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수만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터무니 없는 내용을 진짜로 믿는 우리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참 우매한 신도라고 생각하겠죠?
기독교가 너무 심하게 사기를 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가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어 코웃음을 칠 사건을 사실로 내세우며 비웃음을 사려하겠습니까?
자청해서 조롱거리가 될 사건을 내세우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인간이 어리석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오늘 이 사건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실을 기록하고 선포할 뿐입니다.
이 사실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지 의심과 불신으로 밀어낼 지는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예수평전이라는 책을 쓴 인본주의 신학자 조0수 교수는 오늘 본문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오천명이 먹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천명을 대표하던 천부장 다섯명이 음식을 나눠 먹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빌립이 오천명을 먹이기 위해 열심히 계산 한 내용은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기적이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의심이 많은 사람들입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비추지 않으셨으면 오늘 본문의 기적을 이렇게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기록 된 사실을 믿음으로 오늘 본문을 향해 출발합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성령께서 말씀의 살아있는 권위를 통해 우리에게 더욱 확고한 믿음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그 공생애 중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하나 하나가 미리 의도하신 것이었고 무한한 주님의 권능을 생각할 때 가장 최소한의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는 특별난 의미와 메시지가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와 지구와 모든 만물은 창조 당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을 만큼 완벽했습니다.
완벽한 창조물에 다시 손을 대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을 보면 정말 어디 하나 손 댈 곳이 없는 천재조각가의 예술성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죽은 시신을 무릎에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얼굴에서 흐르는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함과 엄숙함과 거룩한 비통함이 느껴집니다.이 작품에 어느 한 곳에 다시 조각칼을 대는 것은 미켈란젤로 자신에게 조차 상상할 수 도 없는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질서와 원리에 의해 모든 만물이 제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능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세우신 창조질서를 교란시키는 행동을 아주 자제하십니다.
창조 질서를 유지하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임의로 피조 세계에 개입하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 아닙니다.
자연 질서를 넘어서는 기적을 보이실 때는 하나님의 공의의 훼손을 무릎 쓰면서 까지 보여야 할 사랑과 구원이라는 아주 강한 의지가 있으실 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자신이 지으신 만물의 규칙을 뚫고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항상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병자에 대한 끓어 오르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열정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메시야인 주님 자신을 드러냄으로 온 인류가 주님을 믿어 구원받기를 원하신 주님의 더 큰 의도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주는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중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던 군중들에게 음식을 주시는 기적은 단 두 번 베푸신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몰려든 모든 사람들에게 매번 식사를 제공한 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엄청난 기적을 베푸신 내용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길 원합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살아있는 주님의 말씀으로 더 큰 믿음과 은혜를 간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놀랍게 역사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예수님이 삼십세가 되신 후 본격적인 구속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우리가다 알고 있습니다.
삼년 반 정도의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어떻게 생각하면 철저하게 연출된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설교와 행동 하나 하나가 구약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며 행동하시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계획한 대로 살 수 없다는 것 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것의 때와 사건을 정확히 맞추시는 것을 통해 과연 환경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때입니다.
4절에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이적은 유월절에 맞추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유월절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할 때 유대인을 놓지 않으려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내린 마지막 열 번 째 장자 재앙에서 유래 된 절기입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한 날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 장정을 가로막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징계입니다.
이 재앙을 면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르라는 모세의 명령을 받습니다.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뛰어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유월절 양을 잡아 피는 문에 바르고 그 고기는 가족들이 집안에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보통 제사와 같이 불에 태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양은 가족들이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을 위해 몸을 주실 바로 그 유월절 양임을 증거하기 위해 유월절 절기에 맞춰 이 이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베푸신 이 장소가 먹을 곳을 구할 수 없는 산지 광야임에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40년을 먹이셨죠.
아침에 일어나면 천막 친 이스라엘 진영 주변으로 동그랗고 하얀 열매들이 이슬처럼 내려있었습니다.
이 만나에 대해 민수기20장 9절에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출애굽기 16장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거두어 하루의 양식으로 삼아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연명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땅의 식량이 아닌 만나로 그들을 먹이신 이유를 신명기 8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는 이 만나를 먹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만나로 상징 된 생명의 떡을 먹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요한복음6장 48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오늘 주님께서 광야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이 기적은 예수님이 인류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진정한 생명의 떡인 주님의 몸을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광야 생활에서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단 하루를 먹을 정확한 양의 만나만 거둘 수 있었습니다.
먹고 남기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행한 기적에는 떡과 고기를 모든 사람의 원대로 먹고 남아 열두 바구니에 거두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바구니에는 그들을 통해 각 국에 전해질 생명의 복음이 담겨진 것입니다.
복음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에도 전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오늘 본문 가운데 숨겨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마치 숨은그림찾기 처럼 주님의 구속과 사랑이 구절마다 담겨있음을 보고 은혜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오늘 주님이 나누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받아들고 놀라워하는 군중들 처럼 성경 말씀을 읽으며 그 속에서 거니시며 매일의 양식을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이 날마다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두 번 째로 이 기적에 앞서 박약한 믿음이 드러난 제자 빌립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묻습니다.
5절에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리고 이어서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고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오천명의 군중들이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는 감동의 현장을 지금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는 때가 저물었고 그 곳이 빈 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저녁 밥을 먹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필 빌립이라는 제자를 꼭 찝어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십니다.
이미 작정 된 기적을 두고 주님은 빌립을 이 기적의 현장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이십니다.
주님이 잘 쓰시는 방법임을 우리가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우리를 위해 행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 방관하던 우리를 진지한 삶 속으로 끌어들이십니다.
문제를 통해 우리를 반추하고 고민하고 싸우는 가운데 비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방법이 드러납니다.
주님이 신실하게 내 삶을 이끌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방관자로 서 있으면 아무리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하더라도 내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질문이 떨어지자 비로서 빌립은 머리를 쓰고 이 문제를 생각합니다.
오천명에게 떡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최소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내놓습니다.
일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일일 품삯입니다.
요즘 시세대로 일당을 10만원으로 계산한다면 2천만원의 거액입니다.
그것으로 남자들 수만 오 천명 이상이니 여자와 아이를 포함해 최대 만명 까지 먹인다면 일인당 2,3천원 어치 정도를 먹일 수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 그런 돈이 있을 리도 없고 어디서 2천만원 어치 떡을 일시에 살 수 있겠습니까?
빌립의 말을 들으면 이 말씀을 물으신 예수님을 오히려 답답해 하는 느낌입니다.
문제가 우리 앞에 닥쳤을 때 우선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을 총동원하는 우리들과 너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궁리해서 계산은 나올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6절에 예수님은 분명히 주님이 어떻게 하실지를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이미 이 문제의 해결책을 갖고 계시고 결말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죠.
주님은 사실 이 기적을 앞에 두고 항상 합리적인 이성을 앞세우는 빌립의 믿음에 도전하고 계십니다.
그는 의문이 많았고 상당히 조심스런 성품인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12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헬라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립에게 청합니다.
그때 그는 덥썩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가지 않고 안드레에게 이 이야기를 먼저 의논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둘이 같이 가서 예수님께 이 말씀을 전합니다.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죠.
그러나 신중하고 따지는 만큼 믿음을 갖기도 그만큼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은 예수님을 관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순식간에 고침을 받는 것도 무수히 보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본 다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인간과 그렇게 똑같은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는 도대체 어떠실지 궁금증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 예수님 말고 하나님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메시야임을 미심쩍어 하는 마음이 드러나고 맙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표적을 대라고 다구쳤습니다.
마가복음 8장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 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과 다르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와 다르지 않듯이 하나님도 우리와 결코 다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음을 잊으셨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서 뵈올 하나님은 기이하거나 두렵거나 난생 처음 보는 낯선 생명체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재현하신 분이십니다.
심판의 주님 앞에 인간들이 두려워 떠는 것은 하나님의 두려운 외모가 아니라 거룩과 공의와 권능 때문이십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믿음의 약점을 아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사실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약점 또한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을 통해 그것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돌파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주님은 현실을 뛰어 넘지 못하는 빌립의 믿음을 도전하십니다.
모든 이성과 합리성과 자연세계를 뛰어넘고 다스리는 능력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잠언 3장 6절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날마다 앞에 있습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천명에게 식탁을 베푸신 주님께 우리의 모든 문제를 가져가 의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반드시 우리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주님은 빌립의 부족한 믿음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통해서라도 그의 믿음을 붙잡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의심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다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불완전한 믿음은 사도행전2장 1절에 오순절 성령님이 강하게 임하셨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선포하는 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스구디아인에게 전도하다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현실이 더 무겁고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가 부족해서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일하시기를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믿음의 연약함을 기도하며 도우심을 구할 때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셔서 문제를 뛰어넘을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
세 번 째로는 오늘 기적의 수혜자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 멀리까지 까마득히 주님 앞에 모여 선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셨다는 의미는 단지 눈으로 본 것 이상을 말합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끼니 때가 지난 줄도 모르고 주님께로 끝도 없이 몰려듭니다.
주님은 상한 마음과 갈급한 영혼을 채우기 위해 먼 길을 걸어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아시고 그들을 보고 계신겁니다.
요한복음10장27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육적 굶주림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떡을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실 때 주님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5장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굶주림을 반드시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이가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보는 것은 자신의 고통보다 더 합니다.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비통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기근이 어찌나 극심했는지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그 때 기자는 그 가운데 살아있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로 배만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백살 노인과 같았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기자가 과일 하나를 갖고 있어 그것을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 조차 없었습니다.
기자가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겨우 걸어 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온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이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던 소년의 동생은 살아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기갈로 죽어가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마지막 남은 살 한 점 까지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오천명에게 떼어 먹이신 떡은 바로 우리를 위해 떼어 주시는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 없고 광야와 같이 메마르고 굶주린 곳에 내던져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몸을 주신 주님은 부르짖고 구하는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기적 속에 숨겨진 작은 헌신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오늘 자신의 도시락을 주님께 드린 한 아이입니다.
오랜 시간 주님을 따르며 사람들은 준비한 모든 음식을 이미 다 먹어 치웠습니다.
기름진 것 하나 없는 박한 음식에 늘 허기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가 왜 아직 도시락을 먹지 않은 채 들고 있었을까요?
마가복음6장31절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바쁘고 힘겨웠는지가 나타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아이는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모습을 오늘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느라 식사조차 거르고 계심을 유심히 본 것입니다.
자기의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이었지만 한가한 틈을 타 주님께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천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그들이 쉽게 아이의 도시락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작은 것이나마 드리길 원합니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들의 몸을 화목제물로 삼고 우리를 받으신 사랑을 우리가 입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가진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은 사랑, 작은 헌신, 작은 마음을 드릴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어리지만 주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감사를 보답할 길 없어 수줍게 도시락을 드리고 군중 틈에 사라져 버린 작은 아이를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어떻게 모든 것으로 그 아이를 축복하지 않았겠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뉘엿이 해가 지는 푸른 잔디 위에 사람들은 무리지어 앉아 주님의 손을 통해 떼어지는 떡을 받아듭니다.
주님이 주신 음식은 화려한 부폐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낮고 소박한 보리 떡과 소금에 절여 말린 물고기 조각이었으나 인간을 친히 찾아오셔서 인도하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만난 그들은 행복에 젖어있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그들은 메시야와 함께 있는 즐거움과 흥분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머물렀습니다.
오늘 천국의 식탁이 그들 앞에 베풀어졌듯이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날마다 말씀과 위로로 축복의 식탁을 차려주신 줄 믿습니다.
본문의 장면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따뜻하고 흐믓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천국의 식탁으로 인도하여 부족함 없이 베풀어주실 주님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이 신실하신 주님을 향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지금 나의 환경이 광야와 같을지라도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나를 짓누를지라도 주님의 손이 베푸실 기적을 바라며 주님 앞에 나가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길을 견디지 못하고 기진할 것 같으면 반드시 우리 손을 잡으십니다.
우리의 목자 되어 인도하시는 주님과 손잡고 함께 걸어 천국까지 이르시는 인생길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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