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FkwbxqOSy2E&t=292s
지구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미스테리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살던 모든 사람들은 다 뻔한 인간들이죠.
그 중에 무슨 신비하고 미스테리한 인물 같은 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위인전의 한 인물일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신화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인 줄 압니다.
한 인물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를 수는 없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선지자가 7백년 뒤에 세상에 오실 구원자에 대해 예언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면면히 이어지던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이사야서 53장에서 마치 폭죽처럼 터지며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빌립이 전도한 에디오피아 내시도 이 부분에 사로잡혔잖아요?
많은 신자들이 이 신비로운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마음으로 믿는 인격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주님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아름다운 지식을 더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이사야53장은 점점 선명해지는 구원자, 하나님의 종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장차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줄 하나님의 종 고레스왕에 대해 예언했었죠.
그러나 고레스왕을 향했던 초점은 다른 한 사람을 향해 서서히 옮겨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겨누었던 구원의 초점도 달라집니다.
구원은 점점 이방나라 전체를 향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이 땅의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으로 바뀌고,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인 것이 드러납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여호와의 종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종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레스왕 같은 정복자여야 완전한 나라를 세울 텐 데 그게 아닌 것이죠.
본문 이사야53장은 예수님에 대한 평가만큼 다양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이 여호와의 종에 대해 계속 목소리를 높여가던 이사야선지자는 1절에서 허탈하게 말하죠.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이사야 선지자 당대에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대속의 죽음이 완성된 뒤에도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종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자로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처럼 쉽게 이 본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개 유대인 랍비들은 이 고난 받는 종을 자기들 유태인이라고 해석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의해 유럽 유대인 6백만 명이 학살되었죠.
당시 전 세계 유태인들이 1800만 명이었습니다.
삼분의 일이 히틀러에 의해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이 비극을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라고 명명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말이 번제라는 구약성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서 제물이 되어 죽는 종과 무고하게 학살당한 자기들 민족을 동일시하는 데서 나온 말인 것이죠.
무고하게 고난을 받았기에 마지막 부분에서처럼 하나님이 자신들을 축복하신다고 믿고 있은 것입니다.
현재의 이스라엘 국민들이 전부 하나님과 구약성경을 믿지는 않습니다.
10% 정도의 정통 유대교인들이 있고 나머지는 민족의 전통 정도로 유대교를 생각하고 구약성경을 읽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만일 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사야 53장을 읽어 준다면 오히려 기독교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약성경에 있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는 구약성경에 있다고 한다면 굉장히 혼란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비신자들은 이 성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이 구절을 읽어주면 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맞출 것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록한 게 아니라 예수님 탄생하기 7백년 전 사람이 기록해 놓은 것이라면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대속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구약성경에 박아 놓은 복음이고 구원의 시금석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조금씩 성경을 배워 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믿음을 조금씩 갖게 됩니다.
그러다 이사야53장을 진지하게 대면할 때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 말씀이 아주 강하게 죄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십자가의 예수님을 대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깊이 사로잡히고 죄에 대해 애통했다면 아마 거의 여기서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영혼으로 대면하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성령의 날개를 의지해 7백년 뒤의 갈보리 언덕으로 가 고난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듯 생생히 보여줍니다.
이 한 장의 성경에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놀랍도록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믿어왔고, 남은 평생 모든 것을 걸고 따라가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빈약해서 A4용지 한 장에 채울 정도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전체 말씀을 나누지는 못하겠지만 집에 가서 꼭 전체를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도수장의 어린양, 부자와 함께 한 무덤, 속건 제물, 씨를 보게 되며, 죄악을 담당하고 그의 날은 길 것이요. 존귀한 몫을 받을 것이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영광을 신약성경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치 신약성경을 보고 베껴 놓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부분에서만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당해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은 사람들이 무시한 예수님의 출신 배경을 말씀합니다.
우선 예수님이 오신 나라가 식민지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의해 종처럼 부려지던 식민지 국민이었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 같았던 것이죠.
그 중에서도 목수라는 직업은 톱밥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육체노동을 하는 블루칼라 직종입니다.
당시에도 귀족이 있었고, 제사장 가문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고, 존경받는 랍비나 바리새인 같은 종교 엘리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신분으로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주님을 배척한 이유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을 국가의 지도자로 삼고 싶겠습니까?
지금도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출신과 학력을 문제삼고 끝까지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몇 몇 대통령들도 그래서 많은 괄시를 당했잖아요?
예수님은 다윗왕조의 자손이었지만 다윗왕조는 이미 몰락했고, 당시는 헤롯왕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문이나 유명한 랍비의 가문이나 실권 있는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예수님을 그렇게 체포해서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사형을 집행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풍문이 돌 때 상류층 사람들은 거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무시당하고 버림을 당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꼭 이렇게 태어나서 멸시를 당하며 사셨을까요?
십자가를 지는 것만도 너무나 큰 고통인데 삶 자체도 고난이었어야 하셨냐는 것이죠.
그것은 오늘 말씀대로 우리의 질고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만 그것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가 죄로 인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사셨던 것이죠.
또 예수님이 죄인을 대속할 흠 없는 제물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상황을 다 시험 봐서 통과하지 않으면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죠.
히브리서 4장15절에서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는 시험당하면 거의 거기 넘어져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처럼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길 기도하는 게 상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시험은 다 당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처럼 사람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무시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맞대어 욕하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어제 베드로서 묵상 본문에 나왔었죠.
인간사에 다반사인 배신의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시는 육체의 고통 중에도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이로운 겸손과 온유함과 사랑은 십자가 수난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죠.
우리가 극한 상황에서 감추었던 본성이 드러나듯, 예수님도 극한 상황에서 본성이 드러나셨지만 그것이 우리와 그렇게 다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세가지 시험을 당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시험을 당하신 것입니다.
생존 때문에 범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40일 금식 뒤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그러냐는 마귀의 유혹이 있었죠.
그걸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만 허용되었던 것이잖아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적을 동원하려는 시험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 없이 세상을 구원하라는 시험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시험을 당하셔야 했고, 시험을 이겨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가 당하는 것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단절 된 죄인들의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가장 고통스럽던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부르짖었던 말이 무엇이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분리되는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토록 완벽한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하나님께서 싸늘하고 무섭게 진노하시고 주님을 버려 버리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증오하고 싫어서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돌린다면 그 찢어지는 아픔을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하나님과 분리 된 상태로 살아가는 게 죄인들입니다.
그 영적인 상태가 어떤 것인지도 예수님이 겪어 보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지금의 상태와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있는 상태가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생각을 못합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 안개 속 같은 인생, 목적을 모르는 삶, 기댈 데 없는 불안함, 죽음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두려움.
그런게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안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 된 그런 죄인들의 상태까지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시험과 고난을 당하셨고, 전혀 죄를 짓지 않으셨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이렇게 고난 받으시며 죄를 대속해 주신 결과로 우리가 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5절,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못과 창에 찔리시고, 온 몸이 상하며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본문 말씀으로 볼 때 두 가지 시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1)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평화는 단지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관계가 바뀐 데서 오는 영원한 평화를 말합니다.
이 평화가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주는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이 평화가 없고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도 없습니다.
이사야 48장2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아무리 겉으로 괜찮은 척 해도 그 안에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가 없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평화가 없고, 자기와의 관계에서 평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루를 살아갈 때 ‘아, 참 평안하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의당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형벌을 받아야 했을 사람들입니다.
벌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죄에 대한 댓가일 뿐이지 그 이후에 평화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게 심판이죠.
죄 없는 예수님이 징계를 받고 형벌을 받으셨기에 하나님은 화평의 팔로 우리를 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셨다는 것을 믿는 성도들이 얻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평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평화와 나 자신과의 평화가 이뤄집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뤄졌다면 타인과의 평화도 이뤄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어려움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면 사람 사이에도 곧 평화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만큼 사람과의 평화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한 상태를 유지해 가야 합니다.
또 나 자신에 대해서도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열등감, 상처, 불만족, 경쟁심, 인정욕구,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평화를 깨뜨리죠.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릴수록 이런 나 자신과도 점점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내 안에 죄의 뿌리가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믿음과 지각을 얻으며 점점 나 자신도 껴안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화평이 있고, 못난 나 자신을 끌어 안았고, 이웃과의 불화가 없다면 환경에 관계없이 우리는 평강 중에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값진 평화입니다.
2)특히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는 차마 볼 수 없는 참담한 고통으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비참하게 뭉개져야 할 우리의 몰골을 주님께서 대신하신 것입니다.
대신 우리 얼굴에 하나님을 아는 광채를 주셨고 존귀한 왕관을 씌워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도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고난으로 인해 치유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이 현재의 질병으로 부터의 치유가 아니라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4절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고는 육체적인 질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냥 약만 먹는 사람들과 약을 먹으며 기도하는 신자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성경은 병이 들었을 때 기도하라고 하셨잖아요?
어떤 질병이든 기도하며 치료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치유되는 과정에 무슨 일인가를 행하십니다.
은혜자매가 조혈모세포 이식과 무균실 생활을 잘 마치고 이번 주 화요일에 퇴원을 합니다.
저는 이 과정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담을 인터넷에서 많이 찾아 보았습니다.
지난 주에 무균실 환자들이 다 기력이 떨어져 누워만 있는데, 은혜자매는 우리 성경묵상 범위를 필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의아했을 거예요.
무슨 힘이 남아돌아서 저런 걸 쓰고 있나.
은혜자매와 함께 무균실에 입원한 사람들이 다 토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은혜자매는 구토없이 잘 견뎌냈습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이겠어요?
모두의 중보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가 보이지 않게 무언가 손을 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삶의 문제나 육체의 질병이나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 문제나 질병 자체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분명히 매일 견딜 힘을 주십니다.
어쩌면 매일 매일 하나님을 바라고 살게 하시려고 일용할 양식처럼, 하루의 건강만을 보장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매일 주님을 바라볼수록 우리 영혼은 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에 꼼짝 못하게 묶인 게 아니라 벗어날 길을 보장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고 그 힘을 매일 행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 길이 없는 우리를 위해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대속임을 믿는 고백입니다.
진실한 우리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의 수고에 대해 기쁘게 여기시고 만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 있는 능력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주 안에 있는 모든 부요함을 기쁘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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