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그의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이사야9장6절)

남수연 2019. 1. 23. 23:06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는 예배에 함께 해주신 성도님들과 가족분들게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만큼 이 세상에 변혁을 가져 온 출생이 있을까요?

오늘 밤만 해도 지구 인구 삼분의 일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우리 각자에게도 얼마나 큰 축복과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오늘밤 구약성경에 예언 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잠시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신비한 것은 오래 전부터 태어날 것이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도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팔백년 전에 이스라엘 선지자였던 이사야가 했던 예언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예지해서 말하는 걸 예언이라고 하죠.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예언대로 이뤄졌나 아니냐를 보면 증명이 됩니다.

구원자가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한 모든 예언은 예수님의 생애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아기에게 붙는 수식어가 거창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정말 대단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예언이죠?

이 선지자가 예언한 이 아기는 누구일까요?

그의 어깨에 정사를 매었다고 한 걸 보면 아기는 왕이 될 아기입니다.

정사는 정권, 통치 그런 뜻입니다.

대단한 통치자가 될 아기라는 것이죠.

지구 역사 속에 존재했던 위대한 왕들을 한번 여기에 대입시켜 보시겠습니까?

징기스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세종대왕, 링컨, 그 누구를 대입해도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실한 사람이라면 자기는 그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방출신의 한 젊은 목수였던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예언들이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824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구약성경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메시야에 대한 수많은 예언들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것임을 믿는 우리 모두는 복 있는 성도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아기의 이름이 다섯가지로 불리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름이란 것은 단순히 남과 구별하기 위해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식이 장차 어떤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고 신중하게 짓습니다.

저희 부부도 서원이 이름을 지을 때 그랬습니다.

서원이는 잠언 31장에 서원하고 낳은 아들아라는 구절에서 감동을 받고 지은 이름입니다.

아들인줄 알고 장차 하나님을 위해 일하게 되길 소망하며 서원하는 마음으로 지었는데, 딸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름은 예수님이 이만큼 굉장한 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이신데 당연히 굉장하고 위대하시죠.

성경은 의외로 하나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할수록 우리에겐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에스겔서 같은 데서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성경 중 가장 이해하기 난해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잖아요?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러니까 땅의 일을 가지고 하늘의 일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설명하려 한다면 아버지가 세 살짜리 아들에게 자기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이 난감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빠는 우리나라 서열1위인 아이티기업의 CEO

이걸 아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들을까요?아버지는 그냥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사랑해주면 되는 것이죠.

오늘 예언자 이사야가 알려 줄 이 특별한 아기의 이름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해주실 것이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면 뭐하겠어요?

내게 무엇을 해주시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가지신 이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로 불립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각각 두 이름으로 해석되어 있지만 원문 성경대로 하면 기묘한 모사라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기묘한 모사하면 느낌이 잘 오지 않죠?

성경은 이스라엘의 언어를 번역한 것이기에 우리 정서에 완전하게 일치되는 단어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라고 하는 말을 영어로 정확히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은 것이죠.

기묘한 모사는 영어성경에서는 원더풀 카운셀러 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탁월하고 놀라운 상담자, 중재자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놀라운 중재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중재자는 제삼자로서 당사자 사이에서 분쟁의 해결을 조정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둘 사이가 너무 나쁘면 누군가가 중재자가 돼서 화해를 유도하잖아요?

요즘 카카오 카풀 문제로 택시기사분들이 파업도 하고 시위도 하는 데 누군가가 이 문제를 중재하고 조정해야 갈등이 해소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는 조정하기 어렵게 틀어져 버렸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얘기를 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친한 사람들한테 얘기하면 예의상 그게 잘 안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불의한 것, 악한 것, 죄 문제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부 알려주신 하나님의 속성 속에는 공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악에 대해서 창조주께서는 반드시 시비를 가려 처벌을 내리십니다.

그래야 공의로운 통치자이시죠.

그러니까 매일 죄를 짓고 나쁜 생각으로 살며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간과 하나님과는 관계가 좋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중재하러 오신 원더풀한 중재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왜 기묘하고, 왜 원더풀일까요?예수님이 탁월한 중재자인 이유는 그 중재하시는 방식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중재자라면 그 일을 위해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희생하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개입하고 안되면 빠지는 것이죠.

우리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완전히 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사랑의 중재자이시니 기묘한 모사, 원더풀 카운셀러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는 영원한 중보자이십니다.

오늘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중재로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 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다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아기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열 달 동안 자라나서 자연분만으로 태어 나셨습니다.

신이 잠시 사람 몸을 빌려서 내려오신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사람의 유전인자를 택해서 완전한 사람의 형상으로 존재방식을 바꿔 버리신 것입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몸이지만 승천하셔서 우리 같은 사람의 몸을 가진 채로 천국에 계시잖아요?오늘 밤이 말해주듯이 인간 역사의 한 시점에서 저기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인간이냐, 아니면 신이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 신이시며 완전한 사람으로 믿습니다.

올해 중국에선 크리스마스 금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중국 상점들은 일체 크리스마스 트리나 장식등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신론이 바탕인 공산주의사상에서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기독교의 확산은 위험한 일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조국인 이스라엘 국민들은 이 아기를 누구라고 생각할까요?

당연히 위대한 정치 지도자, 왕이 될 왕자의 탄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가에서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이 아기가 그 아기인가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구원자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셨을 때 신성모독죄로 체포한 것이잖아요?

그들이 늘 배우고 외우던 구약성경, 오늘 같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조금만 더 깊이 연구해 보아도 이 아기가 완전한 인간이며 전능한 하나님이신 놀라운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었을 텐데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사람의 경험과 지식은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늘 이사야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에 성탄의 교훈을 되새기는 게 아니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 다음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영존하신다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의미보다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신이시기에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란 무엇입니까?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존재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끝까지 아버지고 자식을 지켜줍니다.

미국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한 젊은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미국의 육사는 신병 괴롭히는 일에 정말 상상을 초월하게 악명이 높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인 신병이 들어왔으니 그 앞날이 안 보아도 뻔한 것이죠.

입대하는 날 그의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부대입구까지 아들을 따라 왔습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부대 안이고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들이 뒤돌아 부대를 향해 걸음을 떼는 순간, 아버지가 아들의 팔을 덥석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들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와

이 분이 하는 말이 아버지가 했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끝까지 견디고 육사를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갈 집이 있고, 그곳엔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 돌아온 걸 이해하고, 따뜻하게 안아 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모든 고통을 이기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난 갈 데가 있으니까, 내가 갈 데가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니까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자신감이 지탱해 주더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한번만 우리를 사랑해서 이 땅에 오신 게 아닙니다.

한번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천년전과 똑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세상의 것들이 부족할 때도, 잠시 시련을 당할 때도 모든 상황 가운데 아버지처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심중에 담대함을 잃지 않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4) 이 아기는 평강의 왕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의 평강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말합니다.

인류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전쟁 본능 때문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뺏기도 하지만, 사람 속에 자기보다 약한 자를 짓밟고 남과 다투는 악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왕국에선 죽이고 뺏는 전쟁을 끊임없이 해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화의 조약을 맺는다고 평화가 오는 게 아닙니다.

분쟁하는 인간 본성에 평화가 와야만 사회가 평화로와지는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에만 전쟁이 있습니까?인간의 삶, 사람의 내면에도 항상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우리 안에 평강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시기심, 교만, 근심, 열등감, 정욕, 이런 것들이 늘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편해도 살만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 마음에 평화를 주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화는 우리 내면에 항상 있을 것이기에 어떤 외부 환경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 삶이 전쟁터와 같이 두렵고 위태함을 느낄 때에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이 평강이 모든 것을 이길 힘을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다면 지금도 전쟁터 같이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들만 해도 식구끼리도 서로 다투고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르며 지금보다 더 서로를 괴롭히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평강의 주님이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과 가정과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함께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삼십삼세에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서 삼십년 동안이나 보통 사람의 삶을 사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 긴 시간을 이 땅 자녀들의 고통과 괴로움과 고단한 생을 몸소 겪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때로 믿음에서 머뭇거리고, 때로 주저앉는지를 아십니다.

세상과,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참 지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사를 다 겪어보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해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더욱 우리의 특별한 중재자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평강이 되십니다.

오늘 함께 이 말씀을 듣고 이천년전 예수님의 탄생이 이렇게 나를 위한 것임을 감사하는 모든 분들 위에 예수님께서 평생에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