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교회의 초청에 소중한 시간을 내서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예배가 좀 낯설고 어색하시겠지만 순서대로 참여하시다보면 교회 밖에서 몰랐던 평안과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되리라 믿습니다.
초대를 거절 못해 나오신 분도 있으시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고 너무 관심이 많으셔서 이 곳으로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오늘 정말 큰 결심을 하고 귀한 시간을 내서 참석해 주셨기에 제게도 큰 부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현재 구글의 인터넷 검색순위 1위를 지키고 있는 검색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오늘 읽은 본문인 요한복음3장16절이란 단어입니다.
단 하루 동안 무려 1억2천명이 이 단어를 검색했다고 합니다.
당분간은 이 기록이 깨질 가능성은 없다고 합니다.
이 검색어의 열풍 뒤에는 요한복음3장16절의 사나이라 불리우는 팀 티보라는 미식축구선수가 있습니다.
기적의 사나이라 불리며 플로리다대학을 승리로 이끌었고 약체인 프로팀에 입단해 역전으로 우승을 이끄는 선수입니다.
그는 햇빛 반사를 막기 위해 눈 밑에 칠하는 아이블랙 위에 흰 글씨로 요한복음 3장16절이라 쓰고 경기를 합니다.
그러나 프로 협회에서 티보선수의 얼굴 문자를 금지시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이제 한쪽 무릎을 세우고 기도하는 골세레머니를 하는 데 최근엔 그의 기도세레머니를 따라하는 열풍이 또 불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1월 우리가 잘 아는 한국계 하워즈선수가 속한 피츠버그팀과의 경기에서 약체인 티보선수 소속팀이 연장까지 가게 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연장 11초만에 티보선수의 활약으로 그의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전 미국이 발칵 뒤집히는 순간이었죠.
그 날 뉴스에서 신기한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경기 중 그가 공을 던진 총 거리가 316야드, 평균거리 31.6야드, 경기 종료 순간 시청률 31.6퍼센트. 무슨 숫자의 조합인지 아시겠죠?
그의 얼굴에 기록하지 못하게 한 숫자가 TV화면에 나타나는 순간 요한복음3장16절이란 단어는 순식간에 검색어 톱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한 젊은 풋볼선수가 자신의 경기력보다 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그 성경구절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만일 성경 중에 단 한 구절만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기독교는 아마 이 구절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이 말씀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첫 째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이 말씀의 당연한 전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죠.
인간에게는 태어난 이상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이 모든 우주 만물과 나란 존재가 어떻게 해서 있게 됐냐는 것입니다.
이 숙제에 대한 해답으로 사람들은 창조론과 진화론 중 한 가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최근 진화론 문제로 과학계와 교육계가 다소 시끄럽습니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우연히 생명이 발생하고 진화해서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셈이죠.
창조론을 믿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믿어야 하는 게 진화론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많은 과학적 오류를 가진 가설입니다.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우연히 생겨났다는 진화론의 생명기원은 과학의 법칙에 위배됩니다.
파스퇴르박사의 실험에 의해 이미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부터 이어진다는 법칙이 확립되어 있습니다.
어찌 어찌해서 물질은 만들어진다 해도 생명은 절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또 한 종류에서 여러 종으로 진화되었다는 것 역시 생물학적 법칙에 위배됩니다.
현대 생물학에서 정의하는 종은 생식적으로 격리되어 다른 종과는 유전자의 교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고양이는 고양이 개는 개, 더 이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종류대로 생물을 만드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숫말과 암당나귀의 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자인 노새를 만들어내죠.
그러나 노새는 새끼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노새를 얻으려면 매번 교배해서 얻어야 합니다.
한 조상에서 물고기도 나오고 화초도 나오고 가축도 나오고 원숭이가 나오고 그것이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생물화석의 증거를 보아도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되어가는 과정의 화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고민입니다.
요즘 진화의 근거로 여겼던 시조새화석을 과학교과서에서 삭제하자는 논란이 있죠.
시조새 화석은 공룡처럼 이빨과 앞 발톱이 있는 데 몸통과 꼬리에는 깃털이 있는 희귀한 새의 화석입니다.
이거 하나를 가지고 도마뱀이 새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근거가 부족하니 삭제하라는 것입니다.
시조새는 그냥 처음부터 그런 형태로 창조 되었다 멸종 된 조류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창조론을 믿으면 마치 비과학적인 무지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아 위축되는 데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비과학이 아니라 초과학입니다.
이 세상은 과학으로 다 분석할 수 없는 정신세계와 초자연적인 영역이 더 많습니다.
진화론에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그 결과가 허무주의로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명한 진화론자 스티븐 핑커는 진화론적 사고가 당신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물었을 때
‘그럼요, 내 자신에 대해 전혀 진지해지지 않게 되죠.’
‘나는 왜 존재하는가 라고 물으면 아무 이유도 없다라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결과는 인간존엄성의 파괴, 가치의 상실, 허무주의라는 결론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멘붕입니다.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은 평생을 갖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다 죽었습니다.
매끼 식사 후엔 먹은 것을 다 토하는 희귀병에 심장병, 두통과 정신분열증과 건강염려증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사랑하는 여덟살 난 딸을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자신이 존재조차 부인했던 하나님을 불러내 원망하는 게 인간의 한계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인간에게 인생의 의미도 목적도 안전한 피난처도 없습니다.
마치 부모를 잃고 타향살이를 하는 고아와 같이 외롭게 홀로 서서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의 품에 닻을 내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자신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똑똑히 기억합니다.
태어난 이유도 살아가는 목적도 죽음 뒤에 어떤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지도 모른 채 막막함과 혼돈 속에서 죄와 섞여서 살았던 때를 분명히 기억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나의 일생과 영혼을 능히 책임질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알았을 때 영혼의 고통스런 방랑은 끝이 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있다고 믿냐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20대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 30년이 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존재를 있다고 가정하며 이렇게 긴 세월을 무턱대고 믿을 만큼 인간이 어리석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도 아니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교회에 오게 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은 날이 갈수록 점점 확실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운동도 좋은 습관도 처음엔 열심히 해보다 얼마 안 가 시들해지다 그만두게 되지 않습니까?
평생을 하나님을 믿는 것에 헌신하고 그것도 부족해 귀한 자식들에게 하나님 잘 믿으라고 신신당부하고 죽는 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와 우리 인생을 움직이고 계신 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는 오늘도 삶에서 느끼고 체험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영혼의 아버지를 인정하고 그 품에 안연히 거하며 인생을 기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는 그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란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은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 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을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보냄을 받고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자하나님만이
아들을 주고서라도 구원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그 외면할 수 없는 사랑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부모 되신 성도님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 자식을 내 놓을 수 있습니까?
언젠가 가수 0진아씨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그 아들 이0씨의 노래를 부르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노래를 다 부른 0진아씨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이런 존재입니다.
심지어 치매에 걸린 자기 때문에 자식에게 짐이 되는 걸 괴로워하던 한 노모가 아파트에서 자살한 안타까운 사건이 보도 된 적도 있습니다.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때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부를 할 때 사람들은 적당한 액수를 정합니다.
어느 한도 이상은 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자식을 위해 돈을 쓸 데 아깝다는 생각해보셨나요?
돈이 없어서 문제지 자식 앞 날에 도움 된다면 뭐가 아깝겠습니까?
당장 자신의 틀니하려고 모은 돈이라도 자식이 차 바꾸는 데 모자란다고 하면 내 주는 게 부모의 자식 사랑입니다.
이런 귀한 자식을 부모가 누군가를 위해 죽게 내어 줄 수 있습니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또 다른 못난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일지 모르죠.
언젠가 작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큰 아들의 간의 일부를 이식하게 된 부모의 사연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간경화로 죽어가는 작은 아들 때문에 마음이 타들어 가던 부모는 결국 동생에게 간을 이식하기 위해 큰 아들을 수술대에 뉘여야 했습니다.
작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큰 아들의 희생을 허락한 부모는 허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군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토록 사랑한 유일한 아들을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하신 것은 이 땅에 죽어가는 수많은 또 다른 자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우리를 그 분의 형제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가 가진 무언가를 좀 알겨먹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이 만물을 우리를 위해 창조해주시고 그것도 부족해 그 유일하신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더 좋은 천국을 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뭐하러 의심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아버지는 독생자를 희생하셨고 그 아들의 죽음이 헛되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바로 우리가 아들과 맞바꾼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믿는 우리에게 살아가는 동안 구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다고 로마서5장32절은 약속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약속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리라입니다.
본문은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 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덕망 있는 학자고 정치인이었으며 게다가 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당시 유대사회 고위층이 적대시하던 예수님을 한 밤중에 몰래 찾아온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그에게도 풀리지 않는 답답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할 때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하는 것부터 시비가 붙지만 이스라엘에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국가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께 선택 받았다는 자부심은 지금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깊은 내면에 내세와 구원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에 속해 살아가지만 사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깊숙한 내면에 다 있습니다.
죽은 다음 내세가 과연 있는지, 죽으면 내 인생은 끝나고 마는 건지.
정말 하나님은 존재하시는지.
이런 영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단지 항상 사는 게 고달프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 속에 허둥대며 영적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 열매 없는 고된 인생에서 허탈함을 느낄 때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내세에 대한 의문이 문득 고개를 들 때가 있습니다.
니고데모 처럼 모든 것을 이루고 부러움과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을 때도 오히려 허무감이 몰려오며 세상의 것에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분명히 하나님, 정말 당신이 계십니까? 라고 물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 영혼 깊은 곳엔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죠.
전도서3장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죽음 뒤에 있는 다음 세상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불확실한 자신의 구원 문제로 고민하다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을 얻을 길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고 죄를 지으면 속죄의 제사를 드려 왔던 니고데모에게 납득할 수 없는 논리죠.
구원받는 방법이 이렇게 간단하다니요.
오늘날 세상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차라리 수행을 하고 기부를 하고 장애우를 돌보고 이런 나의 선행을 쌓아 구원을 받는 다면 그건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죠.
그러나 독생자를 보내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철저히 죄로 부패하고 타락 해 자력으로는 구원받을 행위를 절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내어 섬깁니까?
누가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있습니까?
우리 속에 하나님을 싫어하고 남을 사랑하기 보다 나를 위해서 남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것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목표에서 완전히 벗어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의 아들이 그 죄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는 것입니다.
역사는 주후 33년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죄로 십자가형을 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죽음에 담긴 대속의 진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의 앞 14절,1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출애굽 때 하나님께 범죄해서 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들을 살려주실 방법으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고 하신 구약성경의 내용입니다.
그 때 뱀에 물려 죽어 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건이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실 것을 예표해 주는 사건이었다고 니고데모에게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들이 살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돌아간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비로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 가는 일에 더 이상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죽은 몸을 장사하기 위해 백 근이나 되는 향품을 가져왔다고 장례를 치렀던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깨달은 니고데모는 그의 영원한 숙제를 풀고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2천년 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처형 된 예수님이 어떻게 내 죄를 대속하셨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 28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 자신의 죽음을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이런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필시 미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말이 사실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사기꾼도 미치광이도 아닌 인류역사 중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인증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겸손히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지금도 주님은 우리가 그 십자가의 죽음 앞에 나와 구원을 받고 부활하신 주님과 영원히 동행하길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을 통해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 삶에 나타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들을 합니다.
경0대학교 회계학과에 임0환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일찍이 불교에 심취해 성철스님을 만나려고 삼천배를 세 번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절이 좋아 결혼하고도 20년을 해인사에서 출퇴근하는 날이 더 많았다 하니 거의 승려나 다름없는 분이죠.
임교수와 함께 절에 머물던 한 노인이 계셨습니다.
노인은 평생을 불교에 귀의했는 데 부인을 위시해 온 가족이 그만 교회를 다니게 된 것입니다.
집을 나와 절에 기거하던 노인은 자신이 죽으면 절대 자식들에게 알리지 말고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러달라며 재산을 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일 주일 후 자녀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임교수는 자녀들이 노인을 강제로 괴롭게 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 얼른 병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병원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인이 침대에 누워있다 임교수를 보자 벌떡 일어나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세 번 외치더니 ‘임교수 나 예수님 만났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이보게, 부처님도 좋은 분이야 그러나 거기엔 구원이 없어. 자네도 예수 믿고 구원받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해가 안되는 마음으로 병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노인은 얼마 뒤 돌아가셨는 데 그의 가족들이 노인의 부탁으로 집요하게 임교수 가정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처음엔 작은 아들이 넘어갔습니다.
어느 날 성경책 한권을 보고 화가 치밀어 찢으려는 순간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어 그냥 치워버리라고 말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한 권이던 성경이 세 권으로 늘어나 있는 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랍니다.
이혼 직전까지 갈 만큼 대판 싸움을 하고 아내가 성경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길래 아마 성경책을 버리러 가나 했더니 집 앞 교회에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가정에 불화가 점점 심해지자 노인의 가족과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찾아갔는 데 마침 주일이라 가족들이 다 교회 가러 나오던 차였습니다.
얼떨결에 그만 그들 손에 끌려서 교회로 따라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설교는 무슨 말인지 한 마디 알아들을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말씀이 귀에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풍랑 속에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시고 바다를 걸어서 나타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오시자 제자들이 너무 놀라 유령이라고 야단이 났었죠.
그때 예수님께서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다는 목사님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말씀이 임교수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습니다.
망망대해 같은 인생에서 험난한 파고를 오르내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바로 자신을 향해 예수님께서 내니 두려워말라는 말씀으로 생생하게 들려왔습니다.
운전을 하고 돌아오는 그의 눈에 왜 그런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그를 감쌌습니다.
그의 평생 그토록 찾으려고 했지만 항상 채워지지 않던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해결 된 걸 느꼈습니다.
그렇게 길을 찾으려 수양을 하고 삼천배를 세 번 하고 온갖 계율을 지키려고 했지만 늘 두려움에 갇혀 주머니마다 부적을 넣고 다녔는 데 구원의 길은 너무 쉽고 완벽하게 그의 앞에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날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삶에 모셔 들이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벌써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전도해서 예수님께 인수인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 역사 속에 살다가 돌아가시고 끝나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인생의 고통을 안고 갈급한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거친 파도가 위협하는 인생의 항해에 내가 함께 있겠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를 작정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의지할 곳 없는 험악한 인생길을 다 가도록 위기마다 도우시고 우리 인생을 기름지게 축복하시는 주님의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예배와 말씀을 들으며 아무런 깨달음도 감동도 받지 못했다고 역시 아닌가봐라고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번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분도 있지만 대개는 예배드리고 말씀을 계속 듣는 가운데 어느 순간 영적인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3장16절의 사나이 팀 티보는 실력이 대단한 선수가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하나님은 그를 많은 사람들 중에 높이 들어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남자11위에 올랐고 이기는 경기마다 2억5천만원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영적인 구원과 함께 이 땅에서 또한 우리를 돌보시고 풍성하게 축복하시는 줄 믿습니다.
잠언 4장 8절은 말씀합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영화를 이 땅과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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