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이사야51장 설교(하나님의 위로)

남수연 2016. 10. 25. 13:50

이사야5112-16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나요?

모든 게 감사하고 만족하게 지낸 분도 계시겠고 힘든 시간을 보내며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셨던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작가는 이 시대를 말하길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라고 하더군요.

관심을 빙자해서 친절하게 주고받은 상처에 속상하지는 않으셨는지요.

또 요즘 뉴스보기가 얼마나 겁이 납니까?

세상도 무섭고 비관적인 사회전망을 들으면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집니다.

삼성휴대폰 사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등기업조차 한 순간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에 우리가 사실 큰 충격을 받았고 우리 마음에 한 상처가 되고 있습니다.

뭔가 우리사회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불안감이 감지되는 것이죠.

2008년 이후 처음으로 공장 가동률이 70% 밖에 되지 않는 현재 우리사회는 이미 저성장에 들어섰다고도 합니다.

이런 소식들에 압박을 느끼며 우리의 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국민들은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자기의 목숨을 쥐고 있는 학대자의 분노에 마음을 졸이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문제에 억눌린 채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도 지난 주 마음이 좀 무거운 일이 있었는데 쉽게 털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좀 위로를 받고 싶었거든요.

저번엔 장미꽃이 활짝 웃어주더니 이번엔 아니더군요.

하나님은 리바이벌은 잘 안하신다는 것을 제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모두의 심령에 힘을 주시고 길을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음이 낙담한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되죠.

12,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우리를 위로하시겠다는 진실한 마음과 의지가 이 짧은 구절 안에서도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죠?

너를 위로할 자는 나, 오직 나 외에는 없는데 어찌하여 두려워만 하고 하나님께 나오지 않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이 당시 포로라는 기막힌 처지를 당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위로의 하나님 이전에 이들이 만난 것은 심판하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당하는 불같은 시련은 다름 아닌 이들의 행한 죄에 대해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로 쫄딱 망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왜 내게 와서 위로를 받지 않냐며 나무라고 계시는 셈이죠.

매를 때리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겁먹은 백성들에게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라고 하시는 것이잖아요?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멸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무참히 파괴 된 사실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 큰 혼란을 겪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하기에 이해가 너무 잘 되지 않습니까?

구하라고 해서 말씀을 믿고 계속 기도하지만 일이 되지 않을 때 우리도 기만당한 것 같은 생각이 슬쩍 들거든요.

우리가 본래 하나님께 그렇게 호의적인 존재들이 아닙니다.

욱하면 하나님께 대한 본성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리한 것을 구한 것도 아닌 데 왜 이 정도의 소원을 안들어 주시는 지 내심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이럴 때 마음이 힘들고 하나님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우리 성도들이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비호하고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런 오해가 신앙적인 갈등을 불러오는 화근이 됩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세상이 받을 심판이 어떠하겠냐고 하십니다.

요즘 정치권이 대통령의 비선실세 문제로 뜨겁잖습니까?

불의한 인간은 권력이 있으면 자기가 애착하는 사람들을 비호하고 특권을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비호받으려는 게 아니라 의롭게 살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살 수 없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본성을 제어하고 하나님과 의를 따르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의로운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전혀 친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으셔도 우리는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과 똑같이 추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대로 주는 게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맡으셨다면 탐욕과 이기심에 이끌려 그걸 받아내려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걸 뜯어 고치십니다.

나의 행복만큼 남의 행복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고 복되다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따르도록 아주 치밀한 커리큘럼으로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다 부요하고 행복한 가운데 영적으로 바르게 성숙할만한 그런 위인들이 못됩니다.

그 과정 중에 지금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있는 것이고, 지난 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일들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저도 마음이 불편한 일들로 인해 깨닫게 된 게 많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더 깊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 정옥금집사님이 잘 회복하시다 갑자기 몸의 감각이 마비되서 얼마나 놀랐나 모릅니다.

재활하는 과정도 힘드신데 약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마음이 힘드셨겠어요?

하나님이 정옥금집사님을 많이 사랑하시고 더 깊이 성숙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막대기와 인생채찍을 드시는 것은 훈육하기 위해서지 죽이기 위한 게 아닙니다.

아무리 자식이 못 됐어도 자기 힘을 다 쏟아서 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갑자기 암선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한계를 느낄 아무런 일도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만과 영적 무지는 시련이 없이 절대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삶이 평생 아늑한 무풍지대라면 영적 수면에 빠지고, 육적 방종에 빠집니다.

제가 자주 만나는 집사님이 계신데, 남편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거의 안티기독교인 수준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집사님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이 남편분이 병원 직원으로 근무하는데 육십 평생 단 하루도 병상에 누운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주 복통으로 근무하는 병원에 응급실로 실려 가셨습니다.

맹장이려나 했는데 뜻밖에도 심장 혈관이 부풀어 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터졌다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는데 긴급 수술을 받고 다행히 지금 회복 중에 있습니다.

집사님이 하시는 말이 그래도 하나님이 남편을 사랑하시나 봐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응급상황을 모면하게 하시고 수술이 잘되게 하셨으니 겁만 좀 주신 것 같다는 거예요.

이런 마음이 무엇인지 겪어 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완강하게 하나님과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정말 그 마음이 철옹성과 같다는 것을 느낍니다.

고난과 시련에 그 마음이 좀 깨지고, 틈이 생기지 않으면 그 마음엔 하나님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성도들이라 해도 그런 완강함이 본성 속에 남아 있기에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시고, 우리의 잘못된 동기가 드러나게 하시고 그것을 교정해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단 우리의 시련과 연단 중에서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원칙을 분명히 알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진노 중에는 반드시 긍휼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학대자의 분노에 짓눌려 종일 두려워하는 걸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잠시 주관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부당하게 우리를 대우할 때가 많습니까?

그러나 스가랴1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내 백성에게)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하나님은 회초리를 들고 한 두 차례 때리려고 하셨는데 강대국들이 잔혹하게 백성들을 학대하고 살륙했다는 것이죠.

그들에게 심히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여전히 고난당하는 자식들을 향합니다.

때로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잘되고, 그들이 우리를 통제하고 우리는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는 여전히 궁핍하고, 빚에 쪼들리고, 병들고, 여러 힘든 문제들이 끊이지 않는 것 같을 때 낙담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주목하시고 복을 주시려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시때때로 힘겨운 일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할지라도 지나친 낙담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주려하심이었느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의 광야생활 사십년이 왜 필요했는지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의와 악독과 우상숭배와 음란을 좇다 패망한 이들에게 조차도 하나님은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너는 내 백성이라

그들을 때린 막대기는 부러뜨리실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처는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게 확실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된 이상 때려가면서라도 가르치십니다.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하신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해내신 기막힌 일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았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며 일하실 것이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 우리 가족들은 반드시 평안 가운데 인도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이 믿음을 강화하며 꿋꿋이 소망 중에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당장 우리 앞에 환경으로, 사람으로, 질병으로, 우리를 학대하려는 학대자의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는데요.

하나님은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 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어떤 상황에서든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을 때 환경과 사람과 문제가 항상, 종일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문제가 나를 삼킬 듯이 커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두렵고 문제가 나를 지나치게 압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무언의 증거입니다.

우리 신앙의 끝없는 시험은 하나님이 크시냐 세상이 크냐,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냐, 사람을 의지할 것이냐입니다.

우리 믿음이 굳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수록 두려움은 작아집니다.

물론 두려움은 때로 신중한 마음에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나뭇잎이 움직이는 소리에도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심약한 약체가 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항상 종일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죠.

두려움은 우리에게 본능적인 감정이고, 사실 두려워할 만한 실체가 있기에 우리 힘으로는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불안을 떨쳐내고 근심과 걱정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써 보십시오.

절대 쉽게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 크시고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바다를 휘저어 뒤흔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하나님이 내 모든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할 때 비로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왜 그렇게 믿음이 없이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모욕적인 태도로 상처를 주는 이웃이나 상사나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위축되고 주눅이 듭니다.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우리를 압박하는 문제와 환경이 너무 크다면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두려움을 없애주실지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보호와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항상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 삶이 괴로운 진짜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멸망하고 노예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사는 죄악과 고통과 비명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어제 뉴스에 보니 IS가 인간방패로 삼았던 인질 284명을 처형했다고 하더군요.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고통이 있는 것은 나와 타인들의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고통과 불행의 원인인 죄 문제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말끔히 씻어주시고 우리에게 의로운 백성의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비참하게 망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등을 돌려 본래 죄인의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2절에서 누가 복을 주셨는지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랐기에 복을 주고 그 후손들이 한 민족을 이루게 창성해졌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그들을 가나안땅에 심으시고 그 땅의 맹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땅의 멸망당한 부족들의 풍속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없는 자리, 복을 받을 수 없는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구약성경시대에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 그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신약성경시대에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 몸이 부서진 고통을 당하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 때 우리의 상태는 가장 복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은 신자들이 왜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세속을 살아가는 보편적인 세상 사람들이 대단히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작은 만족을 누리며 사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생계를 위해 지치게 일하고 퇴근길에 동료들과 소박한 안주에 술잔을 기울이며 고단함을 날려버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그런대로 좋아 보이기에 언제든지 신자들이 그들에게 돌아가기가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육신의 안일만을 위하고 자기 행복이 위협당하면 순식간에 돌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수세에 몰리면 가차 없이 남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고 타인의 행복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복된 뜻을 세상에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 밖에 없습니다.

세속의 삶에서는 결코 우리의 안전하고 풍요한 축복도, 하나님의 나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현재의 상황이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인지는 언제고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따르기를 돌이켜 다시 죄와 세상을 사랑한다면 오늘 가나안땅과 함께 모든 것을 잃은 이스라엘백성들의 한숨을 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오늘 주시는 교훈임을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록 압제자의 분노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리라.

어떤 고비가 왔다고 해도 그 일로 죽지 않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가지도 않습니다.

양식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은 앞을 보며 나갈 뿐 아니라 뒤를 돌아보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위기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 어제보다, 작년보다 더 큰 축복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야 말로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존귀한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장미꽃을 통해 위로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제게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존귀한 자인지, 얼마나 사랑을 받고 위로 받는 자인지를 스스로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설령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 억울하고 마음에 큰 상처가 된다 해도 우리의 영광스런 정체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학대자의 분노 앞에서 내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그 분노가 나를 삼킬 것 같을수록 오히려 나 자신을 더 귀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항상 내 기분이 좌우되고, 내 감정이 끌려 다니지 않도록 내가 스스로 믿음으로 나를 지켜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가십시오.

나를 위해 때로 좋은 음식을 먹고, 가끔 새 옷도 사 입고, 좋은 기분을 스스로 유지하며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행복하게 누릴 작은 기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하지만 남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당당하게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항상 정의와 인자를 따라 사람을 대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먼저 책망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면 그 누구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상속자들이고 영원히 위로받을 자들이고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들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압박하고 학대하지 못하도록 자존감을 갖고 나를 행복하고 당당하게 연단해 가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6년10월23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