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도마의 의심 (요한복음20장19절-29절)

남수연 2012. 4. 11. 15:43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줄 믿습니다. 아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하늘로 승천했다는 사실을 세상은 이해도 못하고 믿지도 못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를 어리석게 생각할지 모르나 주님은 요한복음6장4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아버지의 은혜로 우리가 주님께 나와서 부활의 약속을 받게 된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만 남아 있습니다.

오늘 요한사도의 증언을 통해 인류의 운명을 뒤바꾼 2천년 전 주님의 부활 사건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을 기록한 본문이나 다른 복음서들을 읽을 때 우리를 좀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확실한 본이 되 줘야 할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앞 부분에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찬찬히 읽어 보면 그 중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도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보고 그들이 생각했던 것이 고작 제사장들이 주님의 시신을 빼돌렸다는 생각이었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에 대해 분명히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7절에도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있죠.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인식도 믿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을 약속하신 날이 장사한지 사흘째인 바로 오늘입니다.

제자들은 이 날을 열렬히 기대하고 무덤 주변에서 피켓과 팡파레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은 홀로 십자가를 지셨듯이 누구의 환영도 없이 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읽은 대로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제자들을 안심시켜 주십니다.

십자가의 형장에서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에게선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어 보이죠?

예수님은 또 제자들의 배신은 다 잊은 듯 속도 좋게 한마디 추궁도 없으십니다.

역사적인 부활의 재회 장면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부모의 사랑을 당연히 여기는 철없는 자식 같은 제자들의 좀 뻔뻔한 모습이 묘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도 없으며 댑서 큰소리치는 도마의 모습도 참 너무나 인간적이죠.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다 순교한 제자들의 담대한 믿음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변화시킨 부활의 능력을 살펴보며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적인 힘이 되어 모든 두려움과 고난을 이길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다 알고 있듯이 부활의 의미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입니다.

속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바로 부활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부활의 교리는 이렇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습니다.

로마서 5장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 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람이 죽었다면 바로 그가 죄인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사람은 죽음이 묶어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상 죽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 성경 말씀대로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는 게 입증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죄가 있었다면 사망에서 풀려나지 못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사망이 냉큼 주님을 삼켰는 데 예수님께 원죄도 없고 다른 아무 죄도 없으신 것입니다.

사망이 의인을 삼켰으니 야단 난 것이죠.

사도행전 2장 24절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원문의 뜻이 이것입니다.

사망이 예수님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풀어주고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삼켰는 데 창세 이래 죄가 없는 의인을 처음 삼킨 사망이 고통스러워 죽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예수님을 부활시키지 않으셨다면 사망이 죽을 뻔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죄가 없으시다는 증거입니다.

죄 없는 분이 죽으셨으니 내 죄를 대신 해서 죽은 대속이 되는 것이죠.

좀 어려운 교리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들을 잘 배우고 이해할 때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진리를 굳게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주님의 부활은 단지 회생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전의 몸이 아닌 완전한 영화로운 몸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19절을 보면 문들이 잠겨있는 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죠.

물질세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그냥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선 제자들이 너무 놀라 주님의 영이 나타났다고 무서워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영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그 자리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이 땅에서만 유한하게 살 수 있는 육체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영과 육을 함께 가진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혹시 천국이 영혼들이 떠 다니는 곳으로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겠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지혜와 아이디어를 내서서 새롭고 완벽한 육체를 만들어 입히신 것입니다.

천사들처럼 영이 아닌 육체를 가진 존재로 지으시고 심히 보기 좋아 기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인간은 몸을 갖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의 삶도 창조하신 가장 완벽한 설계대로 몸을 갖고 살게 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한편 인간이셨기에 육체를 가진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신 지금 천국에서 우리와 같은 몸을 갖고 계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으신 육체를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육체의 한계가 사라지고 영원한 삶에 맞게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섭생의 영향을 받지 않는 완벽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죠.

바울사도도 고린도서15장18절에서 말씀했죠.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 된 아름다운 부활을 확신하며 사망의 권세도 이기고 이 세상에 잠시 있는 모든 역경도 이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부활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들을 우리가 당연히 주목해 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합니다.본문에서 이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극도의 두려움에 떨면서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19절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잡으러 올 것을 무서워해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은 새벽에 이미 마리아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이셨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 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에 처형되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부인할 수 없는 강력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인생에서 경험한 것은 인간이 죽고 무덤에 묻히면 그걸로 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부활한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인 것이죠.

이런 북활실한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일이 두렵고 미래가 막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내게 보이는 절박한 현실은 너무나 뻔하고 내일 일은 도무지 예측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두려움에 갇힌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라는 것은 죽음의 문제가 해결 되었지 않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의 깊은 뿌리는 다 죽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인 데 이생에서 불행하게 생을 마치는 게 두려움입니다.

혹시 죽고 나서 내가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해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죽으면 더 영광스런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이걸 확실히 믿으셔야 인생에 대한 담대함이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작은 일에도 가슴이 덜컥거리고 늘 근심 걱정에 빠지는 일이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죠.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 박으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못하겠냐는 것이죠.

막연한 인생을 헤쳐 나갈 능력도 없고 현실이 어둡다고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영광의 부활을 준비하셨지만 이 세상에서도 우리를 도우시고 평강 가운데 인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제가 아는 교수님의 군복무 시절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했는 데 도처에 지뢰가 매몰 되어 정말 위험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군종병이라 여기 저기 초소를 다닐 때가 많았습니다.

원래 걸어서 다녀야 하지만 워낙 부대 내에서 아는 사람이 많다보니 걷다가 차가 지나가면 얻어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지나가던 지프차에 얼른 올라 탔는 데 얼마 못가서 헌병에게 걸렸는 데 내리라는 것입니다.

잘 아는 헌병인지라 알았다고 말만하고 그냥 타고 가는 데 얼마 안가 또 다른 헌병에게 걸린 것입니다.

다들 뻔한 사이라 얼른 내려오란 소리에도 대충 얼버무리고 계속 차를 타고 가는 데 얼마가지 않아 또 걸린 것입니다.

거의 그런 적이 없었는 데 하도 이상해서 네 번 째 걸린 다음 차에서 내렸습니다.

이 분이 내리고 나서 불과 50미터 정도를 달리던 지프차가 앞에서 굉음과 함께 튀어 올랐습니다.

지뢰를 밟아 차가 폭발하고 타고 있던 두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등줄기가 오싹하며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절대로 고통과 죽음의 위기에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의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평강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죠.

우리 믿음은 연약하고 마귀는 우리를 뒤흔들고 두렵고 떨리는 환경 속에 낙담하게 만듭니다.

요한사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기에 평안하라는 주님의 세 번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주저앉게 하는 어두운 문제 속에서 평강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길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독이시고 용기를 주시며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다음은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십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자들 속을 뻔히 아시는 주님께서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지 참 넌센스 같지 않습니까?

아니, 지금 죽을 것이 무서워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밖으로 나가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이 지금 전도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당장 의식주 문제가 있고 건강이 급선무고 회사 업무가 문제고 우리 가족들 문제가 절박하죠.

제자들도 지금 죽음으로 내몰릴까 절박감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해결책은 아이러니하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는 우리를 마치 죽일 듯이 협박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청년들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해 주실 수 있는 것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방책은 주를 위해 고난을 받으라는 역설입니다.

우리를 둘러 싼 현실적인 문제들만 바라보고 그것에 매여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다 들인다고 인생의 고난에서 쉽게 빠져나와지지 않습니다.

대개 우리의 무거운 짐은 몇 달, 몇 년 죽을 힘을 다해 고생한다 해도 그리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신비하게 현실의 이 문제보다 우리가 예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면 현실의 고난의 짐도 넉넉히 지고 갈 만한 힘을 주십니다.

지혜로운 신앙인들은 그래서 자청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믿음의 성장을 위해 말씀을 보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시간과 물질을 들여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합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신기하게 이 땅의 모든 고난을 담대하게 이겨낼 능력이 생긴다는 걸 날마다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 때 주시는 기쁨과 장래 받을 상급은 물론이고 정말 내 삶이 값지다는 보람도 느끼게 됩니다.

놀랍게도 주님의 제자들은 주신 명령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 모두 목숨을 바치고 순교했습니다.

부활의 증거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제자들의 이런 변화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복음과 함께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거창하게 선교지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박해를 당하지 못한다 해도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대로 사는 일이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일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가 우리에게 주신 선교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모든 일 중에 가장 뒷 번호고 가장 관심 없는 일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우선 순위는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서두르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생각하면 아찔해 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고 아무리 지위가 높고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실은 모두가 죄 가운데 탄식하고 있습니다.

아직 주님의 평안을 알지 못하는 우리 가족들이 다 깊이 탄식하고 있는 걸 아셔야 합니다.

23절에 예수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믿고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입을 열지 않으면 그들이 죄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애써서 말씀을 전했지만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상처를 받고 창피를 당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해 전도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22절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1장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 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실 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우리를 도와주시고 가르치고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성령이 충만하게 되는 은혜를 매일 받을 때 삶에도 전도에도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충만을 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더 잘 알지 않습니까?

하루에 수도 없이 곤두박질 치며 의심과 두려움에 빠지고 나태와 영적인 무관심은 어느새 세상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죠.

믿음에 실패하고 시험에 지면 순식간에 마음이 불행해지고 문제가 우리 발목을 잡고 모든 일에 괴로움이 닥칩니다.

믿음으로 이기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는 게 우리 힘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십니다.

성령님을 구하고 충만히 받음으로 능력과 기쁨의 삶을 살며 전도의 축복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이 사건 틈에 끼여 있는 도마의 일을 살펴봅니다.

사도 도마 앞에는 오늘 이 사건으로 인해 항상 의심 많은 도마란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죠.

도마는 매일 의심에 빠지는 우리 연약한 그리스도인의 대표주자입니다.

물론 그가 이미 구원받은 것엔 이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목욕해서 깨끗하다 하셨고 그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현실적인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의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은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죠.

게다가 하필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현장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할 때 그는 막연한 두려움에 빠져있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의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러 나갔을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그가 인정하고 믿을 수 있는 대상이었죠.

그가 돌아왔을 때 방 안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눈치 챘습니다.

제자들은 흥분해 있었고 도마를 보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녀가셨다고 야단들입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당황하던 도마에게 울컥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하필 자신이 없을 때 예수님이 다녀가신 것에 마음이 상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못 믿고 손가락으로 상처 자국에 넣어봐야 믿겠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러나 그는 팔일 간을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인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며 갈등하는 연약한 믿음의 현주소죠.

어쩌면 팔 일이 지나는 동안 예수님을 보았던 제자들까지 헛 것을 보았나 의심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오셔서 도마에게 보이시고 상처에 손을 대고 확인해보라고 하십니다.

도마가 한 말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어쩌면 모습을 감추고 제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셨을지 모릅니다.

주님이 어디서든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까?

설령 우리가 힘든 현실에서 주님의 사랑을 잠시 의심한다 해도 주님은 우리를 감찰하시고 우리의 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실 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도마를 향해 하시는 말씀에는 부드러운 책망이 담겨 있고 단호한 명령이 담겨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불신앙과 의심의 마음에서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수많은 성도들이 부활한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는 믿음이 완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이 증거를 보는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기적을 수없이 목격했던 출애굽의 백성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여전히 하나님을 의심했고 원망했고 결국 광야에서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면 정말 굉장한 믿음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매순간 내 속에서 싸워서 매순간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선택하는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로마서10장17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믿음이 견고해 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절대 바른 믿음, 능력 있는 믿음으로 설 수 없습니다.

지금 아프리카 북부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슬람국가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일찍이 복음을 전한 곳이 바로 아프리카입니다.

이디오피아, 리비아 이런 나라들이 일찍 복음이 꽃피웠던 나라들입니다.

튀니지같은 경우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율이 90%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튀니지가 지금 이슬람99%에 기독교인구가 1%밖에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 지 연구한 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전 인구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그 나라들이 자기 나라 말로 번역한 성경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지키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이슬람에 의해 점령당하고 모든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아모스 8장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마지막 때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영혼들이 기갈이 들려 죽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증거를 구하고 기적을 보며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삶의 모든 방법과 지혜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지키며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르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목격하고 나서 비로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이고 초월자인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마는 이디오피아, 시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했고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인도 사회는 그 당시도 철저한 카스트에 의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다른 계층과는 결혼도 못하고 계급과 직업이 철저히 세습됩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배운 기억나시죠?

인구 4%의 최고 계층인 브라만이 지나가면 천민들은 28발자국 물러나야한다고 합니다.

초대 총리 네루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타고르가 다 브라만입니다.

그런데 이 브라만 계급의 한 가문만이 유독 카스트제도를 벗어나 기독교목사와 다양한 계층으로 퍼진 희한한 족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도마의 전도에 의해 온 가문이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도 첸나이에는 이 곳에서 창에 찔려 순교한 도마의 무덤이 있습니다.

최근 논문자료에 보면 도마가 우리나라까지 들어와 가야국에 전도했다는 재미있는 가설이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져보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 땅끝까지 걸어가 목숨을 버려 주님의 부활을 전했던 것입니다.

영광스런 부활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았기에 가장 가치있는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실체를 믿음의 눈으로 직시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고 현실을 이겨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파송해 주셨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선택할 때 이 땅에서 우리 인생이 제일 보람되고 보석같이 값진 인생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고 말씀을 배우고 지키며 매 순간 믿음을 선택하실 축원드립니다.

부활의 주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영광스런 몸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영접해 주실 것을 확신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