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베데스다 못의 기적 (요한복음5장1절-18절)

남수연 2012. 10. 3. 15:53

 

추석명절을 이렇게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보내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믿음으로 예배하러 나온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도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추석은 한 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시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는 풍농제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8월 보름날을 정해서 지킨 것은 신라 유리왕 때라고 하니 거의 2천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죠.

유대인의 명절은 모세의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해 주셨습니다.

약 3500년 전 시작된 것이죠.

유대인의 3대 명절은 유월절, 초막절, 수장절인데 오늘 배경이 되는 명절이 그 중 어느 것인지는 본문을 갖고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모든 명절은 다 예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정해주신 이 명절을 구약시대부터 지켰지만 누구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것들을 조명해주실 때 비로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죠.

오늘은 명절에 일어난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건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실현되는 지 말씀을 통해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환히 비춰주셔서 깊은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길 소원합니다.

 

첫 째로 베데스다 연못의 허상과 실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사건이 일어난 곳은 2절에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기록합니다.

현재 예루살렘 시는 서쪽은 요르단이 동쪽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법상으로 예루살렘은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희한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이 이 땅에 어느 나라에도 속해있지 않다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시의 중심부는 옛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도시이고 그 주변은 현대적인 신도시가 발달해 있습니다.

현재 성곽 안에 있는 구 예루살렘을 드나드는 문은 총 8개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문 그대로는 아니고 재건 된 것들입니다.

그 중 황금문이라고 불리는 가장 아름다운 동쪽 문은 봉쇄되어 통행할 수 없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이 문을 통과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문이죠.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선지자 에스겔에 의해 이 문은 닫힐 것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44장1절입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대로 이 황금문이 굳게 닫히고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전쟁의 역사 속에 정복자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지만 그 누구도 이 황금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없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에 메시야가 오셔서 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을 지금도 대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2절에 나오는 양문은 7개의 문 중 하나로 옛날에 성전 제물로 사용할 양들을 끌고 들어갈 때 주로 사용 된 문이라 양문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병고침의 사건이 양문 곁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죠.

어쨌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 사건에 대해 풍성한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수록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1850년 무렵에 발굴되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물은 없지만 2절에 기록된 다섯 개의 정자가 있었던 기둥들의 일부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본문에서 병자들은 이 못에서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젔는 데 그 때 제일 먼저 물에 뛰어 든 사람이 병이 낫는다는 것이죠.

이 못이 간헐천이라 때때로 치료성분이 있는 온천이 솟아올랐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연못을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맹인, 다리 저는 사람, 중풍병자, 각종 불치병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매일 물이 움직일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제가 처음 오산리기도원에 가 본 때가 한 25년 전인데 당시 기도하러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에 놀랐지만 한편 강대상 밑에 깔아 놓은 수많은 이불들을 보고도 놀랐습니다.

나을 때 까지 장기 체류하는 병자들이 강대상 바로 앞에 누워서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지금 수많은 환자들이 침상을 갖다 깔고 눌러 살고 있는 모습이 쉽게 그려지죠.

오늘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멍이 든 유대민족에게 명절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나라건 명절이나 축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고단하고 힘든 인생 중에서 이 날만은 누구든지 억지로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는 것 아닙니까?

비록 가난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며 가족들과 함께 기쁨으로 명절을 지키는 것이죠.

그러나 베데스다의 사람들은 명절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명절조차 연못을 떠나지 못하고 물을 응시하고 있어야 하는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가장 가혹한 인생을 사는 셈입니다.

이 딱한 모습이 인간들의 속사정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이 어쩌면 베데스다에 모인 사람들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가능성을 어쩔 수 없이 붙들고 살아 가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빽도 없고 능력도 없이 무한 경쟁 사회 속에 부대끼며 언젠가 내게 올지 모르는 행운을 무작정 바라는 것이죠.

살얼음판 같은 조심스런 상황 속을 마음 조리며 사는 날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미 떠나버린 애인의 마음을 붙잡으려는 안간힘처럼 가능성도 없는 일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게 세상입니다.

매일 피와 눈물을 쏟아 부았던 가게를 사력을 다해 붙들고 있다 5년 안에 폐업하는 창업자가 50퍼센트가 넘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최근 뉴욕의 생명 연장 연구소에서 45세 이상 된 사람 25,000명을 조사했더니 겨우 20% 만이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뉴저지 스탠다드 오일 회사에 근무하는 간부 340명 중 235명이 건강에 이상이 있고 그 중에 192명은 일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의 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 중 12살에서 20살까지 청소년이 약 800만 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약 40만 명이나 살인, 강도, 절도, 음주, 폭행 등으로 경찰 신세를 졌다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전 생애를 죄로 인한 다양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모인 베데스다는 과연 자비의 집일까요?

중병에 모든 재산과 행복을 잃고 마지막 희망으로 베데스다를 찾아 온 병자들에게 기적의 순간 물 속으로 들어갈 확률은 사실 제로입니다.

그들이 영원히 베데스다 연못에 몸을 담글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일입니다.

자비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베데스다는 그냥 허상일 뿐이고 중환자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의 장소였던 것이죠.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한 ‘나는 너를 아느니라’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곱추였던 한 남자가  연못가에서 자릿세를 뜯어먹고 살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렇죠. 베데스다 주변엔 분명 자릿세 뜯어먹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환자들을 바가지 씌워 빵이나 생필품을 파는 사람들도 붙어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인간은 다 베데스다에 앉아 절망 같은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고난에 지쳐 누워있는 사람이고, 생계를 위해 불행한 사람들 틈에서 치열하게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베데스다는 결코 자비의 집이 아닌 우리 인생의 한복판과 같은 곳입니다.

누구도 떠날 수 없는 그 곳 절망의 한 복판에 오늘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곳 베데스다를 찾아와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베데스다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지난 주에 드라마 골든타임이 끝났는 데 수술 뒤 깨어나지 않는 환자를 살펴보러 병상을 둘러보던 걱정스런 의사들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실제는 잘 그렇지 않죠?

예수님께서 병에 찌들어 누워있는 환자들의 모습들을 그런 눈으로 둘러보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주님은 38년 된 병자를 부르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은 왜 그 많은 병자 중에 꼭 이 한 사람을 택하여 구원하신 것일까요?

모든 병자들을 고치실 능력이 예수님께 있으셨는데요.

그 이유는 이 치료의 기적이 단지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고쳐주시던 평소의 치료 행위와는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꼭 이 한 사람을 택하신 이유를 말씀 속에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6절 뿐입니다.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 된 줄 아셨다는 것입니다.

병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곧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그냥 두면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죽을 사람인 것이죠.

다른 맹인이나 다리 저는 사람들과는 다른 절박한 죽음과 직면한 사람입니다.

죽음을 맞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영원히 버려질 심판에 처한 인류의 대표자가 바로 38년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죄로 인해 소망은 끊어지고 온갖 저주와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화려한 문명과 풍족한 의식주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베데스다의 환자와 같겠냐고 생각하십니까?

이 땅에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축복을 누리며 위협과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몇 퍼센트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굶어 죽게 될 위기 처한 사람만 10억명을 넘고 있습니다.

가뭄과 기상이변으로 식량 가격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어 사태는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이미 옥수수와 밀 가격은 25% 올라갔지만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21년까지 국제 곡물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전쟁과 인권유린과 질병과 가정문제와 사회적 범죄들 중 무엇에든 발목이 잡힌 채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오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이런 위기에 처한 절망 속의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연못 주변의 그 많고 많은 병자 중에서 그를 택하신 것처럼 나를택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은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다가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의사가 병 고치려 온 환자에게 당신 병 낫길 원하냐고 묻는 것 처럼 어색하죠?

영적인 죽음으로 구원에 대한 아무 관심도 없이 냉담한 죄인들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래 된 질병을 포기하고 사는 경우 많습니다.

그렇게 38년의 세월이 흐르고 병자에게 남은 것은 완쾌에 대한 희망이 아니고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원망과 집착 뿐입니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개를 묶어두고 전기로 충격을 주면 개는 도망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개는 더 이상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개를 풀어놓고서 같은 실험을 하면 개가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무기력이란 이렇게 안 될 상황을 겪는 가운데 우리에게 학습됩니다.

병자에게 두 발로 힘차게 땅을 디디는 생각은 벌써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들도 내 힘으로 도저히 교정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속에서 지내다보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몇 번 시도해도 결국 기대했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재 상황에 맞춰 적응해버리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노력을 조금 하다 공부가 잘 되지 않으면 자신을 그 수준에 맞춰버리는 걸 많이 봅니다.

이 무기력과 죽음에 익숙해 가는 병자를 향해 예수님은 삶에 대한 소망을 물으십니다.

어려운 환경과 불가능한 조건들로 막혀있는 상황 속에 무기력해져 있으십니까?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믿음으로 소망을 붙들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병을 낫고자 하는 본래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지 못합니다.

불가능한 현실만 늘어놓으며 안 될 이유에만 집착합니다.

그에겐 병을 이기고 치료받기 위해 물이 동할 때 그를 물에 넣어 줄 가족 한 명, 친구 한 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안 될 상황, 불가능한 조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런 그를 향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미 우리에겐 이런 기적이 일어난 줄 믿습니다.

지금 내 환경이 어제와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옆구리에 가시 같은 문제가 남아있다고 내게 아무 일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린 영적으로 거듭났고 우리를 향한 꿈과 계획을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도 아무리 중한 병이라도 하나님께는 다 똑같이 가능한 일인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있는 모든 베데스다를 떨치고 일어날 믿음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해답을 찾을 길 없는 환경의 베데스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의 베데스다, 질병의 베데스다에 주님이 찾아오시길 축원드립니다.

미동치도 않는 환경만을 바라보며 기댈 데 없는 헛된 곳에 희망을 가졌던 눈을 돌려 완벽한 치유와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한다면 반드시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에 일어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읽어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띄입니다.

죽을 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병자 본인이 주님께 감사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에 펄쩍 뛰며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며 고백이라도 해야 할 텐테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복음서에 주님이 고쳐주신 병자들 중에 은혜에 별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합니다.

문둥병을 치료받고도 감사하지 않았던 나병환자들이 9명이나 있었죠.

본문에서 우리는 이 38년 된 병자 역시 꽤 뻔뻔한 죄인이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를 보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곁을 떠난 사람들을 다 싸잡아서 원망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가장 오랜 병이 걸린 자기가 들어가야 맞는 것인 데 불공평하게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먼저 들어간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여긴 자비의 못이 아니라 정글의 법칙이라고 푸념하는 것이죠.

자기의 병이 자신의 죄 때문에 왔다는 자각도 없이 저주받은 신세를 한탄하고 사람들을 원망하는 영락없는 죄인입니다.

14절에서 그의 오랜 중병이 그의 죄와 연관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의 병은 억울하게 생긴 병이 아니고 그냥 죄를 짓다가 생긴 불치병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먹었다면 아마 간경화나 그런 병이 걸렸을 테고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면 그로 인한 병이였을테죠.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인격적으로도 병든 사람이고 인간적인 매력도 없고 감사도 모르는 얍삭한 죄인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착해서도 아니고 믿음이 있어서도 아니고 지은 죄를 회개했기에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 앞에 나와 구원받은 우리도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뻔뻔한 죄인이었을 때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내게 무슨 착한 구석이 있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 비해 주님을 잘 믿을 것 같은 영성이 보여서도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욕심과 죄성에 이끌려 내가 지었던 모든 죄와 죄의 심판으로부터 댓가없이 은혜로 나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 아플 때 밤새 들락거리며 물수건 갈아주고 뜬 눈으로 새우고 나면 언제 한번이라도 애들이 엄마 밤새 고생하셨어요, 고마워요 이런 말 하던가요?

당연히 받을 간호를 받았다 생각하고 우리는 열 내려 아침에 학교 가는 모습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하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덮으시고 아무 생색도 내지 않으신다고 우리가 구원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요한사도는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 치료를 받은 다음도 여전히 그의 본성적인 죄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예리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고침을 받고도 뻔뻔한 그의 행동에서 울화통이 터졌을지도 모릅니다.병자의 행동을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기가 자던 더러운 이부자리를 둘둘 말아 어깨에 매고 나가다 유대 종교인들에게 걸렸습니다.

안식일에 짐을 나르는 것은 랍비들의 법으로 금지된 일입니다.

공공연한 장소에서 안식일의 규례를 어긴 것이 발각되었으니 이제 율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될지 모르게 된 것입니다.

환자는 병은 나았지만 이제 안식일을 어긴 문제로 또 다른 곤경에 빠지게 된 것이죠.

유대인들은 자리를 옮기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 추궁했지만 병자는 주님에 대해 아는 게 없었습니다.

완쾌 된 몸을 살피고 기쁨으로 뛰고 황급히 자리를 거두느라 기적으로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을 놓쳤던 것이죠.

14절에 보면 예수님과 환자가 성전에서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환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찾아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곤란을 벗어나려고 열심히 주님을 찾아다니는 이 사람의 마음을 아셨지만 기꺼이 그에게 나타나 주십니다.

병자는 반색을 하며 주님의 이름을 물었을테죠.

마치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유대인 손에 넘겨 준 가룟 유다와 다를 바 없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그가 유대인에게 돌아가서 자기에게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병을 고쳐주고 자리를 들고 가라 한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는 이제 위기를 벗어났고 고침 받은 건강해진 몸으로 새로운 출발을 향해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제자 요한이 당시엔 울분이 났지만 후에 죄인의 목숨과 맞바꾼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주님이 지실 곤경을 알지도 못하고 얍삭하게 주님을 이용하는 죄인과 이 모든 것을 아시며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 본문에 흐르는 은혜의 물결인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 도움을 좀 받아볼까 몸이 달아서 주님을 찾지만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지나가면 어느새 관심은 세상 속으로 돌아가 버리는 우리의 모습도 볼 수 있죠.

미스코리아 이하0씨 어머니인 이대국악과 교수인 문재0교수님이 며칠 전 그런 간증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딸을 둘 낳고 매일 기도하며 매달리며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해서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그의 인생에서 빠졌던 그 하나를 딱 채우니 정말 더 이상 부러울 것 없는 삶이 되었습니다.

더 채울 것 없는 인생은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인생보다 더 위험한 인생입니다.

그러고 나니 서서히 교회도 멀어지고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귀하게 얻은 아들이 원인모를 발육부진으로 성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병원에선 병명도 낯선 케닐헤톤뇨증이라고 판명했고 원인을 몰라 치료도 안되는 병이었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서원을 생각한 문교수는 하나님 앞에 돌아와 울며 회개하고 예가0이란 국악찬양단을 조직해 찬양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물론 아들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죠.

우리 마음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믿음으로 인해 시련이 오거나 세상의 즐거움에 마음을 뺏기면 매정하게 돌아서고 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명절에 얼굴 한번 보이고 서둘러 돌아갈 짐을 싸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으로 그렇게 돌아서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요.

 

마지막으로 14절에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봅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진 그에 대한 사랑이 아니셨을까요?

완쾌 된 뒤의 그의 행동을 보면 사람이 바뀌기가 참 힘이 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다 조금씩 양심과 도덕적인 법을 어기고 살 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죄는 확신하건 데 우리의 인격을 볼품없이 깎아 먹습니다.

작은 거짓말 하나도 발각되고 나면 얼마나 우리 인격이 평가절하되는 지 모릅니다.

다운 계약서 하나 때문에 대통령 후보자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할 때 평소 자신의 입으로 말하던 지고지순에 걸맞지 않은 세속적인 행동에 얼마나 수치스러움을 느꼈겠습니까?

예수님이 치유 받은 병자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한 것은 도덕적인 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육체적으로 세가지 면에서 가장 조화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늘 평안 속에 건강한 영적 생활을 하고 도덕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건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위해 몸을 잘 돌봐야 하는 것이죠.

갈라디아서5장13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죄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줍니다.

죄를 이기기 위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서 순종하고 기도로 우리 삶을 인도해주시길 바라는 경건생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평신도로 주님을 섬긴 기간이 25년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며 꾸준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개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장생활을 잘 감당할 지혜를 주셔서 큰 과오 없이 보람있게 퇴직하게 해 주셨습니다.

가정생활에 때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안함 가운데 인도해 주셨습니다.

평신도의 삶이라고 해도 나와 가족들의 믿음과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위해서 기도와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 가는 게 너무 중요한 것이죠.

믿음의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청년들도 꾸준히 교회중심의 생활과 경건생활을 충실하게 해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환경을 인도해 주셔서 이 땅에서 마땅히 누리며 살 산업을 풍성하게 주실 줄 믿습니다.

자녀들도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가르치면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자녀들의 삶 또한 하나님께서 의와 평강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환자의 병을 고쳐주시며 하신 말씀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 해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의 성향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죄의 성향은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갈라디아서 5장에서 하신 말씀을 이렇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

 

말씀을 맺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곤고한 인생에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절망의 베데스다에서 믿음으로 일어나 능력과 소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소원을 이루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의 죄성을 잘 관리하고 다스려 항상 고요하고 단정한 가운데 평강과 축복의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2012.10.7. 주는나의산성교회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