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이사야40장25절-31절)

남수연 2012. 10. 18. 00:46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그 말씀이 주어진 시대와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는 주전 7백여년 전 이스라엘 남유다에서 사역한 선지자입니다.

이때는 북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에 멸망해 사라졌고 남유다는 쉴새없이 침략해 오는 강대국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벼랑 끝에 선 이스라엘이 여전히 하나님 아닌 우상에게 공을 들이고 이웃나라의 도움만을 의지하는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당연히 지도층의 미움을 받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겠죠.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선지자는 나무둥치 안에 넣어져 톱으로 켜 두 동강 나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니 오늘 본문이 더 의미있게 여겨집니다.

이사야서는 66장의 많은 분량으로 구성되었는 데 1장부터 39장까지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읽은 40장부터 66장까지는 크게 세 가지 주제의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생활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과 메시야의 강림과 고난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역사의 종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구약의 요한계시록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포로 생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해방을 맞아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한 부분에 해당된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본장의 1절은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로 시작됩니다.

축복의 땅을 쫒겨나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은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힘들게 분투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에 대한 사랑은 시대를 뛰어 넘어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동일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을 버리고 실패하여 고난을 자초한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에게도 차별 없이 똑같으시다는 것이죠.

그 사랑을 의지해서 우리가 믿음에 실패하고 죄가 있더라도 아버지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각박하고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일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피곤한 우리 영과 육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소생되는 시간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을 향해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째는 너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바벨론의 포로가 된 비참한 현실의 배후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죄가 있습니다.

창조주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종교는 다 마찬가지 아니냐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죠.

그랬기에 가나안민족들의 신과 하나님을 비교해서 믿기 쉬운 종교로 갈아 탄 것입니다.

사실 처음 신앙생활 할 땐 하나님을 섬기는 게 좀 까다롭게 느껴지죠.

우리나라에선 술도 담배도 금기시하고 제사도 못 지내고 세상의 오락을 절제해야 하고 매 주일에 나와 예배드려야 하고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부담스런 일이죠.

이 말씀에 너무 은혜 받고 계신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구원과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인 줄 믿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받는 혜택과 세상적인 편안함을 저울질하다 세상을 선택해서 떠나고 있습니다.

한 때 기독교신자 비율이 90%에 달했던 유럽국가들의 기독교 이탈이 심각합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유럽의 개신교신자 비율이 2.5%란 말을 듣고 제가 잘못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을 정도입니다.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 국가 미국의 경우 역시 기독교신자 비율이 절반 아래로 내려갔다고 얼마 전 보도되었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좁은 문, 좁은 길, 적은 무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조주를 떠난 인간은 끈 떨어진 연처럼 붙들어 주는 이 없이 공허한 인생을 방황하게 되죠.

그들이 나름 그 삶에 만족하고 평안하다 생각할 때도 있지만 삶에 무시무시한 파도가 일어나는 순간 그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파선하는 걸 봅니다.

내일도 당연히 오늘 같은 평탄한 날이 될 것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침략의 위험 속에 있었지만 설마 했습니다.

그들은 막연한 평화를 확신했고 여전히 바알신당에 향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젖먹이조차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잔인한 바벨론의 군대가 밀려와 모든 것을 불태우고 약탈할 때 그들을 도울 신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뒤따라간 그 무엇도 환란의 날 인간을 도울 손이 되지 못합니다.

전쟁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사건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과 인생의 혼돈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창조주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눈을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맞바꾼 우상과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들을 구원할 유일한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눈을 들어 온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1장 20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죠.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조금만 정직한 양심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몰라서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것이죠.

우주의 광활함과 신비함을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주와 지구는 우연히 생겨난 게 아니라 지적 존재에 의해 정밀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과학자들도 인정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의 자연법칙들은 탁월한 지성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티븐 호킹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법칙들은 숫자의 조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수의 법칙들이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마치 누군가가 정밀하게 조합해 놓은 것 같다.‘

지구의 모든 수치는 현재 상황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생명체가 존재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지구가 지금보다 조금만 빨리 돌아도 지구에는 매일 태풍이 일어나 사람이 살 수 없게 됩니다.

지구 크기가 10%만 작아져도 중력이 부족해 증발한 수분이 우주 밖으로 날라가 지구의 물은 완전히 말라 생물이 살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지구가 얼마나 신비하고도 놀라운 별인지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보면 볼수록 경이로움에 빠져듭니다.

극지방의 오로라라는 환상적이고 신비한 자연현상에 대해서 아실 것입니다.

이 오로라는 태양이 폭발하며 열과 함께 방출되는 방사능을 막아내는 자기장 방패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구가 방사능으로 망가지지 않도록 자기장 커튼으로 막아놓으신 것이죠.

이 오로라가 없다면 지구는 방사능 수치가 높아져 생물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26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 수효대로 모든 별들을 이끌어 내시고 하나도 빠지지 않게 운행하신다고 하시죠.

우주의 별들이 대략 천억 곱하기 천억 개 정도라고 합니다.

바닷가에 있는 전체 모래 알갱이의 숫자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셀 수 없는 숫자죠.

신기한 것은 성경에서 많은 수를 말씀할 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다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 당시는 고작해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이 4천개 정도였는 데 별들을 바다의 모래알과 동등하게 보고 설명했습니다.

허블 망원경과 우주과학을 통해 이제야 겨우 별의 개수를 알아냈지만 이미 수 천년 전에 성경은 별들의 숫자가 모래 숫자만큼 방대하다는 걸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권위 있는 천문학자 재스트로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의 힘만 믿는 과학자들이 무지의 산을 탐사해 막 최고봉에 이르려고 마지막 바위를 힘겹게 기어오르는 순간 그를 맞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거기 올라와 자리 잡고 있던 신학자들이다.’

이 셀 수 조차 없는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도 빠짐없이 불러내시는 하나님을 바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고 계시다고 하신 말씀이 더 이상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죠?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시고 우리 길을 일일이 계획하시고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속에서도 조화롭게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46장4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고 의지할수록 두려움도 걱정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신데 무슨 걱정을 하시렵니까?

이스라엘의 멸망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버리고 비교가 되지 않는우상종교를 쫓다가 타락한 것이죠.

사사기2장9절에서10절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믿음이 자식들에게 전수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4장 6에서 그들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를 한탄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우리의 믿음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말씀을 통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편안한 중에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지금이 어쩌면 우리 인생의 황금기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기쁨으로 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아주 교과서적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공부해나갈 때 성령께서 하나님이 단지 지식이 아닌 실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점점 깨닫게 해주십니다.

우리 평생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도 주님의 옷자락의 한 끝도 채 만져보지 못하고 우리는 천국에서 주님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지런히 하나님을 알라고 호세아서에서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장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 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아는 일에 날마다 마음을 정하고 노력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의 잘못 된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되었던 유대인들은 지금 바벨론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137장1절은 그들의 형편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포로 생활은 이제 70년이 되어갑니다.

이 지독한 압제자 바벨론에서 풀려나 다시 본토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이미 독립과 해방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고 의용군도 무기를 내려놓았을 것입니다.

이젠 대대로 종살이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암울한 세대가 이어질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게 될만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잘 몰랐고 믿지 않았기에 현실적인 판단으로 스스로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이죠.

불신앙의 사람들은 현실만을 의존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29장 10에서 이미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의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실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가능한 환경을 더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만 판단한다면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이 나와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나빠지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희망을 갖기엔 모든 조건이 이미 절망적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형편이 나빠도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형편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아버지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의 현실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역사도 일어납니다.

이들이 결국 어떻게 다시 해방되어 본토로 돌아옵니까?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납득이 안가는 칙령을 내립니다.

유대인들은 본토로 돌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도 좋다는 칙령입니다.

노예가 국가의 재산이던 때 한 민족을 그냥 풀어주고 돌아가라는 지시를 내린다는 것은 합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이해 될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없는 데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십니다.

내 앞에 기대할 만한 아무 근거도 없고 도와 줄 아무 손길도 없다 해도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광야에서 샘이 터지게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숨기고 오히려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내 일엔 무관심하다고 원망합니다.

27절에 이스라엘이 그렇게 말하죠.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고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사실 마음을 낙담케 하는 문제들이 오래 되면 성경의 약속과 축복에 대해 냉소적이 되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병에 시달리고 원하는 일들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 마음이 굳어지고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과 원망이 은근히 마음에 자리잡게 되죠.

이렇게 낙담하고 돌아앉은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7절을 보면 야곱아, 어찌하여 그러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야곱이라고 종종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은 질기게도 이기적이고 결함투성이 인격의 사람입니다.

자기 조상과 꼭 닮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시길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그렇게 부르는 하나님의 목소리에서 진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자기들의 불순종으로 징계 받고 고생의 떡을 먹으며 여전히 회개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호통을 쳐도 모자랄 것 같은 데 그들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은 호통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철없는 자식을 부르는 애틋하고 안타까운 아버지의 음성으로 타이르고 계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괜한 고생을 하고 있는 그들이 안타깝기만 하신 것 같이 보입니다.

피곤하지 않으시고 곤비치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능력의 하나님을 왜 믿지 못하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눈동자 같이 주목하시고 내가 낙심할 때 잔잔히 위로하시며 넘어질 때 일으켜 주시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4백미터 육상 경기에서 미국의 레이먼드는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출발신호와 함께 관중의 환호 속에 맹렬히 달리던 레이먼드에게 순간 허벅지 힘줄이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레이먼드는 다시 일어나 부상당한 다리를 움켜잡고 절둑거리며 트랙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심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경기를 완주하려고 했던 것이죠.

많은 관중들이 안타깝게 지켜보는 가운데 고통에 일그러진 레이먼드는 트랙을 절뚝거리며 뛰고 있었습니다.

그 때 관중석에 있던 한 남자가 트랙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를 막으려 진행요원들이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난 저 아이 애비요.’라고 외치는 그의 말에 길을 열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부상당한 다리의 고통을 참으며 울며 걸어가는 아들의 어깨를 부축하고 손으로는 연신 아들의 눈물을 닦아 주며 함께 걸었습니다.

숨을 죽이고 바라보던 관중들은 결승점에 이른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박수와 환호로 격려했습니다.

레이먼드와 아버지는 그 날 사람들의 마음에 잊고 있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주목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랑이 이렇지 않을까요?

때로 우리가 달리다 넘어지고 돌부리에 채여 생채기가 날 때 아버지의 위로하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우리를 부축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남몰래 우리 눈에 흐르는 눈물을 주님의 상처 난 손이 닦아주셨기에 우리가 비참했던 순간들을 이기고 이 자리까지 온 줄 믿습니다.

현실 속에 갇히고 환경이 나를 종처럼 부리려 할 때 낙심하지 말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일으켜 주시는 능력의 아버지를 힘있게 의지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절망의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 설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도, 하루하루를 절망 중에서 이겨낼 것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할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런 천국을 향해 아직 이 땅에서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도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9절에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고 하시죠.

우리가 인생을 헤쳐 나가는 고민이 무엇입니까?

이 떨쳐버릴 수 없는 피곤함과 무능함이 아닌가요.

그래서 전도서 기록자는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쉬지 않고 피곤하게 무언가를 계속하는 데도 인생에 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일과 공부와 반복해야 하는 일상 속에서 현대인은 다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몸만 피곤합니까?

세상은 날마다 점점 더 많은 정신적인 능력을 요구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계속해서 내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켜야만 생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원치 않는 데 할 수없이 스마트 폰을 사야하고 그걸 또 활용하지 못하면 무능력한 사람이 되버리고 맙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대로 피곤하고 무능력한 우리에게 능력과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일 일에 시달리다 보면 사실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가 지나가버리곤 하죠.

삶이 바쁘고 분주할수록 하나님을 앙망해야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기만 해도 시끄럽던 마음이 평안해지고 슬펐던 마음이 잔잔한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은 말씀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우리에게 있는 소원들을 성취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하며 끝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앙망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도 앙망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걱정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인내하며 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영의 아버지로 모시고 존경과 사랑으로 우러러 보며 기대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피곤한 몸에 새 힘을 주시고 피곤한 환경을 축복의 환경으로 바꿔주실 줄 믿습니다.

무능한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육상선수 이야기 하나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래 전 올림픽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에릭 리델이 영국대표로 100m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금메달이 유력한 그에게 많은 영국 팬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릭은 경기일자가 일요일에 잡혀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주일에는 달릴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경기에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갖가지의 많은 비난여론이 쏟아졌지만 그는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며칠 후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400m 달리기 선수에게 사고가 생겨서 대신 출전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00m 훈련에만 집중했었던 그에게는 불가능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전했고, 놀라운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승리의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리델을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처음 200m는 내 힘으로 달렸고 다음 200m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달렸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눈을 들어 이 아름답고 웅장한 세상을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고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피곤한 삶 속에서 수시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원을 아뢰며 지치지 않는 새 힘을 주시길 기도할 때 우리 모두에게 환경을 박차고 일어날 독수리 같은 성령의 힘과 능력을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2012.10.14. 주는나의산성교회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