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vn6yw3z9dM
<설교영상>
지난 주는 코로나19 재유행 우려에다 북한의 도발까지 겹쳐 좀 불안했던 한 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직접적인 두려운 문제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이 이런 불안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용기와 믿음을 더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이사야서와 본문 말씀의 배경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평생 성경을 배우며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서는 다른 성경에 비해 독특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성경 분량이 상당히 많습니다.
66장이나 되죠.
신구약성경 전체 66권과 일치되는 장수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죠.
가장 많이 인용 된 구약성경은 시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이사야서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시대부터 약속 된 메시야임을 확증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들이 많이 있다는 뜻이겠죠.
이사야서의 좀 독특한 구조도 알아 두는 게 좋습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이사야선지자 당대의 역사와 이사야선지자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족의 배교에 대한 경고와 심판, 그리고 주변국들을 심판하신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39장의 마지막은 히스기야왕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병에서 고침 받은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왕궁의 보물창고를 다 열어 자랑했을 때 이사야선지자가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을 후손들이 바벨론에 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40장부터 마지막장까지는 갑자기 시대가 바뀝니다.
약 이백년 정도 뒤 바벨론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내용입니다.
지금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좀 독특한 구조입니다.
그래서 일부 현대 신학자들은 이 뒷부분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 시대 살고 있는 포로들에게 전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정통적인 견해는 이사야서 전체를 이사야 선지자가 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66장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서에서 61장을 펼치셔서 설교를 하셨잖아요?
바울사도의 서신서에서도 이 뒷부분을 인용할 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성경 자체의 진술보다 더 믿을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 뒷부분에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53장 고난 받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바벨론 유수보다 더 먼 미래인 칠백년 뒤 예수님의 고난 받는 모습을 현장에서 눈으로 보는 듯이 묘사하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의 고난을 직접 보지 않고는 이렇게 표현할 수가 없지 않겠어요?
이사야 선지자가 칠백년 뒤에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시는 그 광경을 환상으로 보았을지도 모르죠.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도 예고합니다.
구원의 완성과 인간 역사를 총망라해서 다룬 예언서라고 볼 수 있죠.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뒷부분, 즉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대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눈에는 이백년 뒤 포로로 끌려 간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것이죠.
이것을 잘 숙지하고 본문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 먼저 이스라엘이 왜 바벨론 포로가 되었는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들은 지금 가나안 땅이 아닌 바벨론에 끌려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대신 무자비한 왕의 통치를 받으며 고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나안의 여러 잡신들을 섬기고 가나안의 악한 풍속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더 잘 살고 더 재미있게 살려고 그런 것이죠.
그랬으면 잘 살아야지 지금 비참하게 되어 두려워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들의 왕이 되셨을 때 부족한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셨다고 말씀하죠.
이사야5장4절입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최선을 다하셨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진실했던 적은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대해 과히 진실하지 못하죠.
이스라엘은 왜 가나안땅의 우상과 비교가 불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잡신을 받아들인 것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과 본성이 같은 우리도 분명 하나님을 믿는 데 공통점이 있을 것입니다.
1) 사람들은 위대하고 전능하신 신을 싫어합니다.
그런 신보다 조각한 신상을 집에다 모시고 먼지를 닦고 음식부스러기를 올려놓고 자기 마음대로 섬기는 걸 더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성이 있어서 뭔가에 빌고 섬기는 걸 싫어하지 않습니다.
단 도덕적인 신은 싫어합니다.
바르게 살라는 신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아이들이 부모 잔소리 듣기 싫어하잖아요?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성경을 통해 너무 간섭하시죠.
우상으로 만든 가나안 신은 말을 못하니 내가 어떻게 살든 간섭하지 않습니다.
언제고 필요할 때 가서 내 소원을 빌고 돌아오면 그만이잖아요?
만일 우리가 내 생각과 행위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지각하고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2) 또 가나안땅의 문화는 주변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 다 사는 방식이 같은데 이스라엘만 유별난 것입니다.
가나안 땅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구축한 문명과 문화 속에서 본성대로 거침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들 잘 살잖아요?
우상종교의 제사를 보니 사람들이 다 즐기는 문란한 축제였습니다.
그런 것 인간 본성이 좋아하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레위기 율법대로만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성소에서 쓰는 향도 제조 방법이 정해져 있습니다.
게다가 이 향 냄새가 좋다고 똑같이 제조해 쓰면 큰일 납니다.
다 쉽게 사는 데 우리만 힘들게 여호와신앙으로 사는 것 같았던 것이죠.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들 주일이면 편하게 쉬는 데 우리만 교회 나오잖아요?
신앙생활에서 지킬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은 점점 가나안의 우상종교와 풍속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고 넓은 길, 사망의 이르는 길입니다.
어디까지 이 세상 문화를 즐겨야 할지에 대해서 신자들은 고민해야 합니다.
세상 문명과 문화 안에는 거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드라마, 음악, 스포츠, 미술, 소비문화가 다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악기를 많이 만들어 예배 찬양에 사용했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실도 정확히 꼬집어 말씀합니다.
아모스 6장5절입니다.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다윗이 음악 재능이 많았잖아요?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 위안을 삼고 행복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것에서 최고의 위안과 기쁨을 삼는 것을 하나님은 경계하십니다.
그게 결국 이스라엘이 갔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TV에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것도 다 재능 있는 사람을 세워 놓고 즐기는 것입니다.
물론 역경을 이기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에겐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세상 음악은 인간의 희로애락의 정서를 극대화 시켜 감동을 전합니다.
거기엔 하나님과 영원한 가치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잠시 삶의 애환을 어루만져 위로와 감동을 주지만 해답은 없는 것이죠.
오히려 해답이신 하나님께 대한 지각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 시간과 관심을 제일 많이 뺏는 세속적 취미는 경계하고 수위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여가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신앙생활의 승패를 가르는 것입니다.
남과 있을 때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 내가 어떻게 하는지가 진짜 내 모습이듯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내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성령께서 좀 과하다 사인을 주시면 어떤 세속적 취미든 브레이크를 잡아야 합니다.
금욕적이다시피 절제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겨우 기도하고 성경 볼 시간을 좀 낼 수 있습니다.
제가 팬텀싱어 라는 경연 프로를 즐겨 보는데요.
알고 보니 지난 시즌1에서 싱가포르 한인교회 다닐 때 성가대를 같이 했던 장로님, 권사님 아들이 팬텀싱어가 되었더군요.
이번 시즌에서도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중에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존0 라는 성악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이고 목사였던 할아버지는 김일성 치하에서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존0 성악가도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려고 했는데 음악 재능을 발견해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존0 성악가가 The Prayer 란 곡을 부르는 걸 듣고 제가 팬이 되었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천진하고 평화로운 얼굴에 부드럽게 감싸는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그냥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문화를 선별하고 절제해서 즐길 뿐 아니라 문화를 세상과 사탄에게 내주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마도 존0 역시 그런 마음으로 경연에 참여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의 다양한 재능들은 세상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일에 귀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모되는 부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원하셨던 것은 그것이잖아요?
이방 나라들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길 원하셨지만 세상을 동경하다 세상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따른 결과를 오늘 본문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선택한 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험난한 노예생활이었습니다.
처음엔 즐거움을 주지만 나중엔 종처럼 지배하는 게 세상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다고 합니까?10절에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너를 굳세게 하겠다 하는 말씀은 지금 이들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고, 작은 일에도 놀라고, 말할 수 없이 심약하게 무너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 11절을 보면 분노하는 상전에게 수치와 욕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12절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에 시달리고 여기저기서 맞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을 따른 결과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할수록 얻는 게 이런 것들입니다.
세상과 마귀는 무자비한 상전입니다.
때로 하나님을 잠시 밀어내면 차라리 더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세속과 달콤한 죄를 즐길 때도 그렇고, 세상 고통이 너무 심할 때도 한편 그런 마음이 듭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약소국이었잖아요?
본래 남에게 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방패와 산성이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인데,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상대하고, 내 안의 죄를 상대하고, 나를 짓누르는 현실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편승해서 이기는 거예요.
성경 역사에서는 우리가 이런 걸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어떤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잖아요?
오늘 말씀에서 이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세상을 잘 절제하고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고 따라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그러나 포로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40장을 보면 이들은 구덩이에 던져져 하나님이 우리를 잊었다고 푸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오늘 9절에서 말씀하죠.
9절,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고 계신지를 통해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들을 실패의 이유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8절에 이렇게 그들을 부르십니다.
나의 종,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야곱이라는 이름은 그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말 그대로 약탈자, 남의 발뒤꿈치를 잡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자를 뜻합니다.
조상 야곱이 그랬고 그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든 하나님이 택하셔서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죠.
그 역시 갈대아의 우르지방에서 우상숭배 하던 사람입니다.
우리도 토속신앙 속에서 수많은 토종 귀신을 섬기며 자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믿음의 조상이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인격적으로 숱한 과오를 지나며 믿음의 사람으로 단련되었습니다.
이런 보잘 것 없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해 자기 백성을 삼으셨다는 것이죠.
처음부터 하자가 있는 걸 알고도 자녀를 삼으셨으니 새삼 실망스러운 행동을 한다고 해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미운 짓을 참아주시고 심지어 사랑하는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친아버지시기에 가능한 것이죠.
그렇기에 포로의 삶으로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바라보며 40장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매 맞고 아픈 자식을 싸매주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죠,
세상에서 깨지고 이리저리 상처 받고 두려워하는 우리를 위로하지 않으시면 우리 아버지가 아니신 것입니다.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처럼 병으로, 환경으로, 믿음의 연약함으로, 걱정과 염려로 짓누르는 모든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무균실에서 마지막 독한 항암치료를 받고 있을 우리 은혜자매를 그렇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11절,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짓누르던 바벨론은 하나님이 일으킨 종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 의해 멸망하게 되죠.
이스라엘은 꿈꾸는 것 같이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1절에 너와 다투는 자들에서 ‘다툰다’는 것은 법정에 소송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세상 법에서도 소송이 걸리면 그것 자체가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합니까?
긴 법정 다툼에 사람들이 피폐해지잖아요?
우리를 무고하게 고소하고 힘들게 하던 자들로부터 우리가 이기려면 법정에서 내 놓을 정당한 변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송사하던 마귀로부터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신 우리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를 변론하실 것이라는 궁극적인 구원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이사야서에서 점점 더 예수님의 대속을 분명하게 계시해 나가십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아왔기에, 너희가 돌이켜서 경건한 사람들이 되었기에 도와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성숙은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지죠.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을 하지만 잘 될 때보다 여전히 안될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예수님의 속죄의 보혈이 우리를 변호하실 것이기에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범죄하고 벌을 받는 이스라엘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 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라
하물며 주님을 따르려고 이렇게 안간힘을 쓰는 우리를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이 어둠의 시간을 끝까지 함께 해준다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손을 붙드시고 평생 그 손을 놓지 않으신다고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모든 것을 체휼하지 않은 분이 아니십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저하는 우리 믿음에 소망이 있는 이유입니다.
내가 아플 때 십자가에 못이 박혀 육체의 고통을 당해 보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아픔과 두려움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육체의 고통 앞에서 얼마나 낙담되고 두려워지는지 주님은 겪어 보셨잖아요?
인생의 모든 결핍을 당하셨고, 악에게 고통을 받으셨고, 사람들에게 아픔을 당해 보셨기에 그런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매일 이런 우리의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요청하며 기도하는 것이죠.
주님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오늘도 내 손을 붙들고 이 길을 함께 가시는 예수님과 마음으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어둠에 물드는 게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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