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평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이란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덜컥 들어온 걱정에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릴 때 내가 상한 갈대였고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사실을 다시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강하게 하시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 가지 근심에 일렁거린 마음을 오늘 말씀으로 다시 강하게 세워주시고 염려로 무기력해진 영혼을 다시 만져주셔서 힘있게 붙들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본문이 위치한 이사야서의 후반부는 끔찍한 포로생활에 절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멀쩡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종이 되고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면 어떻겠어요.
실제 이스라엘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때로는 질병에, 때로는 돈에, 때로는 일이나 힘든 관계에 속박되고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에서 나오게 하고 속박을 풀어주신다는 것이 이 역사가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억압 된 모든 것에서 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기에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간구하여 도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든지 속박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환경 속에 있다면 기도하며 힘써서 속히 벗어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풀어내어 집으로 돌려보내실 것을 거듭 약속하십니다.
앞 장에 보면 북방에서 한 사람을 일으켜 그 일을 행하시겠다고 합니다.
마치 애굽의 종살이 때 모세를 보내셔 구출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도 합니다.
성경과 세계사를 보면 포로를 풀어 준 이 사람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입니다.
바벨론제국을 점령한 뒤 거기 잡혀와 있는 이스라엘을 풀어 준 것이죠.
이 고레스왕은 이란인들에겐 건국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사람입니다.
세계사는 고레스왕이 다른 정복자들과 달리 점령국에 대해 관용정책을 썼고 꽤 훌륭한 왕으로 기록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존경했던 왕이기도 하죠.
고레스왕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는지는 미스테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서 6장28절입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다니엘이 고위 관료였잖아요?
고레스왕 시대까지 왕의 일을 보며 신앙적인 영향을 미쳤을 이라 추측할 수 있죠.
다니엘서 보면 다리오왕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죠.
이사야서 45장1절을 보면 이렇게 고레스왕에 대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존귀한 직함을 주었노라
다니엘이 만일 왕위에 오른 고레스왕에게 이백오십여년 전에 자기 이름이 예언 되어 있는 이 부분을 펼쳐서 보여 주었다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겠죠.
사실 역사를 보면 고레스가 왕 위에 오른 것은 기적입니다.
고레스는 왕자로 태어났지만 당시 왕이었던 외조부는 손자를 견제해서 죽이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아기를 차마 죽이지 못한 신하가 목동에게 데려다 주는 바람에 목숨을 건집니다.
이렇게 목동으로 성장한 고레스가 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된 것입니다.
고레스왕이 이사야서의 예언을 보았다면 그때 자기가 살아난 것과 왕이 된 것이 하나님 때문이란 사실을 깨닫고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결국 에스라서1장에 보면 이런 조서를 내리며 포로를 귀환시키죠.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이사야선지자의 예언대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계사에서 실제 이뤄진 것을 같이 알아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이 얼마나 굉장한 말씀인지를 알게 되죠.
성경의 진실성을 믿게 되고 경이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게 되고 성경이 살아있는 책이라는 걸 믿게 됩니다.
2.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다시 여호와의 종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소개하는 여호와의 종은 누구일까요?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얼핏 보면 이것도 고레스왕인가 생각하겠지만 뒤로 갈수록 고레스왕과는 다른 사람이란 걸 느끼게 되죠.
오늘 본문을 읽어 가면서 벌써 ‘아 이 여호와의 종은 바로 예수님이시구나’ 눈치를 채셨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미 시원하게 이 부분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임을 밝히죠.
마태복음12장 20절을 보실까요?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모습에서 바로 오늘 본문을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서로를 증언하죠.
그래서 성경에 짝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만 믿는 지금의 유대인들에게 이 종은 여전히 신비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고레스왕이다, 이사야선지자다, 우리 민족이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무리 이들을 예언에 꿰어 맞추려고 해도 맞지 않죠.
본문 말씀은 이 하나님의 종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고레스왕처럼 단지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게 하는 게 아닌 것을 알 수 있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사역을 본문에서는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에서 보면 정의를 베풀리라,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세 번이나 반복해서 정의를 세운다고 하시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 바로 세상에 정의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정의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정의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사람들도 세상이 정의롭지 못한 데 대해서는 분개합니다.
뉴스를 보고 나면 화가 치밀어 오르다 세상에 정의가 세워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느끼죠.
예수님이 오셔서 분명히 정의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왜 안되는 것이죠?
세상이 생각하는 정의와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정의는 다릅니다.
본문의 ‘정의’는 이전 성경처럼 ‘공의’라고 번역되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와 혼동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공의’는 왕이나 재판관의 권위로 선언한 선언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참되다고 선언하신 것,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이라는 뜻이죠.
사람들이 제각기 정하는 정의와 다릅니다.
전쟁을 하고 포로들을 잡아다 노예로 쓰는 게 정의인 시대가 있었잖아요?
요즘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바꾸는데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습니다.
사람의 정의라는 게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것저것을 참작하고 악을 단계적으로 나누고 악을 상대적으로 판단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사이에 영원하고 분명한 선을 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선인지 악인지 둘 중 하나로 심판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하나님의 공의는 그 의도가 선인지 악인지를 분명하게 가려내십니다.
시대가 악을 선이라고 하고 사회가 악을 용서하기로 합의를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소수자 문제,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것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거짓말처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죄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혼자 죽으면 자식들이 살 길이 막막하다며 동반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는 동정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살인’이라고 규정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과 아픔을 하나님이 냉정하게 무시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죠.
불의한 것을 옳다고 해 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세우신 가장 아름답고 선한 공의를 더럽힌 사람들을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 값없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끼리 정의를 그렇게 가릴 수도 없고 그걸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이죠.
어차피 종말엔 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으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로 세상에 공의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예수님이 나의 공의로움이 되신다는 것을 믿잖아요?
그런 우리 안에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새겨주신 것입니다.
오직 성도들을 통해서만 이 사회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여러 제도와 장치들이 거의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기독교의 사상 때문에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남녀평등이 이뤄지고, 사회의 갖가지 악이 제거된 것입니다.
신자들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공의와 공의가 기반이 된 성경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고의적으로 성경과 공의를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연약해서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공의가 있다 해도 우리 삶이 정의롭지 못하면 세상에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지원과 은혜를 매일 누릴 수도 없습니다.
불의한 곳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충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106편에서 말씀합니다.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버린다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내 인격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조금씩 세워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지도해 주시고 더 정의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시길 축원드립니다.
3. 또 여호와의 종이 어떤 사람인지 성품적 특징을 알려 주십니다.
이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 아니라는 것이죠.
1) 2절,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조용히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높이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계산적일 때, 선심 쓴다고 생각할 때, 일은 하지만 안팎에 잡음이 많죠.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점은 자화자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결국 자화자찬합니다.
하나님도 때때로 자랑하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때 이렇게 스스로 선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이렇게 스스로 말씀하는 게 좀 이상하게 들리나요?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시는 건 자화자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런 하나님이다, 너희는 지금부터 나를 믿고 따라와도 괜찮아’ 이런 뜻이죠.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무한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런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왜 이런 겸손과 사랑과 온유의 모습으로 사셨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그것이 하나님다우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그러시기에 다르게 사실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하나님다우심인 것이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쉼 없이 일하시고 자기 목숨을 주신 것은 어떤 빛나는 성과를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다우심 안에 아버지로서의 희생적인 사랑이 있으시기에 그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이 그렇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오남매를 키우시며 별의 별 일을 다 하셨습니다.
늘 부지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입에서 너희들 땜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한 일에 생색을 낸다면 부끄러운 일이죠.
우리도 다른 데는 좀 게으를지라도 자식 문제면 소리도 안 내고 몸이 먼저 움직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딱 그러십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종일 먼 길을 순회하시며 쉴 틈 없이 문제를 갖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상대해 주시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그렇게 섬세하고 자상하게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잠시라도 관심을 접어두시는 일은 절대로 없으십니다.
우리 서원이가 지난 주 매복 된 사랑니가 탈이 나서 발치를 했습니다.
옆으로 누워있는 사랑니라 한국에 있을 때 의사가 말썽나면 큰 수술이라고 했었거든요.
게다가 대학에서 들어 준 의료보험에 치과치료는 빠져 있었습니다.
미국 의료비 비싼 거 다 아시잖아요?
일단 방법을 생각하며 기도하자고 했죠.
그런데 서원이 다니는 교회에 치과병원 하는 의사가 있어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의사가 자기는 사랑니 전공은 아니지만 한번 진료해 보자고 해서 갔다가 거기서 발치를 하고 왔습니다.
어금니보다 1.5배가 크고 뿌리가 네 군데로 뻗쳐 신경을 건드릴 위험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작게 조각조각 짤라서 빼내는 데 세 시간 가까이 걸렸다고 합니다.
돈을 하나도 안 받고 공짜로 해 줬다네요.
하나님이 얼마나 빨리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신속히 인도하시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거기에 치과의사 성도를 예비해 주신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큰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으신다고 곁에 안 계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다우실 수밖에 없기에 자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시고 의지하는 자녀들을 도와주시지 않을 수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뵙게 될 때 놀라운 경외심을 느낄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다니엘서, 요한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영광이 엄청납니다.
그러나 두려울 정도의 큰 권능과 불꽃같이 꿰뚫는 지혜와 엄중함, 그런 것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부드럽고 한없이 착하시고 티 없이 성결하시고 불순물이 전혀 없으신 그 진실한 사랑으로 인해 경외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본 적 없는 그런 하나님다우심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2) 또 하나님의 종은 이렇게 일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이 말씀 안에는 우선 우리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에서는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보잘 것 없다, 연약하다, 쓸모가 없다, 절망적이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은 떠오르지 않죠.
예수님이 오셔서 돌보시고 구원하실 사람들이 이런 처지라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낡은 것을 다 밀어 없애고 그 위에 새 것을 세웁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 뜯어 고치지 않으시고 그냥 쓰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과거와 상처와 약점을 다 빼면 사실 지금의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본성은 달라졌지만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다 삭제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는 상한 갈대 같은 연약함이 끝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꺼져 가는 등불 같은 흔들림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다 보면 그 사람의 약점과 열등감과 오래 동안 곪아 있는 문제 때문에 참 힘듭니다.
그게 상한 갈대 같아서 어느 순간 푹 주저앉으면 일어날 줄을 모르죠.
근심이 일면 마음이 정신없이 흔들리며 그을음과 연기를 뿜어댑니다.
판단력을 잃어 앞을 못 보며 매운 연기로 다른 사람도 괴롭히죠.
그런 사람이 누가 떠오르십니까?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다 그런 상한 갈대가 있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천국을 향해 가시는데, 그걸 다 안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내가 한방에 다 뜯어 고쳐야지 그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상처와 아픔과 문제들은 성급하게 다루면 더 깊은 상채기를 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상한 돌보심을 알아갈수록 상처와 염려에서 벗어나지만 그게 짧은 시간에 되지 않잖아요?
평생 안고 산 문제인데 그리 쉽게 되겠습니까?
타고난 기질이 만들어 온 약점인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습니까?
우리를 설계해서 만드신 하나님이시니 그걸 잘 아시는 거죠.
우리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걸 우리 힘으로 뜯어 고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처럼 끊임없이 가르치고, 사랑하며, 때로 설득하고, 때로 엄히 꾸중하고, 맛있는 걸 먹여주고 다독이며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로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앞에 41장1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 것이라
무시무시하죠.
사람의 산이든, 내게 있는 역경의 산이든, 다 평탄케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으로 우리를 결국 바꾸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같이 모든 약점과 연약함을 끌어 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감싸 안을 수 있냐가 오히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진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공의를 이루신 방법이기에 우리에게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사야서는 고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을 통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것일까요?
그 일이 다 성취된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뜻이 다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이 험한 세상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그 사랑은 마침내 우리를 점점 성한 갈대가 되게 하시고, 타오르는 등불이 되어 세상을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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