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15장1절-12절)

남수연 2011. 2. 15. 18:39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설교의 요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내 안에 거하라입니다.

본문에는 거하다라는 단어가 아홉 번 나옵니다.

내일이면 제자들을 떠나가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라고 거듭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가 좀 힘듭니다.

떠나갈 사람은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관계했던 것들을 끊는 것이 보통입니다.

싱가포르를 빈국에서 부국으로 끌어올린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전 총리는 얼마 전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살던 집을 헐어버리라는 유언을 미리 남겼습니다.

자신의 집이 국가의 '성지'로 보존될 경우 이웃 주민들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힐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집을 보존하면 당연히 도시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길 것이니 아예 집을 헐라는 것입니다.

30년간을 총리로 지내며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부국으로 성장시킨 사람의 정치관이 묻어나는 유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이었다면 주님은 삼년 반을 함께 거주하며 하늘나라의 사역을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 독립해서 살아갈 방법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젠 주님을 빨리 잊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강하게 살아가라고 유언을 남겼을 것입니다.

권0재 시인의 시 가운데 최근 작 단디해라 라는 시가 있습니다.

식전 첫 기차를 타고 객지에 첫발을 내 딛는 아들에게 했던 어머니의 말입니다.

병상에서 마지막 호흡을 몰아쉬며 홀로 남게 될 아들을 향해 토해낸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니, 단디해라.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는 인간은 보통 남겨진 사람이 독립해 홀로 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유언은 정 반대로 너희는 내 안에 단디 붙어있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능력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소리입니다.

주님의 몸은 우리를 떠나시겠지만 신비한 연합으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바로 이 사실을 각인시키려고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 땅에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에서 풍족한 열매를 맺고 싶어 하죠.

어떤 사람은 정말 대박 나게 열매를 맺은 생애를 살며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은 밥과 김치를 좀 달라는 메모를 남기고 죽어간 한 작가의 궁핍한 인생을 보면 그 열매 없는 텅 빈 생애가 너무나 가련하기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인생의 비법을 살펴보려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귀를 열어주셔서 소중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시고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예수님이 본문에서 자신을 왜 참 포도나무에 비유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려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의 민족으로 선택하시고 포도나무로 비유하심을 구약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에 금으로 조각 된 포도나무도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편 80장8절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또 예레미야 2장 21절에도 이스라엘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그러나 선택 된 민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구원의 열매를 맺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이사야5장2절에 보면 그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하나님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죠.

그 결과는 하나님이 원하신 극상품의 포도가 아닌 먹을 수 없는 들포도를 매단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그 누구도 영생에 이르는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설령 그 인생이 갖은 노력으로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는 열매가 맺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생의 열매가 아닙니다.

많은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악한 영향력과 죄악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 까지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호세아 10장 1절에는 세상의 열매를 이렇게 단정합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세상의 축복으로 그들이 한 일은 이방신의 제단을 더 많이 만들고 우상에다 금칠을 했다는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풍성한 세상의 열매는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게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인간에게 무슨 선한 일을 할 의지가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로마서 3장 10은 선고하지않습니까?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스스로 맺을 수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먹을 수 없는 들포도를 맺을 뿐이고 하나님이 원하신 포도송이를 달지 못한 악한 나무들의 결국은 땔감으로 불에 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불 속에 영원히 고통당할 수 밖에 없는 인류를 접붙이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한 나무를 준비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생명나무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이사야 27장에서 선지자는 이 세상 마지막 때 땔감이 되어야 할 포도나무인 온 인류가 회복될 것을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용으로 비유된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신 후 하나님이 다시 아름다운 포도원을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에서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 진 것을 보십시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접붙여진 하나님의 아름다운 포도원의 나무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마지막 밤을 기도하며 보내기 위해 감람산으로 향하셨습니다.

기드론 계곡 옆에는 시냇가를 따라 넓은 포도밭이 있습니다.

주님은 포도밭을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주님께 접붙임으로 하나님의 포도원을 아름답게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실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모두들 붙어있으십니까? 아멘.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가지 된 제자들에게 당부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시길 바랍니다.

 

첫째는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2절에 보면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거하다 라고 해석 된 단어는 쳐들어 준다 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가지 된 우리를 아무렴 열매가 없다고 매정하게 쳐버리시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말을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쳐진 가지를 받쳐 준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본문대로 해석한다면 열매를 맺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니 가짜 믿음이었구나 로 보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가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 짜퉁인지를 밝혀준다는 것이죠.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믿는 줄 알았는 데 알고 보니 거짓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열매가 없다는 것은 가지치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농부들이 포도 농사를 지을 때 수시로 하는 일이 가지를 잘라주는 것입니다.

무성하게 자라기만 하는 넝쿨 손을 그냥 두어서는 농사를 망쳐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일하는 농부로 표현하신 것은 열매를 거두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계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생이 풍족한 열매를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돈이나 명예나 행복한 가정이나 건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열매를 말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죽을 때 가져갈 수 가 없는 열매는 오늘 예수님이 맺으라는 그 열매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한 번 뿐인 이 땅에서의 인생을 불타 없어질 열매들을 거두기 위해 다 허비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할 돈이 어떤 것인지 전도서5장11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5절입니다.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런 재물을 얻으려고 모든 인생이 눈이 벌겋게 허덕이며 달려가는 것이죠.

프리드만 이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행복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데 영향을 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돈, 건강, 지위와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행복지수와 가장 상관있는 것은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행복한 삶, 풍성한 삶의 요인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맺으라는 열매가 바로 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주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사랑하라고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이 무조건 나쁜 열매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큰 재물을 모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많은 재물을 맡기십니다.

아브라함도 거부였고 다윗과 솔로몬도 중동의 금과 은을 거의 다 긁어모았던 사람들입니다.

돈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이면 죽을 때 가져가는 재물이 될 줄을 믿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6장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지금도 많은 기독 기업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기업을 합니다.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회적 기업을 하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그런 재물이 하늘에도 가져가는 재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재능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면 죽을 때 가져가는 재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그런 열매를 우리 삶에 맺으라고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천국 까지 가져 갈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아멘.

 

둘째는 열매 맺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 다는 것입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는 열심히 수액을 빨아들여 가지에 양분을 공급하고 농부는 벌레를 죽이고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하며 부지런히 나무를 돌봅니다.

그러면 가지에 드디어 열매가 맺히고 결실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아라. 가지에 맺힌 아름다운 열매들을.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저렇게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내가 참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이니 내게 붙어만 있거라.

그러면 절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이 어리석고 이해가 더딘 우리를 위해 가장 쉬운 비유를 가지고 영적 원리를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 할 일은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한 나무이듯이 우리가 주님께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고 또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나는 절대로 주님께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있겠다고 결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인생을 살아가며 절절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5절의 말씀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정적인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안에 완전히 거할 때 우리의 삶이 성령의 에너지와 활력으로 놀랍게 바뀌는 것을 봅니다.

주님이 함께 하셔서 역경 속에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영생에 이르는 아름다운 열매를 가득 달고 사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9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어디에 비유하십니까?

하나님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들 보면 누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자기를 제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도 누가 자기를 제일 예뻐하는지 알고 졸졸 따라 다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깨달을수록 우리가 안심하고 주님께 달라 붙을 수 있는 것입니다.

멀찍이 주님을 따르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을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한 예수님의 사랑을 안심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과 함께 끔찍한 수치를 감당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TV에서 뉴욕미술관의 소장 된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얼핏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림이 화면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제게 너무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감이 갈라지고 색이 퇴색되어 낡은 그림 속의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더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흩어져 늘어져있고 핏기하나 없이 창백해 거의 시체가 된 예수님이 모습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보아오던 것과 달리 하체를 가린 수건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녀들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은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극도의 고통과 함께 참기 힘든 수치심 속에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수치심까지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요즘은 기도할 때 그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나 큰 희생으로 나를 구원하신 사랑에 절로 눈물이 납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 옷이 벗겨진 것도 모르고 잠든 내용이 나옵니다.

아들 중 흑인의 조상이었던 함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거리 삼아 형제들에게 얘기합니다.

나중에 그것을 알고 노아는 그의 후손들이 형제들을 섬기는 비천한 삶을 살게 되리라 예언합니다.

좀 지나친 처사가 아니었나 의문이었는 데 그 그림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과 같은 피조물 앞에서 벌거벗고 수치를 당해 죽어가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는 무리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내린 심판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이긴 사랑이 주님의 사랑임을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을 더 신뢰하며 주님께 딱 붙어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지금도 변함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에게도 똑같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믿으면 예수님께 접붙여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다음에 주님은 매일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시고 그것을 실천할 믿음과 힘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되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뗄 수 없게 되어 동행하시고 우리가 주님, 하고 부를 때 즉시 주님이 들으신다는 것이죠.

주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느끼며 주님 안에 깊이 거할 수록 우리가 주님을 닮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능력의 길이란 책을 쓴 댄 바우먼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997년 이란으로 단기 선교를 갔다가 간첩행위를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9주간을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 곳에서 나가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이 엉뚱했습니다.

내가 여기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에게 물어 보려무나

그가 그것을 묻고 싶었겠습니까?

그저 빨리 나가기만을 원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너무나 분명해서 억지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폭행하고 고문하는 이 사람들을 주님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님의 마음이 그에게 부어졌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도 조차 차별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부어지자 비로서 그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지옥과 같은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감방에 쓰러져 있는 그의 귀에 밖에서 간수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난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가 없네. 분명히 고문당하다 죽을 줄 알면서도 왜 자꾸 오는거지?

죽이려는 우리를 위해 도대체 왜 자꾸 기도하는거야?

그때 그는 자기 방에 도청장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바우먼이 감방에서 자기를 고문하던 간수들과 자기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다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전에 들은 적이 있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중 세 명이 제소자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9주 후 바우먼은 간첩죄로 마지막 사형 판결을 받는 재판석에 섰습니다.

그러나 판사가 낭독한 판결문은 무혐의로 석방한다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재판석에서 내려와 바우먼을 뜨겁게 포옹하는 것이었습니다.

감방에서 한 기도를 도청하며 예수님의 사랑이 그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대로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조차도 사랑할 때 사탄의 견고한 진을 부수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전도대상자가 있습니까? 사랑하셔야 전도의 열매가 맺힙니다.

사랑할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 두 가지 약속을 보장하십니다.

7절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 거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해주시고 완벽한 주님의 뜻대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날마다 담대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고 보장 된 또 하나의 약속은 11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 안에 거하는 우리를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때로 세상이 주는 즐거움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우리를 변치 않는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지 못합니다.

더 큰 즐거움과 더 큰 쾌락을 좇다 파괴되는 인생을 수없이 봅니다.

기독교는 자청해서 고난 당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주님이 주시는 알 수 없는 기쁨에서 옵니다.

오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주님이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충만하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약속대로 이 기쁨은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기쁨이 너무나 충만해서 감옥에서도 주님을 높이고 찬양했습니다.

사도행전5장41절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고난과 아픔이 따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환경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하고 충만한 기쁨을 주시며 함께 하실 줄을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 보다 혼돈되고 영적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내게 붙어있어야 네 인생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너의 구하는 것을 줄 것이고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하루가 얼마나 바쁘고 고단합니까?

그러나 자주 고개를 들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상심하고 낙심될 때 내 안에 거하는 주님을 향해 간절히 도움을 구하십시오.

주님께 우리의 관심을 더 집중하고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갖고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 삶에 영생에 이르는 각양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