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콜롬비아의 병원에서 한 여성이 다발성경화증으로 치료를 받다 숨졌습니다.
의사는 사망선고를 내렸고 장례 기간 중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장의사가 소량의 포름알데히드 방부제를 바르던 중에 갑자기 여성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다시 소생하여 살아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약물에 의해 심장에 갑작스런 반응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학적으로 사망을 선고 받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라자루스 신드롬나사로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나사로가 부활한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의학계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입관 까지 마친 한 노인이 다시 살아서 관 속에서 뚜껑을 두드려 열어주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인정 된 라자루스 신드롬은 세계에서 38건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1시간 이내에 소생되었고 오늘 나사로처럼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한 이후에 살아난 일은 없습니다.
썩기 시작한 시신이 살아났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죠.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입니다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는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와 더불어 평소 예수님을 극진한 사랑으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 지나시다 자주 그 집에서 거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일에 쉴 새 없이 피곤하셨던 예수님은 가끔 가족과 같은 나사로의 집에서 피곤한 몸을 뉘이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안하던 이 가정에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는 엄청난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본문의 앞 절을 보면 나사로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다급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 그 위급한 전갈을 듣고도 즉시 가시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머무신 후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그들에게 가십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의도하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 가운데도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죽은 후에 부활을 믿는 데 세상에서 살 때와 똑 같은 인간의 몸으로 부활한다고 믿습니다.
부활한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심판대 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게 이슬람의 부활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뚜렷하게 말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창시자가 죽고 난 후 각 종교를 포교하던 추종자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 많아 신빙성이 없고 내용도 우화적이고 조잡합니다.
비교적 철학적 체계를 갖춘 불교에서 조차 죽은 후에 천국에서 사는 삶에 대해 말하기를 천국에 이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꽃이 피고 그 꽃이 질 때 까지 천국에서 살고 다시 윤회를 한다는 좀 이해가 않되는 내세관을 말합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명확하게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통해 확실한 시청각 교육으로 우리에게 부활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당도했을 때 이미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났기에 예수님이 오셨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던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어떤 인간이 과연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이고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부활을 이야기 하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믿으며 자신을 희생하고 심지어 가족과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습니까?
부활과 영생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픈도어즈라는 선교단체에서 올해 발표한 통계를 보니 작년 1년 동안 순교한 기독교인들의 수가 17만6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하루에 482명, 3분에 1명이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다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주에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예배드리던 23명이 적발되어 체포되었다는 안타까운 보도가 발표되었습니다.
평남 평성시 구월동에 소재한 지하 교회 였는 데 지도급인 3명은 사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20명은 요덕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순교한 3명의 지도자들은 중국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북한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척, 지인 등에게 복음을 전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픈도어즈에 의하면 현재 지구상에는 1억 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으로 인해 심문을 받고 체포되고 사형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 후에 있을 영원한 내세와 부활을 믿기에 소중한 목숨을 담보하며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후 천국에서 영원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 우리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이 믿음의 여정을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사로의 부활은 우리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나사로의 부활을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시켜 증언하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나사로의 부활은 많은 유대인이 믿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 된 사건 까지 만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에 의해 전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미우라아야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에 기록 된 정황을 보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죽음이 무서워 혼비백산 예수님을 두고 도망한 사람들입니다.
군사들이 잡으러 올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랬던 제자들이 갑자기 훤한 대낮에 거리와 성전에서 대담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놀라운 장면을 주목한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유대인들과 정면대응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형시킨 유대지도자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평소 자신이 부활할 것을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혹시나 해서 경비병을 세워 철통 같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전전긍긍하던 제자들이 돌변하여 용기백배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순교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겠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그들이 그동안의 인생과 가치관을 뒤바꾼 엄청난 사건을 접했다는 것이죠.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제자들은 목격하지도 못한 거짓을 증거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됩니다.
인간이 그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습니다.
세계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무덤이 있습니다.
석가는 죽은 몸을 화장해 그 사리가 나뉘어져 8개 나라로 보내졌으니 그 곳이 곧 그의 무덤입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에 성역화된 묘에 그의 시체가 있고 공자의 묘 또한 중국 산둥성 공림에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죄로 인해 죽어 장사 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고 죽음은 결코 하나님이신 그 분을 가두어 두지 못했고 주님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5절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가 부활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단단히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이 땅에서 우리가 남다른 선택을 하고 죽음과 같은 고통도 인내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견고한 부활의 신앙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나사로의 가정에 닥쳐온 죽음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이 닥쳐오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왜요? 라고 물을 수 밖에 없고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겨야만 합니까? 라고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재해석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문제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성숙하게 하신다는것입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
을 연단하시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앞에 닥친 고통과 절망스런 문제들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고 정금 같이 연단되어 더 성숙한 믿음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7절의 말씀대로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 를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약 나사로가 병들지 않았다면, 만약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면 그들의 인생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기별을 받고 즉시 가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셨다면 그들의 믿음의 한계는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기에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마리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셨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이라도 손쓸 수 없다는 것이죠.
인간의 죽음을 해결할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아직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당한 고난과 문제의 크기만큼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성장해가기를 주님은 바라십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고 또 다른 영혼이 구원받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앉아있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싫어하고 안주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축복 보다 썩어 없어질 이 땅의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 진정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닥친 문제들을 통해 우리를 영광스런 주님의 자녀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난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고 그 인생이 파괴되어 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그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게 되고 성숙한 인간으로 다듬어져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시편 20장1절에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라고 환난 가운데 인도하심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편 138장 7절에처럼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라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다른 위로가 있으니 이런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하
나님이 다 알고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과 죽음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을 다 아셨습니다.
그를 죽기까지 두셔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35절에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의 결말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아날 것이고 슬픔 가운데 있던 사랑하는 자들이 다 기쁨과 위로를 받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불같은 고통을 당하는 그들의 아픔을 뼈 속까지 아시기에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죽지 않고 살도록 만드셨던 자녀들이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것이 너무 아파서 우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은 막대기를 들고 호령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힘겨운 문제와 씨름하며 고통 당하는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견딜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이 모든 문제들을 통해 우리가 마침내 믿음의 승리를 하고 성숙된 사람이 되어 더 좋은 축복을 누리게 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그리고 우리는 고린도후서 1장 4의 말씀대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다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모든 문제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신다는 메시지가 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4절에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 같은 우리의 구차한 문제 를 가지고도 하나님은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 운운하며 우리의 축복을 구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너희가 주제넘게 내 영광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십니다.
이사야55장 8절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난처해지실 거라 생각한 것은 마르다의 기우였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신적 권위를 당당하게 행사하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대로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엄하게 명하시고 나사로를 불러 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
빛이 있으라 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셨을 때 요동하던 갈릴리 바다도 순종하여 잔잔하여졌던 예수님의 능력이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고난을 통해 다시한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모든 축복이 임하고 만사가 형통하게 될 때 하나님이 영광으로 받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녀들의 환난과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시편 50장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 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과 같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본문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메세지는 우리가 고난을 통해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요한복음12장10절 11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 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는 고통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는 역사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주님 자신이 죽으셔야만 인류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교훈을 주십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죽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배우 000씨는 지난 겨울 신종플루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7살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아들은 죽기 전 마지막 선물인 것처럼 결혼기념일을 맞은 아빠와 엄마와 누나의 발을 씻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000씨는 일밤의 우리아버지란 프로그램에 출연했는 데 많은 사람이 함께 울었습니다.
평범하게 예전처럼 대해 달라고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가던 그는 석규의 사망신고를 하기위해 동사무소에 갔던 이야기를 하며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하늘나라에 간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힘겹게 동사무소에 들어가서도 사망신고서를 스스로 작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를 알아 본 동사무소 직원이 대신 작성해 주었다고 합니다.
000씨는 석규군의 사망신고를 작성하기 직전 아들이 이 세상에 살다간 흔적을 부여잡고 싶어 가족4명의 이름이 올라있는 주민등록 등본을 15장이나 뽑아놨다고 합니다.
몇 주 전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서 사랑했던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 하던 000씨는 연신 울음을 터뜨리며 아직도 절절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많은 아이들의 아빠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월드비전을 통해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의 아들들을 후원하고 있고 아들의 보험금 전액을 월드비전에 후원하였다고 합니다. 아이티 지진현장에 다녀온 이후 그 아이들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000씨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자선 경매를 열었고 석규가 그리던 그림책을 발간해 수익금으로 아이티의 난민 어린이들을 도우려고 준비 중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수많은 아이들이 살 수 있는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미련한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잠언20장24절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난은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계 최초의 이슬람 공화국으로 기독교 박해가 어느 곳보다 심한 이란의 하이크 목사는 정부의 협박에도 타협하지 않고 교회개척과 난민사역 등 이란복음화를 위한 용기있는 사역을 전개해 왔습니다.
특히 기독교 개종을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동료 목사를 구하고자 국제사회에 이란의 종교박해 알리며 인권투쟁을 벌였습니다.
1994년 결국 동료는 풀려났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실종 후 시체로 발견된 겁니다.
하이크 목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생명의 대가가 필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란정부는 목사를 죽임으로써 교회를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복음의 힘은 더 강했습니다.
정부의 협박에도 나머지 목회자들은 이란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동료 목사들이 차례로 순교했습니다.
이란에서는 현재 정부의 박해 속에도 위성과 인터넷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고 있고 교회도 활발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생명이 죽은 곳에서는 또 다른 생명이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고난을 통해 나의 자아가 죽을 때 비로서 우리 곁의 누군가가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가져갈 때만이 이루어집니다.
본문 34절에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우리를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하고 절망과 슬픔에 몰아 넣는 그 문제를 어디에 두었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으로 가져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의 마르다는 깜짝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우리의 고통과 문제가 너무 오래되어 벌써 부패한 냄새가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있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로 가서 그 문제를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주님 앞에 가져가 말씀드리고 아뢰고 도움을 구한다면 문제는 주님께 넘어갑니다.
이젠 주님께서 친히 그 문제를 맡아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고린도전서3장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만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셔서 기쁨 가운데 거하고 계시다면 참으로 감사하고 축복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 가운데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평안의 때에 주님과 친밀해지시길 노력하십시오.
갑작스레 닥친 나사로의 두려운 질병 앞에 그들은 평소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기에 예수님께 문제를 고할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본장의 3절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우리가 평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사랑을 확신하고 있을 때 갑작스런 우리의 시험과 문제 앞에서 주님 앞에 바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 만약 이 세상에 죄인이 나 혼자였다면. 주님 그래도 저를 위해 오셔서 십자가를 져 주실건가요?
주님의 대답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그래, 난 너 하나를 위해서라도 십자가를 질 것이다.
부모는 여러 자녀를 위해서만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부모는 한 자녀를 위해서도 목숨을 버립니다.
얼마전 호주의 한 여성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기뻐하다가 유방암이 걸렸다는 것을 같이 알 기뻐하습니다.
의사들은 아이를 낙태하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강권했으나 그녀는 아이를 살리겠다고 항암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진통제 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엄마의 고통 가운데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고 태어난지 10주만에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 하나를 위해서라도 온전히 자신을 버리시는 사랑입니다.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으십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가십시오.
고린도후서 4장 17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한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문제와 시험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리라 믿습니다.
이 문제들을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의 이 고통으로 인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우리의 이 연약한 장막 집이 벗겨 지는 날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장막을 입고 생명의 부활로 주님 앞에 서게 되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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