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이사야32장1절-8절(공의로운 왕이 다스리신다)

남수연 2014. 8. 19. 22:24

 

최근 우리 사회에 신드롬이 있다면 이순신장군의 해전을 그린 명량이라는 영화와 프란체스코교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명량은 상영기록에서 역대1위인 아바타의 기록을 깼다고 하더군요.

프란체스코 교황이나 명량의 이순신이나 우리가 지도자에 열광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지도자에 목말라 있다는 반증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열광하는 세상의 유일한 왕은 우리를 속죄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한 분 뿐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각 다른 두 왕을 섬기는 이 땅의 사람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은 두 왕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미혹하고 배후에서 통치하는 사탄을 세상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왕으로 섬기고, 쾌락을 왕으로 섬기고, 종교의 수장을 왕으로 섬기고, 자기의 명예와 건강과 가정을 왕으로 섬기지만 그 배후에는 오직 한 왕이 있으니, 세상임금인 사탄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본인이 원치 않아도 세상 임금의 통치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상징적인 뜻이 아니라 실제 사탄과 악의 세력은 세상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사람들 마음을 교묘히 조정하며 악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원하다면 그런 사람들을 얼마든지 파멸시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한 체 해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사탄의 세력 앞에선 한줌 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임금을 섬기지 않는 유일한 길은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우리의 위대한 왕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 뿐 아니라 영원까지 다스리시고 모든 영혼의 창조주이고 심판자가 되시는 참 임금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섬깁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며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잘 깨닫고 따르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왕이십니다.

본문 1절에서 장차 공의로 백성을 통치할 한 왕이 오실 것을 이사야선지자는 예언합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영원히 의로 통치하실 왕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특히 오늘 이사야선지자는 이사야서 전체 66장을 통해 다각적으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집중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메시야가 처녀 몸에서 아기로 태어날 것과 속죄의 제물로 오신다는 것과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스런 통치에 대해 눈으로 보고 쓴 듯이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예언에 꼭 맞는 다른 이가 인간 역사 어디엔들 있습니까?

구약성경에서 여러 선지자가 예언했던 메시야에 꼭 맞는 분은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성경의 예언에 걸맞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모세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아 증거한 그 메시야의 옷이 꼭 맞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오늘 3,4절 말씀에서도 메시야가 오셔서 행하실 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이 말씀을 간단히 말하자면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을 누가 하셨습니까?

예수님 말고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세례요한이 헤롯왕의 감옥에 구속되었을 때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이 지금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가 듣게 하고 복음을 전파해서 백성들이 깨닫게 하시는 그 사역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메시야의 사역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날 우리에게도 응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전에는 영적으로 소경이고 귀머거리고, 벙어리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존재들이란 것이죠.

인간 부모의 몸으로부터 출생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자기의 죄도 모르고, 영적인 진리들을 깨닫지도 못하는 죽은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시고 모든 것을 보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왕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하시고 예언하셨고 때가 되어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메시야 왕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자기가 구원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태어나셨을 뿐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해 치밀하게 예언되었던 그 왕이라는 것을 오늘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꼭 짚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언지를 계속해서 확인해가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주님을 통해 정확히 이루어진 것을 통해 우리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집니다.

신뢰할 만한 개신교의 신학자이고 주석을 집필하신 박윤선박사님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국교회 안에 존경할만한 신실한 분들이 좀 있었습니다.

이 박윤선박사님이 중학교 시절 성경을 통해 확신하게 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날 나는 수청고개 밑에 있는 시냇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심중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생기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자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즉시로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처럼 솟아오르는 게 있었다.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니라’

그 순간 놀랄 정도로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고 의심은 사라졌다.

그 후로는 성경만을 견고히 붙잡고 오늘 까지 살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오늘은 짧은 본문이지만 이사야서 전체를 보고 성경 전체를 읽는 가운데 성령께서 분명하게 우리의 구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조명해 주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공의와 사랑으로 통치하십니다.

1절입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공의로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공의로운 인간은 없습니다.

공의롭다는 것은 인간에게 걸맞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을 좀 살고 사람을 좀 겪어보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어떤 통치자도 공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사회에선 끝없이 드러나는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지긋지긋하게 목격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다스리시는 예수님께는 불의가 없고 편파적인 것고 불완전한 것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모든 공의의 기준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신지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실 때 우리의 죄를 그냥 눈감아 주신 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그 몸에 지시고 자신을 십자가에서 심판하셔서 죄값을 다 치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절대 불의를 눈감아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악과 불의를 지닌 채 예수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악한 우리의 죄악을 숨기고 다른 신앙행위를 더 한다고 절대 무마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 은택을 누리려면 주님의 공의로운 법에 순종해 우리도 공의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나라도 선진 법치국가일수록 국민들이 법을 잘 지키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공의롭게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백성이라면 주님의 법에 순종해야 맞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에 보면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린다고 하죠?

우리가 예수님의 방백들 아닙니까?

주님께 세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주님의 대사들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나 내 삶의 영역은 다 주님께서 다스리게 허락하신 영토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을 다스릴 영적 권위를 크던 작든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공의를 배우고 정의로 그들을 대해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부정직하고 불의한 면이 보이는 순간 우리의 영적권위는 사라집니다.

개신교가 천주교에 비해 공신력이 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개신교 신자들의 도덕성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불의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도 공의롭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마지막 절에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고 항상 존귀한 자리에 선다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존귀한 자라는 것이 드러납니까?

존귀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받는 자처럼 하나님의 법도에 항상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있어야 할 존귀한 자리입니다.

세상의 풍조와 불법과 불의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따르는 공의로운 주님의 백성이 다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의로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2절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정말 너무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누가 이렇게 모든 시련과 고난에서 우리의 피할 곳이 되고 해결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크고 작은 비바람을 만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옛말에 쌍가마 속에도 근심이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가마를 한 개가 아니라 쌍으로 타고 다니는 부자집에도 근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외제차가 몇 대가 있는 집에도 다 근심이 있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지간한 걱정은 누구든 다 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정말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충격적인 시련과 아픔도 만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수양이나 하려고 믿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날엔 요가도 좋고 명상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시련이 쓰나미 같이 몰려올 때,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생명을 위협하는 광풍과 폭우와 가뭄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어 주시고, 폭우를 가리는 곳이 되어 주신다는 것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 광풍이 불고 폭우가 퍼붓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수 없는 생각을 안하고, 좋은 생각만 하고 조심해서 산다고 해서 재앙이 피해갑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하우어스라는 미국의 한 유명 신학자의 인생 고백을 들었습니다.

조울증과 정신질환에 걸린 아내와 평생을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하루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꼼짝 않고 소파에 누워있는 아내와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은 재산 전부를 수표로 끊어서 자선단체에 보냈다고 합니다.

조증이 시작된 날 집에 돌아와 보면 새로 산 옷으로 집안이 발디딜 틈이 없이 꽉 차있습니다.

팔십이 다 되어 보이는 노교수의 얼굴에서 인생의 피곤함과 애환이 주름마다 깊이 서려있더군요.

남들이 다 하는 평범한 결혼생활을 할 줄 알았지 결혼에 그런 함정이 있는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고독한 싸움을 이기고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예수님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환난 날에 피할 요새와 산성이 되시고,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때 예수님 한 분 의지하고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많던 위기를 넘기고, 태산 같은 과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신 분은 예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광풍과 폭우를 피할 곳이 되시고 마른 땅에 냇물 같다는 말씀은 단지 마음의 위안을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광풍과 폭우와 가뭄으로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저 집 저 일로 다 망했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실제로 우리의 모든 환난에 피난처요 해결책이 되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도울 사람이 없고, 피할 데 없이 광풍과 폭우가 쏟아진다 해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왕이신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으십니다.

살다보면 내 주위에 모든 것이 메마르고 고갈되어 갈 때가 있습니다.

때로 천원짜리를 세가며 살만큼 생활비도 빠듯하고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야 되는 돈이 더 많은 춘궁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돈이 마르면 삶의 기쁨도 마르고, 마음도 건조하고 팍팍해지게 됩니다.

주변에 모든 것이 말라가고, 수입이 없는 어려운 삶에도 예수님은 반드시 오셔서 냇물같이 우리를 소생시켜 주십니다.

마른 땅을 걷다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해 주저앉고 싶을 때, 우리를 쉬게 하는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저희 형제들이 지난 주 어머니권사님을 모시고 강원도로 하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속초에서 유명한 맛집에서 성게알비빔밥과 오징어 순대도 먹고 속초수산시장도 둘러보았습니다.

누가 보면 병이 저렇게 위중해 보이는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며 뭐가 그렇게 좋다고 깔깔거리며 다 웃고 행복해 하는 지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인생의 애환이 있고 눈물이 있는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기도를 응답하시며 그 가운데서도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니 슬픔과 고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슬플 땐 슬퍼하더라도 오늘은 평안하니 감사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별별일을 다 만나게 되지만 우리의 모든 순간에 예수님은 분명히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넘기게 되고, 돌아보면 어떻게 그 길을 걸어왔나 신기하고,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보면 과거보다 더 나은 자리에 우리를 옮겨 놓으신 것에 놀라울 뿐입니다.

오늘 광풍 가운데 힘겹게 서있는 것 같으시다면 예수님을 의지해서 위기를 잘 넘기시길 축복드립니다.

주님은 반드시 피할 곳이 되시고 마른 땅에 강수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자들의 삶입니다.

그 다음 4절과 5절 사이엔 분명하게 커트라인이 그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무리들과 신자들이 다 비슷해 보이지만 정확하게 구분 된 경계선이 있는 것입니다.

5절부터8절까지는 여전히 세상 임금을 섬기는 무리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 오셨을 때 세상이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엔 성경 말씀대로 모두가 다 어리석고 죄로 오염되어 의인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예수님을 왕과 구주로 섬기는 지혜로운 자들이 된 것입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깨닫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좀 부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영생을 보는 눈이 있으니 인생이 전체로 꿰뚫어지지 않습니까?

선악이 그냥 분별이 되잖아요.

그러나 오히려 세상의 권력자, 존귀한 자, 지혜자라고 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채 여전히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 같은 어둠에 있을 때는 그들을 존귀하다하고 지혜롭다 했을 지 모르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진리가 비추자 더 이상 그들은 존귀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는 게 단번에 드러났습니다.

집안에서 다같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성령으로 거듭나고 보면 아직 믿지 않는 가족들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을 구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은 어리석고 우둔할 뿐 아니라 악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은 불의하고 간사하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또 얼마나 비정하게 구는 지 배고픈 사람의 밥그릇을 발로 차고, 목마른 사람의 물그릇을 뒤집어 없을 만큼 매정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합니다.

7절에 보면 그들은 그릇이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릇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악한 계획이 나오고 거짓을 꾸미고 남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죠.

우리도 본래 이런 악한 그릇이었지만 성령이 오셔서 거룩하고 존귀한 그릇이 된 것이니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타고난 악한 육체의 그릇대로 살다 죽는 것입니다.

요한복음8장24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권력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속죄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으니 그들이 평생에 지은 죄 중에서 죽는 것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확하게 죄의 값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파멸케 하는 세상 임금이 아닌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예수님만 왕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모든 시련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해결자가 되심을 믿으시고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성령이 계신 존귀한 신분임을 기억하고 존귀한 일에 서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8.17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