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3백회 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많은 분량이 이사야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이사야서에 들어있죠.
대림절엔 특히 예수님이 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되새겨 보며 믿음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막연할수록 신앙은 힘이 되지 못하고 공부에 밀리고, 세상일에 밀립니다.
오늘 말씀으로 믿음의 기초와 실력이 더 다져지리라 믿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가 어떤 자리로 옮겨졌는지를 알고 대림절에 큰 은혜를 깨닫게 되길 소망합니다.
1. 오늘 본문성경의 배경을 잠시 보겠습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예수님 탄생 7백여년 전에 살았던 남유다 선지자입니다.
네 명의 왕의 시대를 거쳐 활동한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죠.
모든 선지자들의 역할이 그렇듯이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죄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경고합니다.
결국 이들의 불순종으로 바벨론제국에 의해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본문 앞 부분을 보면 당시 부패한 사회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악이 만연하고 불법이 판을 치니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결국 고통과 피해는 본인들에게 돌아갑니다.
지금도 부패지수가 높은 나라는 내부에서부터 망해 가지 않습니까?
고대엔 이렇게 사회기반이 썩은 나라는 강대국에게 먹히는 것이죠.
기초가 썩었기에 조그만 위기와 침략에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와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죄와 불법을 가볍게 보다가는 큰 위기를 만납니다.
결국 삶의 큰 위기와 불같은 시련은 우연 보다는, 죄의 결과일 때가 더 많습니다.
가정도 식구들의 인격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 흔들립니다.
아이들도 부모의 인격을 봅니다.
가족원들도 서로에게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보이고 서로 책임을 다해야지, 본성대로 하다간 가정이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탐욕과 위선, 물고 뜯는 모습과 무너진 정의가 결국 멸망을 불러왔다는 강력한 경고를 이사야서에서 들어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나 이런 절망의 인간사에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15절에,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들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주목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지키시고 사람을 감찰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모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가 아니잖아요?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번역했지만 원어의미로는 인간의 악이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우리 같이 크게 정의롭지 못한 사람도 뉴스에서 끔찍한 범죄가 나올 때 화가 치밀고 마음이 언짢아지죠.
선하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모든 파괴와 죄악의 참상들이 너무 고통스러우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습니다.
16절,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불의가 판을 치면 누군가 선악을 바로잡고, 갈등을 바로잡을 중재자가 있어야 하는 데 아무도 없어 근심이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악을 바로 잡을 중재자가 있을까요?
우리나라만 해도 촛불혁명으로 새정부가 들어섰을 때 다들 기대치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결과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부패와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시원히 해결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최선을 다하시는 줄 알지만 딱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몇 사람이 정직하고 바르게 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유다왕국에서도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의로운 왕이 나와서 국민들을 신앙으로 바로잡으려 했지만 국가 전체에 퍼진 부패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깊이 부패하고 썩었습니다.
이런 경우 공감하실 것입니다.
친한 동창들이 서너 명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재밌게 이야기들을 합니다.
먼저 모임에 안 나온 사람 이야기부터 도마에 오르죠.
그러다 한 사람이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면 곧 그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를 놓고 이야기 할 때 칭찬만 나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 하리라 별로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들 문제도 있지만 누구나 다 결점 투성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중재하고 바로잡을 수가 있겠어요?
우리들 가정을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식구들의 결함, 뒤얽힌 가정사, 자식의 미래, 당장 헤어나야할 문제들.
부모라고 이걸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고 그냥 속을 끓이며 사는 것이잖아요.
죄가 가져온 사람의 처지는 다 비참하고 당장 자기 앞의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을 위한 해답을 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심판하셔야 할 창조자가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풀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를 펴든 계속 하나님께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하나님이 스스로 중재자가 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중재자가 되기 위해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참혹한 현실과 영원한 형벌로부터 건져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팔을 걷어 부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이 구원을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이 땅에 오신다고 합니다.
17절,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이 구절은 상당히 시적인 표현인데, 하나 하나가 진리와 놀랍게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중무장을 하고 구원을 위해 싸우러 오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해결하셔야 되는 것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공의로는 죄인을 심판하고 벌을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인간을 구원하셔야 되는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와 구원으로 동시에 무장을 하셨다고 하죠?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 마굿간에 작은 아기가 되어 오신 이유입니다.
인간이 되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그로 인해 인간은 구원하시는 것이죠.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고 구원을 머리에 투구로 삼으신 완벽한 무장을 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일을 이렇게 만든 사탄과 악에 대한 완전한 심판을 뜻합니다.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신 것이죠.
이 모든 일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손끝 하나 까딱해서 이루시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열심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계획부터 성취까지 계속 됩니다.
사랑의 특징은 열심이잖아요?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참 열심히 합니다.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분들 보면 김밥 하나를 만드는 데도 웬 공정이 그리 많은지요.
일만 사랑하는 것일까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그것을 잘 해내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끝이 없기에 끝없이 일을 해내는 힘이 되는 것이죠.
사랑이 식어지면 열심도 식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건 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열심도 절대로 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 열심을 보이지 않으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침부터 일하셨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평범한 날에도 열심을 품듯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열심을 다하시고 평생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3. 그리고 이 구원은 세상 모든 만민을 위한 것입니다.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 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망설임 없이 우리를 위해 뛰어 내려오신 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강물은 해 돋는 쪽에서부터 해 지는 쪽까지 창일하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이전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는 것이죠.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전세계에 얼마나 많습니까?
지구상에서 가장 약소국에서 시작된 사건을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듣고 믿게 되었겠습니까?
바로 이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 해주신 이 엄청난 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더욱 하나님과 친밀해가지만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더 떨리는 마음으로 경외합니다.
사노라면 세상 일 중에도 늘 자신이 없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에겐 시험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인들에겐 대하기 힘든 상사나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일 수도 있습니다.
자식문제일 수도 있고 고질적인 질환일 수도 있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두려운 존재가 없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들이 왜 줄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합니까?
두려운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만한 성품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약점이나 남 앞에 당당하지 못한 무언가를 허용하십니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두려운 문제가, 그 일을 도와주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장치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지 그게 없으면 인간은 기도조차도 도도하게 합니다.
그러니 항상 두려움을 느끼는 문제라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 문제 때문에 내가 매일 하나님을 찾고 경외함으로 해결을 구한다면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4. 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20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시온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말합니다.
장소적인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곳, 택하신 사람에게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다 임하진 않으시잖아요?
예수님은 택하신 사람에게 임하시되 그 사람이 해야 할 것은 죄과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를 씻어주고 죄의 결과인 심판에서 건져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죄에 빠져 있다면 앞뒤가 안 맞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 쪽에서는 더 이상 죄를 짖지 않으려고 해야 맞는 것이죠.
내 음주운전 사고로 뒤에 탔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래도 음주하고 운전하겠습니까?
물론 평생을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변화는 있습니다.
전에는 나한테 유리하면 자연스럽게 나왔던 거짓말이 지금은 아닙니다.
소확행이라는 말 잘 아시죠?
작지만 확실하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 소확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작지만 확실히 챙기는 남의 물건이라는 말입니다.
회사 휴게실에서 슬쩍 챙겨서 넣는 커피믹스, 사무실의 볼펜, 이런 걸 챙겨 넣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공공의 물건이라면 가지는 게 임자라는 생각은 잘못이죠.
믿음이 자라면 이런 것에도 제동이 걸립니다.
성도들에겐 과거와 다른 도덕적 성향이 점점 뚜렷해집니다.
과거에 선호했던 죄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죄과를 떠나려는 소망은 점점 더 강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완전하진 못해도 옛날에 비해 많은 죄과를 점점 벗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그리고 이 구원은 성도들에게 영원히 주신 것이고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품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근거로 세운 새로운 언약입니다.
과거 모세를 통해 전해주신 율법의 언약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백성들이 죄를 떠나고 선한 율법을 힘써 지켜야 언약이 유지됩니다.
법을 지키지 않고 다 불법한 자들이 되었기에 망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언약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치르신 속죄의 값이 너무 커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을 뿐 아니라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평생 짓는 죄를 하나님의 피가 다 덮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대로 성령님이 우리와 영원히 동거하시잖아요?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말씀 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아무 말도 안 하시는 데 굳세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음성 못 들으면 하나님 못 믿어요.
사람은 서로 말을 하는 가운데서 교제가 이뤄지는 것이죠.
서로 의사소통이 되어야 상대를 알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생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 귀에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잖아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마음이 잘 맞춰지도록 매일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천둥처럼 크고 동굴 속에서처럼 크게 울려야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벼락같이 큰 소리로 말하지 않잖아요?
하나님의 말씀도 그냥 보통 성경말씀처럼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엔 어느덧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게 무엇입니까?
원래 알던 말씀이 어느날 잔잔하게 내 마음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와 평생토록 대화하십니다.
매일 성경과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 주 과학 학술지에 났던 논문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과학에서 연구한 바로는 오래전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들이 단 기간에 멸종된 거대한 멸종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해양생물의 96%, 지상생물의 70% 이상이 이 시기에 멸종되었다고 합니다.
지상에 살던 동·식물, 풀이나, 벌레나, 도마뱀, 심지어는 미생물까지 모두 이 시기에 사라졌다고 봅니다.
그 이유가 혜성충돌이라고 추정했었는데 이번 연구결과 지구온난화로 인한 화산폭발이라는 것이죠.
물론 이것도 다 몇 개의 자료들을 분석하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기사의 댓글을 보니 하나님의 심판인 노아의 홍수가 입증된 것이다라고 쓴 사람도 있더군요.
사실 노아의 홍수 때 사라진 것이죠.
그 사람 때문에 결국 종교 논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중 이런 댓글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웬 하나님? 인간 아니었음?’
예수님이 인간이셨다면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란 생각은 하겠지만 그 이상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를 속죄하고 내 운명을 영원히 바꿔주셨기에 이 추운 날도 기쁘게 예배하러 나오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내려오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시리라 믿습니다.
그 열심과 사랑이 평생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젠 단지 과거처럼 삶을 견디고 버텨내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나날은 더욱 복되고 의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다만 죄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지 않게 하고, 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성도님들의 생애가 점점 더 의롭고, 더 복되고, 보람되길 이 대림절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018년12월9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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