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예수님의 성탄을 기뻐하며 감사하기 위해 모인 모든 분들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성탄과 함께 한 해도 저물어 가고 있네요.
올해는 국가적으로도 너무나 큰 사건들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과 새정부 탄생, 사드와 북핵문제, 매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적폐청산, 거기다 포항지진으로 처음으로 연기 된 수능시험도 있었죠.
이런 사건들 속에 한 해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 것 같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국민들을 위한 정책들을 손보고 있지만 아직 피부에 와 닿을 정도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내년에 국민소득 3만불을 전망한다지만 당장 내 지갑이 두꺼워 질거란 기대는 되지 않죠.
어쨌든 국가 경제가 좀 더 나아져서 가정 경제도 좀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에 못지않게 고대하는 것은 이 땅에 독버섯처럼 만연한 악이 사라지고 정의가 바로 세워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뉴스 보기가 겁날 정도로 인간성이 무섭게 파괴 된 범죄들은 가뜩이나 힘든 현실을 숨 막히게 합니다.
해마다 전국 교수들 천명의 설문조사로 선정되는 올해의 사자성어가 ‘파사현정’이라고 합니다.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뜯어 고쳐지기를 바라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게 만 보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백여년전 기록된 이사야서의 메시야예언을 통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해 구약성경은 어떻게 주님을 설명해 놓았는지를 보는 것도 성탄의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는 방법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종은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실 예수님을 가리켜 예언한 것입니다.
읽어보면 이 예언에 정확하게 일치되는 사람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를 거기다 대입해도 맞지 않습니다.
1. 그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정의를 베풀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부분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평화는 파사현정처럼 악을 부수고 바로 잡는 정의가 세워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정의를 세움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안에만 해도 ‘정의’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이 말씀은 먼저, 세상에는 정의가 없다는 말로 들리시죠?
세상 어디에 올바른 정의가 도도히 시행되는 곳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다 크던 작던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불법과 불의로 탐욕을 채우며 오히려 정의를 비웃지 않습니까?
조금만 정의를 세우려하면 얼마나 거센 반대와 저항에 부딪칩니까?
그러나 각자의 불의로 인해 피차 고통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죄악 세상의 딜레마입니다.
그렇기에 불의한 사람들도 막연하게 정의가 세워지길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서운 화마와 유독성 연기 속에서 사다리차로 시민들을 구한 의인에 대한 기사에 마음이 뭉클해지고 코 끝이 찡해지는 것이겠죠.
그렇다고 정의가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의 뿌리는 그렇게 간단히 뽑힐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뿌리는 깊고도 광범위하게 인간 세상을 파고 들어 파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세계소득불평등 보고서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죠.
현재 부의 구조는 상위10%가 전체 부의 5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위 50% 사람들이 가진 부는 다 합쳐봐야 전체의 10%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구의 절반이 겨우 10%를 갖고 나눠 먹으며 허덕이고 있다다는 것이죠.
정해진 생산량을 생각할 때 결국 상위10% 사람들이 나머지 90%를 쥐어 짠 것이 현재 소득 구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힘으로 수천억, 수조의 천문한 적인 돈을 모으겠습니까?
정상이 아닌 것이죠.
문제는 이 세계적인 소득불균형이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불평등, 불공정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실시한 원숭이 시험의 결과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두 칸으로 나눈 철장 안에 두 마리의 원숭이를 넣고 실시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원숭이가 철장 안에 있는 자갈을 집어서 밖에 있는 연구원에게 건네주면 상으로 음식물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쪽 원숭이에게는 과제를 수행한 뒤 오이조각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원숭이는 이 거래에 만족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원숭이가 과제를 수행하고 난 뒤 연구원이 포도알을 상으로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엔 오이에 만족하고 계속 자갈을 집어 주던 원숭이가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자기에게도 포도를 달라고 철장을 흔들며 항의를 합니다.
그래도 불공평한 보상을 계속하자 분노에 찬 원숭이는 받은 오이를 연구원의 얼굴에 냅다 집어 던졌습니다.
똑같은 일을 했는데 불공평한 대우를 받을 때 분노가 폭발한다는 것이죠.
소득의 불균형 문제가 결국 인류의 큰 재앙을 일으킬거라는 것입니다.
경제문제 뿐 아니라 권력남용과 갑질문화, 청탁비리 등, 정말 어디서도 정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절망적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멸망하도록 넘겨주실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사람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붙잡혀 온 사람들은 다 억울하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각자가 다른 정의를 가졌기에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모든 것이 바로잡힐 정의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정의 뿐입니다.
우리는 정의하면 사람사이에서, 사회적인 정의만을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정의는 사람 사이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요구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관계도 당연히 바로 잡혀야 하는 것이죠.
더 정확한 것은 하나님과의 정의가 먼저 세워진 곳에 비로서 사람 사이의 정의가 세워집니다.
그 일을 해 내기 위해 이 예언으로 부터 7백년 뒤, 베들레헴 마굿간에 정의를 실현하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 불의한 인간들을 위해 정의를 세우셨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와 불의에 대한 심판을 자신의 몸으로 속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의를 덧입은 인간의 정의가 세워진 것입니다.
또 죄악을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의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정의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실제로 예수님의 복음과 교훈은 세상을 정의롭게 바꿔 놓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평등이란 개념은 사람에게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민족과 국가가 다 계급화, 서열화 되고 약자는 강자에게 억압받는 게 세상구조였습니다.
힘만 있으면 약탈하고 노예 삼은 게 인간 역사입니다.
서구의 민주주의부터 약자의 인권문제, 노예제도, 남녀평등과 공평한 교육의 기회 같은 정의가 다 기독교사상 안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역사가 증거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과 교훈만이 진정한 정의를 세우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건전하게 세상을 보전한다는 것입니다.
불의가 바로잡히고, 공평하게 잘 살고, 많은 사람이 행복한 나라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물론 개인들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다 증인이잖아요?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맞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시 예수님의 정의와 예수님의 법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현재 모두가 힘겹게 노력하는 사회정의가 세워지고 우리 개인의 삶도 정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의로운 법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해 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법은 그렇게 심오하고 모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핑계거리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그냥 내가 남에게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장이 주일에 쉬고 싶으면 직원도 쉬게 하라는 것이죠.
내가 욕먹기 싫으면 다른 사람을 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의 CEO든, 직원이든, 부모든, 자녀든, 이웃관계에서든 이렇게 상대를 대하는 것이 주님의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는 이 밤에 그렇게 살지 못한 우리를 반성하고 다시 그 교훈을 새기고 행하기로 결심한다면 성탄의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감사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
2.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이 정의를 세상에 가르치셨을까요?
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우리는 정의를 행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목소리를 크게 하고 강력한 행동을 통해 그것을 관철시키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식은 세상에서 정의를 세우겠다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세상의 군주들, 권력자들이 다 자기정의로 사람을 지배하겠다는 것이잖아요?
방법도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번에 홍대표가 아베총리를 대면하고 온 사진 보셨을겁니다.
자기는 꽃무늬 의자에 앉고 홍대표는 민무늬 핑크 의자에 앉게 했잖아요?
상대에 따라 자신과 똑같은 꽃무늬 의자를 내놓을지 민무늬 의자를 내놓을지, 또 의자의 높이까지 계산해서 의자외교를 한다죠.
문대통령 방문 이후에 중국은 또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서로 상대를 길들이고 쥐락펴락해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어떻게 정치하시는지 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머리 쓰지 않으십니다.
구약성경 수 천년의 역사의 핵심이었던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곳은 왕궁이 아니라 베들레헴 시골의 마굿간, 가축의 여물통입니다.
초라한 이불에 싸인 채 잠든 아기가 세상을 구하러 왔다니 유대인들이 비웃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나타나셨을 때도 그렇잖아요?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은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나타나셨습니다.
나귀가 너무 작아서 발이 간간이 땅에 끌리셨을지도 모릅니다.
환영하러 모여든 군중의 열광에 비해서 너무나 우수꽝스럽고 초라한 등장 아닌가요?
제자들도 좀 창피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의 강압적인 힘과 쎈 목소리로 정의를 세우신게 아닙니다.
주님의 방법은 사랑과 겸손이었습니다.
큰 목소리로 사람을 복종시킬 수는 있지만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힘으로 복종시킬 목적이셨다면 천지를 진동시켜서인들 못하셨겠습니까?
사랑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정의를 이뤄가고 계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정의를 시행하리니
예수님이 구원할 사람들은 이렇게 상한 갈대와 같이 구부러지고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어떤 종류이든 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환경에 좌절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자신의 한계에 절망하고, 누구에게도 다 말할 수 없는 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얼마 전 스스로 세상을 등진 한 아이돌가수의 충격적인 죽음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서의 내용을 보니 참 안타까웠습니다.
서서이 자신을 갉아먹는 우울과 싸우며 상할 데로 상한 마음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더군요.
우리에게도 아물지 않은 상처, 아직도 어느 순간 화끈한 통증이 느껴지는 그 상한 마음들이 한 구석에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어루만지십니다.
부모는 자식이 병들고 더러워졌다고 내다 버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때로 우리 믿음의 불꽃은 때로 꺼져가는 등불 같습니다.
기름이 다 떨어져가고 심지는 주저 앉아 시커먼 그을음에 매운 연기는 뿜어대지만 정작 불빛은 희미한 등불 같습니다.
성령의 기름은 메마르고 믿음의 밝은 빛은 스러져가고 스스로 내뿜는 고통의 연기에 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심지를 돋우시고 다시 타오르도록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닥에서 짓밟히지 않고, 불꽃이 다 사그러들지 않고, 이렇게 주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의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로 이루신 하나님의 공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내 자신과 우리 가정과 세상 속에서 정의를 세워가야 합니다.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 갈대처럼 연약합니다.
게다가 때로 거센 비바람에 상하고 볼품없이 꺾입니다.
올해도 그렇게 시달리며 힘겹게 달리다 지칠대로 지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 힘들다. 너무 힘들다, 이젠 정말 지친다. 더 이상 못할 것 같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상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주신다고 예언 된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아를 위로하고 격려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수고했어. 잘 해냈어, 주님이 끝까지 도우실거야.’
시편기자도 낙담한 마음을 스스로가 위로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잖아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우리도 이렇게 수고하다 낙담한 자신을 다독이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부러진 곳을 고치시고 우리의 등잔에 기름을 부으시고 다시 불꽃이 타오르게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자와 주님이 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의가 온 땅에, 평안과 위로와 축복이 성탄을 감사하는 모든 성도님들께 충만히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7년 주는나의산성교회 성탄감사의 밤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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