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사마리아지방의 수가라는 마을 입구에 있는 우물가에서 있었던 예수님과 한 여인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 우는 이 우물은 지금도 이스라엘에 현존하고 성지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깊이가 30m가 넘는 깊은 우물인 데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시원한 물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 우물 위에 야곱의 우물교회가 세워져 있고 교회 지하에 있는 우물에서 여행객들이 물을 떠서 마실 수 있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주후 380년에 세워졌는 데 여러 차례 파괴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세운 교회입니다.
지난 1979년 이 교회를 지키던 신부 한 사람이 이스라엘 정착민에 의해 도끼로 잔인하게 살해 된 슬픈 역사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 야곱이 파놓은 우물을 기독교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격분한 자의 소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우물가에서 2천년 전 생명수를 받으라 말씀하셨는 데 인간은 여전히 허무한 우물에 매달려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이방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신앙을 고백하고 생명을 구원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인간의 깊은 곳 영적 갈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갈증을 해결할 분은 예수님 뿐이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고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게하는 능력으로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등장 인물은 수가라는 성의 이름 없는 한 여인과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들어갔고 기록자인 요한은 언제나처럼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 이 상황을 복음서에 소상하게 기록했습니다.
사건은 남쪽 유대지방에서 사역하던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사마리아 지방에 들리시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동족 사마리아 사람들을 좀 경멸한다는 것은 다 아시죠?
종교성이 강한 바리새인들은 이곳 사람들과 상종도 하지 않고 심지어 그 땅도 밟지 않았습니다.
보통 예루살렘에서 윗 쪽 갈릴리지방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사흘 정도 걸릴 길을 5,6일 걸려 요단강 쪽으로 돌아갈 정도입니다.
이유는 사마리아인의 혈통 문제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앗시리아가 북쪽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의도적으로 외국인을 거주시켜 혼혈족을 만든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사마리아는 페르시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여러 민족과 섞였고 순수 혈통인 유대 쪽 사람들에게 아예 딴 민족 취급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사마리아와 유대인들의 골이 더 깊어진 것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돼 돌아와 성전을 재건 할 때 생깁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당연히 함께 할 생각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끼워주질 않았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사람들은 돌아가 자기 땅에 있는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하며 서로를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서 갈릴리로 돌아가는 여행코스를 잡으신 것입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실 의지를 가지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본문에 등장한 이 이름 없는 여인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이 여인은 정말 되는 일이 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에서 읽었듯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번은 성공적인 결혼을 할 수 도 있었으련만 정말 억세게 운이 없는 인생입니다.
사실 다섯 번 결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인의 능력이나 외모가 꽤 괜찮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 여인은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처럼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인생을 살리라 생각했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은 여인의 마음을 사정없이 할퀴고 상처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자신 있다 생각했던 일이 오히려 우리를 넘어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만만 했던 건강이, 믿었던 자식이, 의지했던 직장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암환자의 상당수가 자신은 정말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오히려 몸이 약해 항상 건강 때문에 전전긍긍 하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질병을 피하고 오래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골골 팔십이란 말이 나왔겠습니까?
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들이 결혼에 실패를 많이 하고 험난한 인생을 사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미인박명이란 말이 또 있지요.
수가성의 여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안간힘을 쓰며 남들이 다 가진 그 평범한 가정을 가져보려고 애를 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포기 하지 않고 다섯 번을 결혼 했겠죠.
그러나 행복은 여인을 비웃듯이 더 멀어져 갔습니다.
재산도 능력도 아름다움도 사라져 갔고 이젠 정식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더 서글픈 처지에 빠지고 맙니다.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어주지 않는 것이 바로 인생이란 것입니다.
부한 자건 가난한 자건 인생의 골짜기엔 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땅은 저주를 받았고 아무리 땀을 흘려도 수고한 만큼의 보상은 약속되지 않았습니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등진 인간은 축복 대신 저주 가운데 놓여있기 때문에 누구나가 고통당하고 신음하여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실패했던 인생, 저주받은 인간의 삶을 돌이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시편 81장 6절엔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아무리 실패했던 인생도 주님을 만날 때 회복과 축복의 인생으로 바뀌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가수 윤0희씨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과 함께 써나가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는 걸 느낍니다.
윤0희씨의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아편 중독자가 되었고 마약으로 인해 결국 목숨을 잃고 맙니다.
아버지의 남긴 빚을 갚으려고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던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죽고 여섯 살부터 그녀는 무대인생을 살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윤0희씨의 미니스커트가 큰 뉴스거리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윤권사는 현란한 무대 생활의 짜릿한 흥분과 박수 갈채 속에서 인생은 그냥 즐기는 거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결혼 생활과 수차례의 낙태로 영혼은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1976년 새벽 전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구로 가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윤권사가 탄 차가 비 내리는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다가 미끄러지며 두 바퀴를 돌고 반대편 차선으로 내리 꽂힌 것입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고 그때 마침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트럭과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모두다 목숨을 잃을 대형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신을 잃지 않고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선명하게 하나 하나 눈에 보였다고 합니다.
그 때 갑자기 비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에서부터 섬광 같이 날이 선 빛이 자기를 뚫고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라는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윤권사는 차문을 열고 나가 젖은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고 빗 속에서 기도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되었던 것입니다.
가벼운 찰과상만 입은 윤권사를 보고 사람들은 "기적이다!" 라며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습니다.
공연과 상관없는 박수를 처음 받았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구에 도착해 무대에 올랐는 데 쇼의 첫머리에 부르게 되어 있던 ‘캄캄한 이 거리 누굴 찾아 여기 왔나’라는 노래를 도저히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윤권사는 반주도 없이 즉석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윤권사는 하나님의 주신 노래의 달란트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주님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한 번은 머리카락이 빠지는 병으로 치료 중에 있는 데 가요제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관중 앞에 설 수가 없는 우울한 상황이었지만 기도하며 작사를 하고 부른 곡이 바로 여0분이란 노래입니다.
그 노래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메니저 없이 연예 활동을 하고 있는 데 하나님이 얼마나 소상하게 챙겨주시는 지 어느날은 옷핀을 챙기라 하셔서 준비했는 데 무대에서 갑자기 치마단이 뜯어져 옷핀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답니다.
윤0희씨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보다 더 한 여자였다. 하나님은 그런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은 참으로 세밀하시다. 내가 힘들 때 안고 가 주시고, 짜증부릴 때 업고 가 주시는 하나님은 내 호흡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따뜻한 나의 이불이 되어 주시고, 배를 채워주시는 음식이 되어 주시며, 목마를 때 물이 되어 주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삶의 고통과 절박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난 인생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대로 이 비운의 여인도 주님을 만나자 물동이를 걷어차고 환희에 찬 새 삶을 살게 된 것을 봅니다.
우리의 인생이 불안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아 근심스러울 때도 주님과 함께 하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 앞에 두려운 순간 마다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며 견고한 믿음으로 서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본문에서 어디든 우리를 찾아 오시는 좋으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찾아 일부러 오셨다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본문의 시각이 이스라엘 시간으로 제6시라고 했으니 한낮인 정오쯤으로 보시면 됩니다.
팔레스타인 땅의 정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시간입니다.
태양 볕에 온 몸이 타들어 가고 사막의 모래 바람은 옷 속을 파고 듭니다.
멀리 보이는 마을은 적막하고 한 낮 우물가엔 인적 조차 없었겠죠.
주님은 어찌된 일인지 쉴 틈도 없이 제자들을 재촉하여 정오에 맞춰 수가성의 우물가까지 오신 것입니다.
시계(?)를 보신 예수님이 정해 진 시간 안에 늦지 않게 도착한 것에 안도 하시며 우물 곁에 털썩 주저 앉으십니다.
언젠가 한국 관광객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 24킬로를 횡단하려고 냉수통을 짊어지고 걸어갔는 데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실 때 벌써 72킬로 멀리 떨어진 수가성에 있는 한 딸의 갈급함을 보고 계셨습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기 위해 주님 자신은 목이 타는 갈증을 견디며 72킬로를 걸어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그 길이 어떤 길이든지 반드시 찾아 오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우리에게 오신 사랑의 주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힘들어 탄식하며 주님을 향할 때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시다 즉시 도움의 손길로 다가오십니다.
때로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이 나 같은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를 알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구의 70억의 생명을 하나 하나 창조하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39장 13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이사야 44장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 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말라
우리의 고통을 모르고 저 멀리 계시다 느끼는 건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사마리아땅의 잃어버린 딸을 바라 보셨던 우리 주님의 눈길은 오늘도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잠시 후에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다가 옵니다.
이 여인은 모두가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집에 들어앉은 시간에 홀로 우물가를 찾습니다.
자기를 보고 수군거리는 아낙네들의 시선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평범하지만 행복한 그들의 웃음 속에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외롭고 상처 입은 여인이 주님이 만나려고 먼 길을 찾아오신 바로 그 여인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의 아들의 방문을 받은 우리 역시 죄와 상처로 가득한 초라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좌절 속에 문을 닫아 걸고 깊숙이 혼자 숨고 싶어 할 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숨어버리고 싶은 이 여인의 인생에 해답을 주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렸던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건네십니다.
생명수를 주실 주님이 여인에게 먼저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열망으로 주님은 항상 목마름을 느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갈증을 호소하셨습니다.
주님의 갈증을 씻어드릴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자녀가 믿음으로 드리는 한 바가지의 물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마름에 인간은 이 여인 같이 냉담한 얼굴로 두레박을 감춥니다.
주님의 초대에 인간은 한결 같이 주님을 밀어내고 문을 닫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오랜 시간 주님을 외면했던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생명의 물인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갈증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죄인들을 볼 때 주님은 아직도 목이 마르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구원하시고 난 후 먹을 것을 권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됐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을 배부르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먹을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을 바라만 봐도 배부르다는 부모님의 마음이 이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서둘러 마음을 닫아 걸 준비를 하는 여인을 섭섭해 하지 않고 측은히 여겨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주님은 박한 인생을 살아온 여인을 측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모르는 가련한 딸아. 여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생수를 줄 수 있는 나를 보아라.
예수님은 어쩌면 평생 선물 한번 받지 못하고 살아왔을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인 주님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받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 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선뜻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11절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여인은 주님의 생명수를 여전히 육체의 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해서 여인을 설득하며 이야기를 끌어 가십니다.
그 물은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러자 드디어 여인이 호기심을 보입니다.
이 곤욕스런 곳에 물 길러 오지 않게 그런 물을 달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실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내 인생에 이 축복을 주세요.
그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나 영혼이 거듭 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먼저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야 하기에 주님은 다시 대화를 시도하십니다.
16절에 보니 주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그것은 여인이 끝까지 감추고 싶어 했던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너의 과거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라고 밝히고 싶어설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유하시는 분이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고통이 더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인이 평생 목말라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밝히시려는 것입니다.
여인은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에 대해 유독히 갈급해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참 묘합니다.
내가 정말 필요해서 꼭 갖고 싶어 끊임없이 쫒아가는 그것이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잡았다고 생각했는 데 알고보니 그것이 내가 원했던 그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주님은 그것이 바로 아무리 마셔도 갈증 나는 육신의 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만이 우리를 살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 끝 날에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구약시대의 스가랴선지자는 14장 8절에 인류에게 생수를 주실 예수님이 오실 것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주님은 우리가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온 힘을 다해 쫒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올 때만이 우리 영혼이 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의 영혼을 계속 만지실 때 드디어 여인의 영의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25절에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에 대견해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그래, 네게 말하는 그가 바로 나이니라
드디어 잃어버린 딸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숨을 죽여 보고 있던 천국에서 환희의 팡파레가 울려 퍼집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해볼 것은 참된 예배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화목제물로 주심으로 우리가 아버지 앞에 예배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범죄한 인간은 이미 영으로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니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진정한 예배로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다시 예배의 길이 열리고 있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주님이 자신을 죽이며 우리에게 부어주신 생명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영생하는 샘물인 성령이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비로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은 창세기6장에서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인간들을 다시 예배의 자리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자녀들을 기뻐하시고 우리가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를 향해 급히 얼굴을 돌리십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 안에서 우리의 정성을 다해 예배할 때 하나님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들 딸들이 지금 나를 예배하고 있구나. 당장 가 봐야겠다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자리임을 믿습니다.
예배드릴 때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의 샘을 터트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가운데 임하셔서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시며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축복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리는 것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이란 것입니다.
생명의 물을 가지셨습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생명수가 아닌 것을 쫒아 방황하지 않습니다.
오늘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이제 그의 인생의 새로운 막을 올립니다.
이 모든 상황을 유심히 바라보던 기록자 요한은 달라진 여인의 삶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리고 2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생명의 물을 만난 여인에게 물동이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안됩니다.
게다가 이걸 보십시오.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기 위해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던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동네사람들 앞에 드러냅니다.
진짜 생명수를 마음에 가진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걸 자기가 알고 또 남이 알아봅니다.
주님이 주신 물이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된 것을 날마다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달라진 모습에 동네 사람들은 뭐가 있긴 있구나 하며 예수님께 모여듭니다.
혹시 아직도 목이 마르십니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고 마음 속 우물은 더럽고 냄새나는 죽은 물로 가득합니까?
21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십시오.
나를 믿으라!
주님을 믿고 내 안에 영생하는 샘물이 있음을 확신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의 샘물이 흘러 넘쳐 오늘 수가성의 여인처럼 이웃을 구원하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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