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마름과 갈증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류시화시인의 그대가 그립다란 유명한 시가 있죠.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연인을 향한 깊고도 간절한 사랑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목마름이 담겨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옆에 있어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조차 모르는 인간의 목마름이죠.
오늘날 물자는 풍족하고 정신을 채워 줄 지식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홍수에 마실 물 없다 라는 말이 있죠.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 땐 우리는 오히려 아무 것도 기대할 게 없었습니다.
비가 쏟아지면 뛰어나가 빨래 걷고 흩트러진 신발들을 마루 밑에 밀어 넣고 처마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무심히 바라보던 시절엔 기대할 게 없어서 목마름도 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마치 모든 것을 다 채워줄 것 같은 이 풍요한 세상에서 인간이 더욱 소외되고 외로움과 갈증을 느끼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들의 목마름이 단지 물질과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목마름은 이 세상의 것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수를 찾으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목마르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오늘 내용은 유대인의 큰 명절 중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장의 2절을 보면 배경은 유대인의 명절 초막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설날과 추석 명절이 있듯이 유대인에게는 삼대 명절이 있습니다.
유월절과 초막절과 수장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거룩한 백성으로 지켜야 할 각종 법령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며 이 세 가지 명절을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명절이죠.
이 명절들은 모두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인간의 구원을 모형으로 보여주기 위해 정해주신 명절입니다.
그 중 하나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막에서 장막을 치고 거주하던 조상들의 고난에서 현재의 안식을 주신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죠.
이 명절엔 모두 예루살렘에 올라와 각각 야외에 천막이나 나뭇가지로 허름한 움막을 짓고 7일을 지내야 합니다.
초막절 행사 중 대제사장은 실로암이라는 연못에 가서 금주전자에 물을 담아와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때 제사장은 구약시대 이사야선지자의 예언 부분을 읽습니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광야생활 중 반석을 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해 조상들을 먹이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의 물을 주실 것을 대망하는 의식이죠.
왜 바로 이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죠?
광야의 반석에서 솟아난 물도, 초막절에 부은 물도 바로 인류를 살리실 영원한 생수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본문을 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째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다들 인생에서 축제가 있으셨죠?
한껏 들떠 있던 어린 시절 명절도 좋습니다.
우리 어렸을 땐 참 즐길게 없어서 그랬는 지 가난한 살림에 크게 차릴 것도 없었는 데 왜 그렇게 명절을 기다렸나 모릅니다.
추석을 기다리고 설날을 기다리는 게 그렇게 설레고 기대가 컸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뭘 기다리는 게 없더군요.
예전엔 학교에서건 교회에서건 행사 하나에 얼마나 온 정신을 쏟고 집중했는 지 축제나 수련회 끝나면 아쉬움에 우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제 일주일 간의 흥분과 즐거움의 끝이 왔습니다.
돌아가야 할 일상엔 어깨를 짓누르는 생활고와 날마다 똑같은 지겨운 힘든 노동의 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단에 물을 길어다 붓는 제사장의 화려한 옷자락과 황금 주전자에 모두가 함성을 질렀지만 모든 행사가 끝나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텅비고 갈증이 목을 조여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축제의 끝, 휴가의 끝을 우리가 다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서로를 향해 웃지만 그 마음 속에 텅 빈 허무를 감추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길에 서서 한 명 한 명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목마름은 일상에서도 늘 우리와 함께 합니다.
힘든 살림살이에 한 숨 돌릴 때도 정신없이 하루 업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뿌듯함 보다는 텅 빈 허무가 머리를 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전도서1장8절은 말씀하시죠.
만물의 피곤함을 인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도다
가진 것이 없어 내일이 걱정되는 가난한 사람만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모자라서 느끼는 갈증이라면 더 가지면 될 거 같은 헛된 기대라도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갖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다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은 더욱 인간을 곤혹스럽게 합니다.
이어0 박사가 70이 넘은 나이에 세례를 받자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나이에 뭐가 답답해서 세례 받는 겁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예를 달라면서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기고 돈 벌려고 애쓰니까 돈도 생겼소.
그런데 어느 날 너무도 외로워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도, 좋아하는 책을 봐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나 혼자구나라고 느껴졌소.
절대고독을 느낄 때, 내 영혼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낄 때 그럼 인간이 하나님 아닌 누구에게 가야한단 말이요?”
그는 나이가 들고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다 누렸을 때 자기가 진실로 무엇에 대해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는 지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갈증이고 창조자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명절의 화려한 종교 의식과 떠들썩한 분위기에 자신을 좀 채워보려 했던 가련한 사람들을 향해 목마르지 않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날 물자가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허겁지겁 무엇으로라도 내 인생을 채워보려는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죠.
여전히 목마르지 않느냐? 내게로 와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셔라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주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목마를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 공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그 곳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한없이 갈증만 느끼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간 사람만 그 영원한 갈증이 해소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은혜 속에 사는 사람에게 목마르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성공자이든 역경 속에 고난을 당하며 힘든 인생을 가는 사람이든 가진 것이 없는 자이건 분명 인생에 갈증을 느낀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자기 인생에 무언가 빠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수 박진0씨가 힐링캠프에 나와 한 말이 그것이죠.
자기의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는 데 끝까지 채워지지 않은 1%가 있었다고요.
1%가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 빠진 1%가 나머지 99%를 허무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자리 1%가 채워질 때 나머지 99%에 비로서 참된 의미와 행복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우리에게 주실 구원입니다.
성경에서 생수는 구원과 성령을 상징합니다.
육체의 삶을 위해서도 물은 절대적 가치입니다.
지금도 세네갈이나 우간다 같은 아프리카지역에서는 어린이들이 흙탕물 40리터를 길러 매일 왕복4시간을 맨발로 걸어서 다닌다고 합니다.
우리의 식수도 안전하지만은 않습니다.
최근 AP통신이 조사결과 미국 주요 도시의 식수가 각종 의약품에 오염됐다고 보도합니다.
식수에서 항생제와 항우울제 심지어 성호르몬까지 검출됐다고 합니다.
캐나다 식수에서도 9가지 의약품이 검출됐고, 인도에서는 고혈압, 심장병, 임질 등 21가지 질병의 약물이 나왔습니다.
식수가 약물로 범벅이 된 까닭은 현대인의 약 복용이 늘었고, 그 약물이 하수구로 흘러가기 때문이죠.
우리가 먹는 약 성분의 90%는 배설을 통해 다시 몸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하수처리 과정에서 약물은 걸러지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물고기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생태계의 보고가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의 안전도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예언되길 마지막 때 식수원의 오염으로 3분의1 인구가 죽고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 녹조현상 같은 걸 보면 식수문제에 대한 염려가 곧 현실이 될 것을 예견할 수 있죠.
건강한 물이 우리 몸에 생명을 주듯 우리의 영혼이 살려면 오늘 주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생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생명의 물로 채워주시기 위해 우리를 초청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 앞으로 모두 나가 영혼의 모든 갈증을 해결 받을 생명의 물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영원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까?
3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인생의 갈증을 풀어줄 유일한 생수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또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믿는다는 것은 막연한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짜로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고 그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말합니다.
믿음은 절대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이야 말로 그 무엇보다 실제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은 인격적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지 전혀 말씀과 관계없이 살고 있는지를 보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살펴보고 신뢰감을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생각과 지각을 동원해서 결단하는 의지적인 행동인 것이죠.
말로는 상대를 믿는다 하고 자신을 맡기지 않는 것이 불신으로 가득한 우리 사는 세상입니다.
영화 도둑들을 보았는 데 아무리 도둑들이라지만 정말 믿을 놈은 하나도 없더군요.
다이아몬드하나를 훔치려 뭉쳤지만 하나같이 각자의 꿍꿍이를 갖고 모였으니 서로를 이용해먹을 생각 뿐이고 아무도 서로를 믿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실 우리가 누구를 믿고 의지 할 수가 있습니까?
또 누구에게 나를 믿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식에게 아빠 엄마만 믿고 따라와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 한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는 게 연약한 인간의 한계임을 너무나 잘 아는 데 누구에게 나를 믿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능력을 가진 예수님만이 오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나를 믿으라고 초청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 인생을 맡기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주님을 영접할 때 생수 되신 성령께서 우리 죽은 영을 살리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마음의 문 밖에 세워두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 이 자리에 인도되었지만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고 마음을 열고 모시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것은 손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야 말로 나를 창조하셔서 이 땅에 보내신 분이고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이 나를 가장 복되게 하는 매뉴얼을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맡기십시오.
성도님들 아직까지 자신의 힘으로 여기까지 이루고 오시느라 참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돌아보면 눈물도 있었고 절망도 있었고 주저앉고 싶은 것도 참고 몸을 일으키며 여기까지 오느라 우리 모두 다 참 많이 수고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동안 우리가 내 인생을 맡아서 꾸려왔지만 뭐 크게 잘 된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온갖 고생은 태어나며 죽을 때 까지, 강보에서 수의까지 계속입니다.
앞으로도 절대 내 힘으로는 이 고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청년들 지금 가진 스팩과 능력으론 부족합니다.
그것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 이룰 수 없습니다.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소망대로 직업을 구하고 믿음의 반석 위에 흔들리지 않는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길 원하시죠?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께 인생을 맡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항상 불안하고 쫒기고 허덕이는 갈한 심령을 은혜의 생수로 먹여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환경을 열어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주 안에서 바라는 모든 꿈을 이루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의 물을 얻을 뿐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성령님의 복을 받는 줄 믿습니다.
매일 목이 타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지치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 주시는 성령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며 모든 문제를 상담하시고 지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듯이 매일의 생수의 강이 콸콸 흐르는 생기 있는 삶도 역시 매일 주님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삶에서 황폐한 느낌이 찾아오는 것은 그 순간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떼는 순간 즉시 피곤함과 낙심함에 빠지게 되죠.
그러면 혈기와 우울증, 짜증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추스르기가 점차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 무의식적인 슬픔과 좌절과 공허감이 밀려온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샘솟는 풍성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매순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생명수 강가에서 평안과 안락을 누리는 것은 천국에서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삶이 아직 고단하기에 예수님께서 매일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마음을 씻어주실 성령님의 동행을 약속하신 줄 믿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지도자 5위에 뽑힌 조이스 마이어 목사님 도 어떤 날은 하나님 도와주세요를 마음 속에 천 번을 되뇌이며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생명수의 물줄기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하며 날마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마이어 목사님 처럼 틈틈이 하늘을 향해 주님 도와주세요. 길을 열어주세요, 마음의 평정심을 주세요. 솔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런 기도를 아무리 들어도 실증내지 않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사야58장11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초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40절부터 52절까지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초대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논쟁이 붙은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2천년이 흘렀지만 복음을 접했을 때 보이는 요즘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믿는 성도들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들은 인류에 큰 감화를 준 유대인 종교 지도자 정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얘기만 꺼내도 진저리를 치고 어떤 사람들은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봅니다.
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주장과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우리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의 행적과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신 말씀인 성경입니다.
요한복음5장3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알고 깨닫는 만큼 풍요롭고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던 성경을 엉뚱하게 적용해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단정 지어 버립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님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자랑으로 삼았던 그들에게 성령이 계시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기초적인 말씀들을 차곡 차곡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랜 신앙생활에도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마음에 부딪히는 게 없고 설교를 들어도 가슴에 닿지 않고 귀에서만 울린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말씀을 비춰주시면 성경의 권위와 정확함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오실 예수님 한 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전율을 느끼게 되죠.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오심에 예언 된 말씀들을 몇 군데만 보십시오.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에스겔 선지자가 기록합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서로 알지도 못하던 시대가 다른 선지자들이 한결 같이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마다 예수님의 오심이 예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41절에 보면 예수님을 불신하는 바리새인들이 메시야의 출생지를 거론하며 예수님을 틀렸다고 이야기하죠.
그것은 그들의 오류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 7백년 전 사람인 미가라는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근거한 것입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우리는 복음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후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가셔서 사셨기에 그들은 주님을 갈릴리 출신으로만 알았던 것이죠.
천한 목수출신 메시야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주님에 대해 알아 볼 생각도 않고 교만하게 주님을 판단합니다.
성경에는 분명 이방의 도시 갈릴리가 영화롭다는 예언도 있고 메시야의 초라한 외모와 고난도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은 주님의 진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46절을 보면 예수님을 체포하러 갔던 유대당국의 병사들이 왜 빈 손으로 돌아왔냐는 바리새인의 질책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 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예수님께서 유창하게 웅변적으로 말을 잘하셨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진실을 느꼈던 것이죠.
왜 사람의 말에 힘과 권세가 없습니까?
인간의 모든 말이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이익을 위한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다 속셈을 갖고 말하다 보니 말에 진실성도 없고 남을 감동시킬 수도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마음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도 부끄러움이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를 향해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서 값없이 주는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할 때 그 분의 진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어와 밥먹으라고 소리지르는 엄마를 의심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우리 엄마니까 내가 밥 먹고 건강한 것 외에 다른 무슨 의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기를 얻으려는 마음도 없고 왕으로 추대 받으려는 마음도 없으십니다.
단지 어서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싶은 간절한 사랑만이 주님의 외침 속에 있기에 그 음성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예수님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정작 십자가 위에서 자신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 이 영생의 물을 구할 때 주님은 기뻐하시며 우리 안에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의 강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갈증과 고독과 삶의 두려움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의 휴식은 더 달콤하고 우리 가정은 더 풍성한 기쁨으로 완전해 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더 든든하게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힘들고 어려운 난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주님을 확신하며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며 순종하는 믿음으로 매일 생수의 강이 생기있게 흘러넘치는 복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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