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이사야10장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남수연 2015. 11. 25. 17:34

이사야1012-16

지난 한 주간도 테러로 인한 불안감이 지구촌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테러단체의 안전지대로 생각했던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다는 우려들이 나오더군요.

테러단체를 지지하는 외국인이 우리 땅에서 버젓이 조직의 깃발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테러가 급기야 우리 안방까지 위협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천공항에 입국해 난민신청을 하고 대기 중인 시리아난민들이 백삼십여명이라는 소식에도 전에 없이 괜한 신경들이 쓰이셨을 것입니다.

극단적인 테러세력으로 인해 난민문제가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에 세뇌되어 양심과 상식이 불통한 이런 극악한 소수의 집단이 지구촌 전체를 공포로 몰고 간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말 마땅히 제압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까?

세계경찰을 자처하던 미국도 작년에 우리는 더 이상은 국제경찰이 아니라는 오바마대통령의 발언으로 시리아문제에서 한 발 뺐죠.

인간의 힘으로 곧 파라다이스를 만들 것 같던 자만심은 다 어리로 갔습니까?

이젠 어느 나라고 정치 불안, 자연재해, 테러, 빈부격차 문제라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방향을 잃고 점점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지구촌에 안전지대는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우리도 이 역사의 틈바구니에 끼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혼란이 가중되는 불안시대에 과연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의 안전이 얼마나 보장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런 위태한 시대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선지자의 활동시대의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인구나 영토 면에서 남유다보다 월등했습니다.

당시 주변 나라들의 상황을 보면 초강대국 앗수르가 현재의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쪽까지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남하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공략하고 있던 때입니다.

남유다보다 군사력이 월등했던 북이스라엘이였지만 이미 앗수르의 침략에 멸망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집어 삼킨 흔해 빠진 역사 중 하나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경고이자 메시지입니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재난, 그리고 개인의 흥망성쇠가 우연히 일어나고 단순한 인과응보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유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이 배후에 있다는 것이죠.

요즘 현대신학이 좋아하는 게 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사에 시시콜콜 관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침 삼킬만한 시간의 공백도 없이 우리를 시험하며 지켜보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한 손에는 악에 대한 심판의 막대기가 들려져 있고 또 한 손으로는 상처를 고치고 회복시키시며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세상에는 분명히 통치자가 계십니다.

1. 본문에서 우선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리신 심판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를 심판하시리라고 합니다.

앗수르의 심판 이전에 이스라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공들여 기른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의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전체의 역사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앞뒤에도 아주 명확하게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대표적인 죄악으로 우상숭배와 지도자들의 악행과 백성들의 무지함, 그리고 이들 모두의 불경건함과 도덕적 타락을 들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법궤를 차지한 남유다와 달리 북왕조는 신앙적인 유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조인 야곱이 제단을 쌓았던 벧엘에 성소를 만들고 금송아지상을 세워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점점 세월이 흐르자 금송아지 옆에 가나안부족들의 우상인 바알상, 아세라상도 세웠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옆에 마리아상을 두고 부적도 붙이고, 불상도 갖다 놨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우상들도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 성경은 이미 인간 본성을 꿰뚫어 정확하게 금지시키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실 때 너를 위하여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만들어서 치성을 드리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다른 종교를 구분하는 분명한 시금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나를 위해서라면 이미 우상종교화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피조물이기 때문인 것이죠.

죽어서 천국을 가기 위해서라는 것조차도 신앙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냉철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주시기에 경외하는 신앙이 아니면 죽음 뒤의 천국도 사실은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또 믿음의 동기가 세상에서의 형통이나 안전이나 마음의 평화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저절로 따라오는 선물입니다.

물론 처음에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들은 다 현세적인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존재가 인식되는 영적인 거듭남이 있고나면 달라집니다.

그냥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고 좋으신 보호자라는 것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따르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나 비슷한 것이죠.

부모가 용돈을 주고 학비를 대주고 유산을 물려줄 것이기에 함께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믿음으로 빨리 바뀌지 않으면 북이스라엘과 같이 자기를 위한 우상들이 점점 믿음에 붙어 우상종교화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우상종교화의 위험이 얼마나 많을까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운세를 보며 여전히 장래의 길흉을 궁금해 한다면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분명한 우상종교화입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현대의 기복주의는 대표적인 우상종교 형태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돈도 좋지만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좋아합니다.

어느 것에 아주 약간의 비중이 더 있냐는 것이 행동 전체를 좌우합니다.

또 내 생각이나 감정을 말씀에 굴복시키지 않는 것도 우상종교 형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적인 주장들을 말씀에 순종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당의 말대로 화복을 불러오는 주술적인 행위를 하고 우상 앞에 가서 치성을 드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무당을 찾아가고, 우상 앞에 치성 드리는 사람들은 착해지려고 가는 게 아닙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아시겠습니까?

현대교회가 우리 자신을 창조주의 뜻을 따라 바르게 돌리려는 목적이 없이 성공과 건강과 재물만을 구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에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태도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믿음에 저촉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따른다면 나를 위한 우상종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 신앙을 자신을 위해 복을 비는 우상종교들과 혼합하더니 결국 죄와 탐욕만 키워 가나안 땅 최강의 악행자가 됩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악을 저지르면 그 분야의 끝판 왕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장해서 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은 제일 못 견뎌하십니다.

신앙을 가장한 악은 더욱 가증스럽고, 양심마저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슬람테러조직을 제어할 방법이 없는 게 그것 때문 아니겠습니까?

왜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습니까?

신자들의 인격과 행실이 세상 사람보다 때로 더 나빠서 그렇습니다.

그래놓고 자신의 신앙을 우월하다고 과신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기에 도저히 회개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에 예수님이 들어오신다면 그렇게 직격탄을 날리지 않으시리라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특히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의 죄악이 사회전체를 오염시킨 주범이라고 합니다.

본문 앞에 16절을 보면 이렇게 고발합니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지도자들이 백성을 잘못 인도해서 같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위태하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목회자들에게 있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지만, 우리 목사들이 강단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옹호하고, 죄인들을 오냐오냐 달래주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남발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탐욕의 우상을 키워주고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이 두꺼운 신자들을 양산한 것이죠.

10장에 말씀합니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 것은 사람들 상호간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절대 묵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거짓말을 하고 약자를 멸시하고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악행을 그냥 넘기지 않으십니다.

그런 행위가 있으면 신자들이라고 눈감아 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온 천하가 다 하나님의 눈이고 온 천하가 다 하나님의 귀입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이 온 세계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도 들으시는 하나님의 귀는 우리의 불평과 교만한 말도 남김없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보지 못하시는 게 뭐가 있고 듣지 못하시는 게 뭐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타오르는 불같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저지른 악행들이 자신을 불살라 망하게 한다는 것이죠.

심판의 막대기를 불러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지은 악행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평지풍파들과 갑작스런 재난들은 무고한 고난이기 보다는 거의 우리가 악을 행한 결과입니다.

지난 주 마음이 씁쓸한 기사가 둘 있었습니다.

주일은 쉽니다로 유명한 신원그룹의 박00회장이 결국 8년을 구형받았다는 내용입니다.

IMF 경영난으로 회사가 넘어갈 때 파산신청으로 250억을 탕감받았는데, 부인명의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주식 한 장 없이 다시 신원그룹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의의 구제책을 악용해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회장님은 유명한 기독실업인으로 개성공단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에 헌신했던 분이신데, 원칙을 버린 편법 경영이 화를 부른 것이겠죠.

한기총 등의 기독교단체에서 탄원운동을 벌이고 있다니, 한국교회에 엄청난 누를 끼치고 부담을 주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떡복기 프랜차이저 아딸의 이00대표가 부식업체에 60억을 부당하게 받은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딸의 이대표 역시 목회자 출신으로 성공신화의 주인공이었는데 바르지 않은 경영마인드로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역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이미지에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직과 원칙을 따르는 것은 신자들의 기본입니다.

그걸 버리고 슬그머니 현실과 타협한다면 반드시 우리 삶에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죄의 결실을 맛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죄와 악에서 돌이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나 자신과 타인에게 올바른 행위를 하라는 것입니다.

아직 이 땅에서의 심판은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그 목적이 동일하십니다.

거대한 자연재난을 허락하시고, 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궁핍이나 테러들을 허용하시는 것은 누구든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은 완급을 조절하시고 목적만큼 허락하십니다.

악의 세력을 무작정 풀어주셨다면 지구촌은 테러와 전쟁으로 벌써 지옥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우리 역시 죄의 댓가로 만난 고생과 환난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고통스럽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이 진멸이 아니라 교정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도 좀 눈치있게 하셔야 합니다.

눈치 없으면 많이 맞습니다.

아이들 키우다보면 눈치껏 부모의 매를 덜 맞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눈치없이 버티다 더 많이 맞는 애들이 있죠.

하나님의 징계의 매가 왔을 때, 빨리 죄를 뉘우치고 행실을 고치는 게 때리시는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바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앞서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함으로 죄를 모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 우리가 살면서 짓는 그 많은 죄들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그 죄들도 매일 회개하여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루를 돌아보며, 또 죄를 지은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받고 그 죄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짓는 죄를 보면 대개 비슷한 종류를 반복하게 되는 데, 그게 각 사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서 그렇습니다.

반성하고 머리를 쥐어 뜯어도 어느 새 또 지은 죄가 바로 그 죄목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 해도 매번 죄를 고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다보면 그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결국은 조금씩 벗어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한없이 머리에 쌓아두고 살아가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어느 순간 그 죄와 함께 삶과 인격이 우르르 붕괴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절실하게 적용해야 할 메시지인줄을 깨닫고 함께 지켜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다음은 심판의 막대기가 된 앗수르에 대한 심판입니다.

본문에서 앗수르의 자랑하는 말들을 보면 일단 그들의 교만함이 드러납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짧은 한 문장에서 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엄청난 자아도취에 빠진 증거죠.

14절을 보면 이런 자기를 감히 대항하는 나라가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입을 벌려 지저귀는 자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둥지에서 알을 주워 담아도 짹 소리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함은 단지 패전국에 대해서만이 아닙니다.

앞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들이 멸망시킨 나라들의 우상신과 똑같아서 이스라엘을 지킬 능력이 없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심판의 막대기일 뿐이였지만 스스로가 세상을 휘두르고 심판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15절에 보면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면 이렇게 모든 게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줄 알고 어리석고 교만한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을 믿고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교만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벌하십니다.

우리가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한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을 때, 자신이 단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도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받은 것으로 자랑하지 못하며, 더구나 심판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오늘 앗수르가 심판당한 사실에서 주시는 교훈입니다.예수님께서 남을 정죄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정죄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도끼가 찍는 자 앞에서 자기를 옳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다보면 누구보다 애들의 단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식들의 부족한 모습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내 자식의 허물을 들춰내면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때려도 내가 때리고, 고쳐도 내가 고칩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데 우리가 성도들의 흉을 보고 잘못을 정죄하는 것은 권세 있는 부모 앞에서 그 집 자식 흉보는 거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남의 흉을 보고 비판할 만큼 경건하고 선한 사람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저 그런 우리 주제를 알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롭지도 못한 주제에 심판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심판자는 오직 정의로울 뿐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죽음으로 그 사랑을 입증하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적격자입니다.

터무니없이 교만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또 앗수르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교만 뿐 아니라 도가 넘게 잔혹했습니다.

앗시리아제국이 전쟁에서 패전국에 저지른 만행과 잔인함은 성경에도 기록되었고,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왕들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면 누구든 사지를 잘라버리고 사자에게 던졌습니다.

점령국은 철저히 파괴하고 논밭에는 식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경건하게 말씀을 순종하고 바르게 살아야 할 이스라엘이 맞을 짓을 했기에 앗수르라는 몽둥이를 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막대기가 되었던 앗수르는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7절에서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앗수르의 심판 역시 그들의 악행이 불러들인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교정하기 위해 몽둥이를 드신 게 아프신데, 손에 잡힌 몽둥이가 과도하게 잔인하고 우쭐대기까지 하니 몽둥이를 부러뜨리시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개인과 사회를 망하게 하는 죄악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진노를 진지하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듣고도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왜 사는 게 이렇게 가슴 철렁거릴 일이 많고, 창피스럽고, 곤고한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왜 우리 주변에서 악이 설치고, 유난스런 사람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괜한 손해를 보고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르셔서 우리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불편한 환경이 우리의 죄를 제련하는 용광로 같게 두시는 것입니다.

모르시기는커녕 우리의 치명적인 결함에 딱 맞는 매를 드십니다.

우리 고집을 다루시고, 교만을 다루시고, 위선을 다루시고, 정욕을 다루시는 일에 하나님은 전문가이십니다.

대개는 우리의 죄성이 그런 악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짝이 딱 들어 맞는 것이죠.

저는 자녀가 된 우리에게 까지 하나님이 가장 공평하고 정의롭게 심판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안심이 되는 지 모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주를 통치하시고 영원히 우리를 다스리실 자격이 있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아내면 자유롭게 마음껏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 거대한 악이 밀고 들어오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개신교 인구는 3%에 불과합니다.

청년세대들은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유럽은 2050년이면 거의 이슬람화 될 거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마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기를 위한 우상으로 신전을 채웠던 북이스라엘엔 앗수르의 대군이 물밀 듯 몰려와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보다 군사력이나 모든 면에서 열등했던 남유다는 앗수르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히스기야왕 당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모욕했던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랍사게의 선전포고문을 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185천명의 앗수르군사들을 대신 해치우셨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은 앗시리아의 역사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선지자의 예언대로 중동의 광활한 영토을 점령했던 앗시리아는 정말 맥없이 바벨론 제국에 패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현재도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통치 심판하시고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심판하여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수많은 위기와 근심거리들이 있는데다 그것도 모자라 테러의 위협까지 더해지고 있는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기며 올바르게 행한다면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앗수르처럼 사방이 우리를 위협한다 해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잘 될 때 앗수르처럼 교만하지 않고, 삶이 약탈당하고 괴로울 때 우리 자신을 잘 살펴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써 안전한 인도와 축복 가운데 거하는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5년11월22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