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주님의 살과 피 (요한복음6장47절-59절)

남수연 2012. 12. 5. 13:46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성례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에서 거룩하게 행하는 두 가지 의식인 세례와 성찬을 말합니다.

세례의 명령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하신 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성찬은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명하신 것입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 두 가지 거룩한 의식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죄악 가운데 태어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 것을 하나님과 공회 앞에서 서약하는 의식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상기하고 감사하는 의식입니다.

교회는 주님 오실 때 까지 이 성례를 지키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으로 주신 이 성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고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경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오늘 성례에 참여하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은혜를 누리게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성찬에 의미를 나눈 뒤에 성례를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설교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아주 리얼하게 우리 감각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의 몸을 쪼개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조각을 받아 먹어야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이죠.

러시아에 페리칸이란 새가 있습니다.

어미는 턱에 달린 부리 주머니에 물고기를 잡아서 담아두었다가 한 겨울을 납니다.

러시아의 추운 겨울 동안 물이 꽁꽁 얼어붙어 먹이를 구할 수 없을 때 턱주머니에 담아두었던 고기를 새끼에게 먹이는 것이죠.

그런데 먹이가 다 떨어지고 새끼들이 굶어죽을 위기가 오면 어미는 자신의 몸을 뜯어서 새끼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엄동설한을 지내는 동안 어미는 서서히 죽어가고 새끼들은 살아서 봄을 맞이하는 것이죠.

자식이 죽어간다면 부모가 살인들 베어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며 죽으심으로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사실을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머리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사실과 체험으로 믿어야 완전한 것입니다.

오늘 떡을 나눌 때 내 입에서 카스테라의 단 맛이 나고 포도즙의 향기가 감돌다 목으로 넘어가는 생생한 감각처럼 믿음이 체험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가 나를 구원하신 영적인 원리를 나누려고 합니다.

2천년 전 이 말씀을 들었던 유대 군중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해 영생의 기회를 놓쳤지만 오늘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수천 년을 준비하신 게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주님의 탄생부터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과 그 의미들을 죄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시청각적인 교과서를 만들어 놓으신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많이 배우고 알아야 우리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게 됩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보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해 두신 작업이 바로 출애굽 40년 광야생활에서 먹었던 만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만나사건을 가지고 참된 생명의 떡인 주님을 증명해 가시는 게 6장 전체와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간 식량을 구할 수 없는 불모지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 만나 덕택이죠.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방법이 아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그들을 먹이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면 사막에서인들 쌀보리가 자라게 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이 땅의 식물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이 너희를 살린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 만나를 내려주시며 말씀하신 것이죠,

기억해라, 사람이 이 땅의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양식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40년 동안 만나를 먹은 모세는 이 만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신명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신명기 83 (하나님이)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본문을 기록한 요한사도는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란 걸 1장에서 선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만나는 그림자일 뿐이고 실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먹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40년간 만나를 먹이시며 하늘에서 내려오실 생명의 떡 예수님을 질리도록 보이시고 또 보여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40년간을 매일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는 연습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의 역사 속에서부터 계시되었던 생명의 떡이라는 걸 입증하시려고 하루 전날 의도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죠.

예수님의 손에서 신비스럽게 떡이 공급될 때 사람들은 주님의 의도대로 광야의 만나 사건을 떠올립니다.

유대인들 역시 모세 때 만나와 같은 기적으로 고달픈 자신의 삶을 구원할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예언하기를 후일에 하나님께서 너희 중에 나 같은 선지자를 보낼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따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본장의 14절을 보면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리고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추대하려는 분위기로 웅성거렸습니다.

알아보긴 했는 데 그들이 오해한 것은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이 땅의 지도자로 생각했다는 것이죠.

영원한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이상은 깨달을 수도 느낄 수도 없고 관심조차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엄연히 헤롯왕이 집권하고 로마제국이 나라를 식민통치하고 있는 상황에 잘못하면 큰 쿠테타가 일어날 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도망가셨고 다음날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어서 바로 이 생명의 떡 발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정곡을 찌르는 말씀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 온 이유는 영적인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단지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습니까?

요즘 말로 하면 너희가 교회 나오는 이유는 사업 잘 되고 병고치고 아이들 대학 잘 들어가기만 바래서라는 말씀이죠.

이 말씀에 발끈해진 유대인들과 논쟁을 주고받고 하시며 예수님은 그들의 관심을 영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정말 너희들이 내게서 얻어먹어야 할 것은 어제 먹었던 떡과 생선이 아니고 바로 내 몸이라는 것입니다.

51절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게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냐 했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괴변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52절을 보면 그들이 어이없어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리고 그들이 소동하여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 해석하면 이 말씀을 두고 논쟁하다 너무 화가 나 거의 치고받는 수준으로 싸움이 붙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들이 열렬히 주님을 추종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선지자에 매료 되었고 어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는 순간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조급하게 달려들고 공약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 내용이 본문 앞 부분에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40년 동안 만나를 주어 우리 조상을 먹여 살렸는 데 당신은 어떤 표적을 보이겠냐고 묻습니다.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떡을 우리에게 먹여줄 수 있냐는 것이죠.

요즘 선거공약식으로 말하면 가난하고 굶주린 우리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할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유대인들의 화를 불러 일으키고 싸움판이 되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줄 것은 만나도 아니고 기적을 통한 빵문제의 해결도 아니고 로마제국에게 빼앗긴 걸 찾아와 분배하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떡인 내 몸을 너희를 위해서 줄 테니 그걸 먹고 영생하라는 것이죠.

그러니 기적의 황홀함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를 기대했던 군중들이 실망감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믿음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염려의 소리가 높습니다.

천국의 소망과 영생에 대한 관심보다 이 땅이 전부인 것 같이 현실 축복에 몰두한다는 것이죠.

영광스럽다는 내세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세계는 너무 사실적이기에 관심이 자꾸 이 땅에 것에만 쏠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 영생의 선물인 예수님 자신을 구하기보다 세상적인 가치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에게 가장 절박하고 가장 값진 영생을 제시하는 예수님께 실망해서 난동을 피우는 유대인들이 어리석어 보이십니까?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다를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끝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났고 한창 끓어 오르던 주님에 대한 인기는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그 때 남아있는 열두 제자를 향해 주님께서 물으시죠.

 

너희도 가려느냐?

그들은 주님을 먼저 섭취하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이 세상의 모든 삶에도 영원히 함께 하실 두 가지 복을 다 놓치고 떠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먼저 구하면 세상 것은 아버지께서 당연히 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물론 당장 삶을 꾸려야 하고 자식들 가르치고 직업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우리를 억누르지만 이 모든 것을 평안가운데 경영해 나가려면 먼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그 무리들이 떡 먹고 배부른 모습이 왜 싫으셨겠습니까?

수혈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자식에게 밥만 먹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먼저 죽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기적이나 베풀고 병이나 고쳐주시오.

볼 수도 없는 천국과 구원에 대한 설교는 그만하시오.

내 관심은 이 땅에서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오.

누구라면 다 알만한 미국 유명 목사님이 신간을 발표했는 데 아니나 다를 까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자가 인터뷰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자 그 목사는 자신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의 은사를 받았기에 그 문제만을 다룬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직 현실의 필요를 채우고 현실의 축복만을 생각하기는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죠.

주님은 가버나움의 군중들에게 더 이상 기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회개하고)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목적이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복은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결코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부와 명예가 하나님께 나가는 걸 막는다면 하나님아버지께서는 모든 걸 막으시도 하십니다.

죽음 앞에 서면 죽을 힘을 다해 쫒았던 세상의 물질과 행복이 다 무슨 필요였나 싶을 것입니다.

석유왕 록펠러가 죽었을 때 기자들이 몰려와 재산 관리자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가 얼마나 남기고 갔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 남기고 갔습니다.’

먼저 우리 영혼이 머물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본성에는 이 땅에서 안주하고 이 땅에서 당장 잘 되면 내세는 상관없다는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도 어느 새 이 세상을 영원한 것 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우리를 돌이켜 주님의 은혜와 영생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매일 예수님으로 먼저 우리의 영혼을 채우시길 축원드립니다.

주님을 묵상하고 말씀을 읽고 배운 말씀대로 살기 위한 매일의 노력이 매일 밥을 먹듯이 영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먼저 우리 영적인 허기를 채우시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필요한 모든 물질과 형통한 축복을 왜 마다하시겠습니까?

참 된 양식을 먹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때 물질세계도 더욱 풍성해지고 만족한 기쁨 가운데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능력으로 나타나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47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이미 생명을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은 죽고 난 다음 우리에게 주시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이미 영생의 씨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받는 것이 아니고, 막연한 상징도 아니고 실제 우리 속에 그 생명이 존재합니다.

이 땅에서 영생이 없으면 마지막 날에도 없습니다.

54절에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이미 영생을 가졌고 영생을 가진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겠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시잖습니까?

반대로 53절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의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아직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살과 피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 속에 천국에 이를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다른 사람 속에 생명이 있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안에 과연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이 있냐는 것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약속대로 우리의 마지막 날에 반드시 우리를 영화로운 몸으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영생을 얻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47절에 말씀하셨죠.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내 죄를 다 사하고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된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과 말로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구원의 확신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열0교회를 담임하는 김남0목사님이 처음 뜨거운 은혜를 받고 열심히 철야기도에 나가 목이 터져라 회개도 하고 눈물 흘리며 감사도 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 되면 일부러 교회에서 좀 떨어진 옛날 재래식 화장실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몰래 담배 한 대를 피웠답니다.

옛날 재래식 화장실 천장이 나무 판자 쪽을 듬성 듬성 못질 해 놓았죠.

담배연기를 뿜으며 위를 올려다보면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별이 보였습니다.

순간 그의 마음에 정말 하나님 계신 것 맞아?’이런 생각이 불쑥 올라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실에 들어가 기도를 하면 또 눈물이 나오는 겁니다.

그럼 맞아, 내가 왜 이렇게 울며 기도를 하겠어, 하나님 있는 게 확실 해.’

그런 과정을 겪었던 그 분 지금까지 은혜의 말씀으로 잘 목회하고 계십니다.

신앙의 연륜이 짧을 수록 아무래도 이런 믿음의 혼란이 자주 있을 수 있죠.

우리 의지와 힘으로는 절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신앙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서정이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속죄양으로 주신 엄청난 은혜를 믿으며 구원을 받지만 우리의 죄의 본성은 자꾸 자연인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마귀는 죄성을 부축이고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는 천국에 가기까지 치열하게 구원을 확신하며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죠.

죽음 앞에서 이 믿음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일본의 저명한 기독교사상가 우찌무라 간조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에게 내가 죽으면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을까?’를 수없이 물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인간의 연약함이 평생을 믿음의 길을 걸었던 노신학자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걱정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남에게 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당하고 주님을 사랑했던 동역자들이 믿음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또한 때로 감옥에 갇히고 몰매를 맞고 복음전도의 열매가 없을 때 낙심한 마음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테죠.

우리 마음에 이런 불신이 고개를 들 때 스스로가 얼마나 화들짝 놀라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괴로워하는지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연약한 우리 힘으로 어떻게 이 구원을 완성해 가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56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라니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사시되 실제 인격으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 안에는 지금 나라는 인격 외에 분명히 또 다른 인격이신 성령께서 존재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의 심정을 아시고 우리 형편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성도간의 교제와 같은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우리 믿음이 굳게 성장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례를 명령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따르는 것도 성례를 통해 더욱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어떤 시련과 환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믿음을 견고히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한 때 히딩크 감독 눈에 들었고 촉망 받던 골키퍼 차기0선수라고 있습니다.

심한 피곤을 이기지 못해 병원을 찾았더니 만성신부전증 말기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신장이식 밖에는 살 길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의 신장이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평소 무뚝뚝하던 아버지는 이식수술을 해주던 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들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차선수 역시 어색하게 아버지 수고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술 뒤 아들은 자기의 배를 쓰다듬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떼어주신 신장은 마치 아버지처럼 느껴져 배를 만질 때 마다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평소 어색한 관계에 있었습니까?

오늘은 성찬에 참여하며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죄를 위해 그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성령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감정에 강한 느낌이 오지 않는다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해도 우리가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이 되어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줄 믿습니다.

또 치유하시는 보혈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는 은혜를 부어 주실 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