄 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한 목과 뻔뻔한 이마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런 죄와 세상의 영광과 풍요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한다면 우리 둥지에 가시와 찔레가 나도록 하나님은 내버려 두십니다.

 

이렇게 죄의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처절하게 그것을 깨닫고 한탄합니다.

14,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이 말에는 과거에 대한 회한이 묻어 있습니다.

이제야 예루살렘 시절,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던 때가 얼마나 좋았던지를 비로서 알게 된 뼈저린 후회가 담겨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던 때가 좋았다는 것을 이제사 깨달았다는 것이죠.

이들이 축복의 땅에서 심판받을 가나안 풍속을 좇다 좋은 것들을 다 잃어 버렸듯이 신자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은근히 세상을 따른다면 어느 순간 주위를 돌아볼 때, 그 좋은 것들이 다 내 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리던 완전한 기쁨과 자유와 만족도 어느새 사라지고 눈물과 불안과 후회와 두려움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할 때가 가장 화창하고 빛나는 때입니다.

힘껏 은혜를 구하고, 은혜 안에서 살 때 만사가 형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것이 환경과 죄와 사탄에게 묶이지 않고 참 자유와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에 불편이 있고, 염려가 있고, 부자유하다면 그 배후엔 분명 죄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만 죄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적극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능력 있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아 있기에 불안하고 우울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과거 풍족하고 좋았던 시절을 죄다 엎어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완전히 잊어버리셨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구나, 내 좋은 날들은 다 지나갔구나.’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든 성도들이 고난과 힘든 시기를 겪을 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며 열심히 살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악을 쫒다 큰 봉변을 당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잘못해서 그 댓가를 치르고 있다할지라도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젖먹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강인한 게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그 어머니께서 목사님을 임신 중에, 각혈이 나와 병원에 가보니 암이 진행 중이었다고 합니다.

의사는 당연히 아이는 또 가져도 되니 아이를 포기하고 항암치료를 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버리고, 억지로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치료를 포기하고 아기를 선택한 것이죠.

그렇게 해서 목사님이 태어나고 20일 동안 젖을 물리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의 말로는 어머니가 눈을 못감고 죽으셨다고 합니다.

젖먹이를 떼어 놓고 떠나는 어머니가 어떻게 편히 눈을 감겠습니까?

요즘 사회적으로 자식들을 학대하고 죽게 방치하는 사건들로 인해 부모의 천륜적인 사랑도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목사님의 어머니처럼 자기를 죽이고 자식을 살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지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죄에 팔려가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우리에게는 결코 꺼지지 않는 한가닥 소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당하는 모든 형편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니 결코 낙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6절에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우리가 어렸을 때는 손바닥에 볼펜으로 전화번호 같은 것을 자주 적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아예 신체에 각인해 놓으셨기에 잊어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상처 안에 깊이 각인 된 하나님의 친자식입니다.

그렇기에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처지와 형편들은 하나님아버지의 눈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곤란한 처지와 쪼들리는 생활을 모르실 수가 없습니다.

한참 인기를 끌던 응답하라 1988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선우네 집에 가끔 외할머니가 오십니다.

암행어사 출두처럼 갑자기 고속터미널에 내리셨다는 외할머니의 전화를 받는 순간, 집안이 발칵 뒤집어 집니다.

궁색한 형편을 들키지 않으려고 선우엄마는 한바탕 쇼를 벌이는 것입니다.

비어있는 연탄광은 정환이네 연탄을 빌려 채워놓고, 빈 쌀통 앞에는 쌀푸대를 빌려다 세워놓습니다.

텅빈 냉장고까지 정환이네 냉장고를 털어다 채워놓고 꽃무늬 스카프까지 매고 나면 마침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할머니의 눈은 순식간에 연탄광으로, 쌀통으로, 냉장고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비로서 안도의 눈빛을 합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탁기 위에 두고 간 편지봉투엔 꼬깃한 만원짜리 몇 장과 옷이나 하나 사 입으라는 메모가 한 장 들어있습니다.

어머니의 눈에 벌써 마당에 걸쳐 놓은 나달나달한 옷들이 보였던 것이죠.

자식의 가난한 형편을 살피는 데 부모들의 눈은 고성능 레이더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저희 집에 사실 때, 마지막 김장을 손수 담그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인정 할머니들이 김장 담그셨다고 하면, 계속 맛 좀 보자고 하셔서 김장김치가 한포기,두포기씩 올망졸망하게 계속 들어오는거예요.

어머니는 그 김치를 한 조각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게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마다 김장을 담가 주다가 그 해 못 담가 주니비어 있는 제 김치냉장고가 마음에 쓰이셨던 것입니다.

저야 조금씩 사다먹으면 되는 건데, 김장김치가 그득해야 겨울철이 든든했던 어머니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죠.

자식에게 뭐가 필요하다 싶으면 부모 눈엔 그것만 들어옵니다.

지금 당장 뭐가 필요한지 알 뿐 아니라, 일주일 후에, 일 년 뒤에, 십 년 뒤에 뭐가 필요한지 자식들은 모르지만 부모들은 다 압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의 무너져 버린 성벽, 불에 타 그을려 사람이 살 수 없는 처량한 성벽이 항상 눈 앞에 있었습니다.

거기 평안히 살며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던 그 예루살렘에서, 맨발로 끌려 간 자식들의 한숨소리가 들리고, 남의 땅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는 내 자식의 눈물이 다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멀리 우주 너머에서 온 세상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단지 초월적이고 포괄적인 그런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보시고, 우리의 모든 환경과 형편을 지켜보시는 사랑입니다.

그 힘든 나날을 살아가며 스스로 낙담해 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서둘러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아라.

네 자녀들은 빨리 걸어서 돌아올 것이다. 너를 헐고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갈 것이다.

수많은 무리들이 네게 올 것이고 신부를 꾸미는 장식처럼 너를 두르게 될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할 것이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위기와 고난이 있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녀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약속의 땅을 벗어나 타국의 종살이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축복과 사랑을 믿고 굳게 견디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선지자만으로는 부족하셔서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치욕을 받고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망하지 않았다고 전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29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거기서 적응하며 견디며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번성하고 줄어들지 말고 돌아올 날을 기대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래서 이 말씀에 따라 다니엘 같은 청년이 나와 바벨론제국의 총리도 되고, 에스더 같은 딸이 나와 페르시아의 여왕이 되어 파멸당할 동족을 돌보고 번성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강한 의지로 따를 때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우리의 환경과 역사에 개입하셔서 고난 중에도 강성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마음을 다잡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육간에 강건히 행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힘써 우리의 가정과 직장을 견고히 하고, 힘이 닿는대로 열심히 일하며,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이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고대하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의기소침해서 처지를 한탄하는 것은 분명히 고의적인 불신입니다.

이미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반드시 칠십년이 차면 돌이켜 복을 주실 것을 예고하셨음에도 그들의 의도적으로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스스로처량하게 생각하며 믿음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심란한 사건들에 둘러쌓여 있다 해도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스스로 굳세게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너희를 잊지 않는다, 너를 축복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진심에 대한 진실 된 우리 믿음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후일에 우리의 자녀들이 많아져서 황폐했던 곳을 가득 채우며 말하기를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살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가슴이 설레는 말씀입니까?

저도 성도들이 가득차서 이곳이 좁아질 때를 기대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은 점점 더 확장되고 풍성해 지는 복인 줄 믿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엄마, 우리 이제 형편이 나아졌으니 좀 넓고 좋은 집으로 이사 가도 되지 않을까?’이런 날이 올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무실 좀 더 늘려야 되지 않을까요?’ 이런 날도 올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갑자기 이 모든 축복이 어디서 왔는지에 어리둥절해 질 거라고 합니다.

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분명히 내게는 남아있는 게 없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다 어디서 생겼지 의아해 하며 행복해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미 성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그렇고 우리가 그렇듯이 이런 확실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의로운 종이 바로 그 일을 행할 것이라는 것이죠.

메시야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이 아름다운 일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이사야선지자는 계속해서 예고하고, 또 예고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완전한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 진 자녀들이기에 우리의 구원과 축복은 흔들리지 않고 점점 더 창대하게 뻗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과 능력과 여건들이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내도록 인도하십니다.

왜 그렇게 이 땅에서 우리를 축복하십니까?

사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 땅의 영화와 번영은 영생에 비할 때, 그리 대단한 가치가 아닙니다.

이 땅의 축복은 우리를 통해 구원받을 많은 사람들을 보태주시기 위해서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형통한 복을 통해 사명을 감당하게 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손바닥에 새기고,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 잃어버린 주의 백성을 더 보태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더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의도를 잘 깨닫고 믿음을 따라 행함으로 모두가 번창하며, 거처가 넓어지고 지경이 확장되는 축복이 성도님들 가정과 우리교회에 점점 더 이뤄지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6년2월7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