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중에 최후의 만찬이라는 벽화가 있습니다.
모두가 한 번쯤은 어디서건 이 그림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어릴 적 어느 집에 벽에 스킬자수로 된 이 최후의 만찬 그림이 걸려 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만큼 유명한 그림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이 그림이 예수님과 열두제자라는 것은 다 알 것입니다.
몇 년 전엔 댄 브라운이란 소설가가 이 최후의 만찬에 나온 그림을 제멋대로 해석해 다빈치 코드라는 사단적인 추리 소설을 써내 돈방석에 앉았던 주제가 된 그림이라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태리의 밀라노에 있는 한 성당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는 이 유명한 그림은 오늘 본문에서 읽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한 마지막 저녁 식탁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 후면 이 땅에 오신 목적 대로 체포되어 십자가에 죽어야했기에 그동안 3년 반을 함께 했던 사랑하는 제자들과 지금 애틋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식사 중에 일어나셔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내용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으나
오늘 예수님의 세족식에 담겨있는 깊은 뜻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흙먼지와 동물배설물이 뒤섞여 조금만 걸어도 금방 발이 더러워지게 이스라엘의 비포장 도로입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맨발이나 다름없는 샌들 형태의 신을 신고 있었기에 밖을 조금만 돌아다녀도 발은 금방 엉망이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집에 들어가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발을 씻는 일이고 대개는 종들이 이 일을 합니다.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도 제일 먼저 받는 대접은 발을 씻겨 주는 일이죠.
먼지와 때로 범벅이 된 발로 교제를 나누고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일행은 은밀한 장소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큰 명절로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시골지역을 무대로 삼아 사역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셨는 데 이 명절을 함께 보낼 장소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26장17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어봅니다.
그 때 예수님이 참 희한한 지시를 하십니다.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신다 라고 말하면 그가 준비 된 장소로 안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성내에 들어가서 물 한 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에게 가서 라고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달리 방법도 없고 해서 성 안으로 들어 갔는 데 마침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거라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자 그 사람이 즉시 모든 식탁이 차려진 큰 다락으로 안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 집주인은 평소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주님이 명절에 올라오시면 자기 집에 모시고 싶은 소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무작정 다락을 준비해두었고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이미 아시고 그의 집을 마지막 만찬의 장소로 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시면 잡아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고 집주인도 유대인들에게 들킬 새라 은밀히 이 일을 진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유월절 만찬의 장소엔 예수님 일행을 성대하게 환영할 수 없었고 발을 씻겨 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더러운 발 그대로 자리에 앉아 저녁밥을 먹게 된 것이죠.
그 때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다가 일어나셔서 갑자기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발로 밥을 먹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1절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더러운 것을 씻겨주려는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장면 좋아하잖아요?
꼬맹이를 데리고 중국집에서 엄마가 자장면을 먹이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아이들은 제 손으로 먹겠다고 난리죠.
결국 아이 손에 포크를 쥐어 준 엄마는 아이가 이러저리 얼굴에 쳐발라서 자장으로 범벅이 된 아이 얼굴을 연신 닦아 줍니다.
어차피 또 묻을 건데 다 묻치고 나중에 닦자 하고 내버려 두는 부모는 못 본 것 같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잠시라도 아이가 더러운 몰골을 하는 것을 참기 힘들어 합니다.
입원실에서 간혹 아무 의식도 없는 사람을 물수건으로 구석 구석 깨끗하게 닦아주는 모습을 보면 가족에 대한 진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깨끗이 씻겨서 남이 볼 때 무시당하지 않게 하는 게 본능인 것 같습니다.
동물도 제 새끼를 핥아서 깨끗하게 하더라구요.
요즘은 그렇지 않은 데 왜 옛날에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 이름표하고 손수건을 하나 접어서 옷핀으로 채워주지 않았습니까?
그 때 애들은 왜 그렇게 코도 많이 흘렸는지..
엄마의 치맛자락으로 코를 닦아주던 모습은 길거리나 시장어디서건 흔히 보던 모습이었습니다.
이젠 엄마를 떨어져 학교에 가니 더러운 몰골로 다닐게 걱정되서 수건이라도 하나 달아주는 것이었죠.
지금도 학교 갔다 돌아오는 어린 자녀에게 엄마는 제일 먼저 얼굴과 손발을 깨끗하게 씻겨줍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발씻어줄 사람도 없이 숨어서 마지막 저녁밥을 먹어야 하는 제자들이 측은하셨을 것입니다.
더러운 그들의 발을 바라보니 이젠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할 사랑하는 제자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울컥 올라오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누구에게도 대접 받지 못할 그 발로 온 천하를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할 험난한 제자들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 사랑 때문에 아픈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꼼꼼이 씻겨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도 이와 똑같습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종처럼 옷을 벗은 몸으로 무릎을 꿇고 우리 발을 닦아주시길 주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다면 어떤 섬김과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아무리 주님의 말씀 대로 살아가려 마음먹어도 우리의 마음은 매일 세속적인 생각과 죄로 더러워집니다.
걱정과 근심도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러운 채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 앞에 나가면 언제든지 우리를 깨끗케 씻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이 씻지 못할 죄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앞에 더러워진 우리의 발을 내밀고 씻음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죄사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본문1절에 보면 유월절 전에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유대인의 대 명절 유월절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찰톤 헤스톤이 모세로 열연했던 영화 십계를 보신 분이 많으실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의 노예로 착취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탈출하는 출애굽기의 내용을 주제로 한 영화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이 영화를 보았는 데 그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가 200만의 유대인 노예를 순순히 해방시켜 줄 까닭이 없죠.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놓아 줄 때까지 순서대로 열 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 모든 집의 첫째 아들과 첫 번째 난 가축의 새끼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죽음의 신이 이집트 온 땅을 다닐 때 한 가지 피할 방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집집마다 어린 양 하나를 잡아 그 피를 문 위와 좌우 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건너 뛰어 넘어갈 것이란 것입니다.
영화에서 푸른 죽음의 기운이 이집트 온 땅에 임해 이집트 왕궁부터 시작해 온 집의 문 틈으로 스며 들어 가자 사방에서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터집니다.
이집트왕도 죽은 아들을 안고 자기 신의 제단을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죽음의 연기가 이스라엘 집에도 가까이 다가오나 양의 피가 발라져 있음을 보고 지나쳐 가던 장면이 너무나 엄숙하고 신비해서 믿지 않던 저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마지막 재앙이 임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이집트의 바로왕은 노예로 부려먹던 이스라엘을 풀어 주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이 보내고 있는 유월절이라는 명절은 바로 구약시대에 있었던 그 날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 같은 날입니다.
유월이라는 말은 뛰어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양의 피를 바른 유대인의 집을 뛰어 넘어간 것을 말합니다.
이 유월절과 어린 양은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을 예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예표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사도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7절에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전에 제자들을 씻어주시며 주님의 죽음이 인류의 더러운 죄를 씻어주기 위함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사코 발씻기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본문의 8절에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을 믿을 때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고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이 나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임을 믿으십니까? 아멘.
우리가 믿지 않으면 예수님과 우리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7장23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을 믿고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세 번째는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로 믿고 있던 예수님이 종처럼 웃통을 벗고 무릎 꿇어 자신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을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는 것도 아니고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이 손수 자기의 발을 씻겨주시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겠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얼떨결에 발을 내밀었지만 나름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8절에 보면 좀 쎄게 나갑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이죠.
그렇잖아도 그들은 서로의 더러운 발을 보면서도 나는 종이 아니니 저들을 씻겨줄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발이 더러운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물을 떠서 씻겨드리지 않았습니다.
내심 예수님의 씻지 못한 발이 마음에 걸렸을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서서 자기를 씻기시는 그 상황이 수제자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더러운 발을 뻔뻔하게 주님 앞에 내밀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발은 그 사람에 대해 참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사람의 발을 보면 정말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람 앞에 발을 선뜻 내어놓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감추어 두었던 것을 다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런 걸지 모릅니다.
여자들의 발도 고운 얼굴과 달리 험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굴은 늘 남에게 드러내고 보여주어야 하기에 꾸미고 가면도 쓰지만 우리의 발은 무방비 상태입니다.
비뚤어진 발가락과 습진 걸린 발톱과 못 박혀 딱딱해진 발바닥 같은 것은 감추지 않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발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 앞에 앉아 이런 우리의 고단한 발을 씻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완전한 사랑에는 자존심이 없습니다.
자녀의 코를 닦아주고 뗏국물 흐르는 얼굴을 닦아주고 발을 씻겨주는 부모에게 자존심이 왠말입니까?
예수님은 7절에 한사코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지금 이 순간에는 선생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사랑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베드로이지만 앞으로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주님이 왕권을 잡으면 누가 최측근이 되어 영광을 누릴 것인지를 다투며 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섬김의 삶을 살게 될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참 하나님이셨음을 알고 난 후에,
주님이 승천하시며 베드로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준 후에,
오순절 다락방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 후에야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셨던 사랑을 이해합니다.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고 예수님의 최측근을 누가 넘볼까 민감했던 베드로도결국 베드로후서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이라고 자신을 종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교회와 주님의 자녀들을 섬기다가 결국 장렬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영화배우 데보라카와 로버트테일러가 연기한 쿼바디스란 영화가 있습니다.
다 우리 중학교 다닐 때 쯤 나온 영화입니다.
초대교회를 부흥시키고 섬기며 어느덧 노인이 된 베드로는 극악한 황제 네로가 로마를 불태우고 그 잘못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워 박해 할 때 로마를 도망 나오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그 유명한 말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어린양들이 로마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네가 버린 내 양을 위해 나는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로마로 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박해 가운데 있는 로마 교회로 돌아갑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위대함은 섬김에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20장28절에 주님은 말씀하시길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4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 43절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장 온전하게 섬기신 분이니까요.
이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주님이 사랑을 많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 발을 씻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데이빗 케이프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국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던 중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거리로 나가 내 대신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어라 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순종했고 나무십자가에 세수대야를 걸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가 사람들의 발을 씻겨줍니다.
그 곳이 어느 곳이던 주님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순종합니다.
내란으로 초토화 된 수단의 난민수용소와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섬과 걸프전이 발발한 이라크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음성에 그 곳에서 목숨을 건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가 들어간 곳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 주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씻어줄 때 나병환자의 발이 낫고 마약중독자가 치유를 받습니다.
한번은 그가 남아프리카의 나탈이라는 마을의 아름다운 사탕수수밭을 지날 때 였습니다.
한 늙은 농부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며 맨발로 걷고 있었습니다.
다가가 보니 노인이 아니라 어린 소년 나병환자였습니다.
그의 발을 보니 그동안 그가 보았던 발 중에서 가장 참혹한 발이었습니다. 진물과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고 이미 발가락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때 그에겐 대야와 물통은 있었으나 수건이 없었기에 그를 지나쳐 지나갔습니다.
열 발자국을 걸어갔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돌아가서 그의 발을 닦아주어라. 그에게 나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아서 나의 마음이 슬프구나.
데이빗은 즉시 뒤를 돌아가서 그의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상하고 피범벅이 된 발을 닦아주며 그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발을 다 닦았으나 그에게 수건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너의 웃옷을 벗어 닦아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은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이는 듯 했지만 웃옷을 벗어 그의 발을 닦아주었습니다.
그의 옷에 피와 진물이 범벅이 되며 끈끈하게 적셔졌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피가 십자가 위에 묻고 있는 것처럼..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 저는 몸서리가 쳐집니다.
지난 주에 치과검진을 받고 스켈링을 하는 데 얼마나 손에 진땀이 나고 긴장이 되는 지 나오니 어깨가 뻐근할 정도 였습니다.
나를 고치려는 의사의 손길에도 이렇게 두려운 데 예수님은 로마군사들이 죽이려고 달려들어 때리고 못을 박고 창으로 찌를 때 그 고통이 어떠했을 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비로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우리가 아주 조금씩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느낀 그 어떤 것과 비할 수 없는 기쁨이고 형언할 수 없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맛 본 사람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다시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아는 것 만큼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형제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데이빗 케프 목사님이 20년째 이 섬김을 계속하는 것은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그 사랑이 그를 강하게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이 섬김에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종의 마음을 갖고 내려오셔서 섬기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더러운 것을 닦아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발 아래 앉으셔서 우리를 사랑으로 섬기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기일 때 발아래 앉아 기저귀를 갈아주고 발에 입맞추던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시고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많이 성장하셨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젠 형제를 돌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아이는 작은 아이를 돌보아야 하고 아직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형제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렇게 사랑 안에서 한 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즉각 순종하며 행하려고 합니다.
14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어주려고 합니다.
가족이라는 사랑으로 묶여 살고 있지만 우리의 사랑은 악하고 험한 세상을 살다 어느새 병들어 있을 수 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고 완전한 사랑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사랑하는 우리 식구들의 발을 씻어주길 원합니다.
당신의 발을 주십시오.
세상의 험한 길을 걸어오느라 피곤하고 지친 발을 저에게 주십시오.
당신의 거친 발은 나를 위한 수고의 발임을 잠시 잊고 있었군요.
내가 사랑으로 섬겨야 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나봅니다.
어느새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에 쫒겨 살며
당신의 고단한 마음과 힘이 풀린 발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당신을 보내주신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은
당신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뜻임을 되새기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사랑이 어느새 나만을 섬겨 달라는 이기적인 사랑이 되었나 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고통가운데 있는 당신의 발을 내밀어 주십시오
감춰두었던 당신의 고통을 이제 내가 안고 가려 합니다.
내 결심이 약해질 때 함께 기도해주세요.
내 힘으로는 온전히 당신을 사랑하며 섬길 수 없어도
주님의 사랑으로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서로를 섬기려고 씻어줍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슬픔도 다 씻어주시옵소서.
우리의 눈물을 씻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눈물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치유 받고 또 다른 사람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며
치유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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