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8장1절-11절)

남수연 2013. 5. 6. 19:12

  

TV에서 인사청문회를 가끔 보게 됩니다.

가운데 앉은 후보자가 과거의 불법들을 해명하느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참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름 큰소리 치며 살았을 사람인 데 저 사람, 이젠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그 과거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무리 마음을 졸이고 후회를 해도 지울 수 없는 것이 과거의 죄더군요.

오늘 본문에도 부끄러운 죄가 만인 앞에 공개 돼버린 여인이 있습니다.

게다가 둘러댈 수도 없게 현행범으로 잡혀왔습니다.

유대종교 재판대로 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는 투석형 판결입니다.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사형집행에 대해 제약이 있었지만 종교적인 면에서는 일부 사형집행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소말리아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투석형으로 처형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투석형이 무섭고 끔찍한 사형법이더군요.

다리를 먼저 땅에 묻고 둘러선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돌을 던지는 데 정말 참혹한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사형법의 역사를 보면 투석형을 능가하는 방법이 많습니다.

십자가의 형벌도 그 가운데 하나죠.

사람을 못에 박아서 걸어놓고 죽게 하니 얼마나 잔인한 형법입니까?

우리나라에도 그런 살벌한 사형법이 꽤 됩니다.

어렸을 때 한 번 쯤 들어봤을 지도 모를 육시할 놈이란 욕도 사형법에 관련 된 욕입니다.

몸을 여섯 토막 내 죽일 놈이란 뜻이죠.

오우분시라는 참혹한 형벌로 죽으라는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오우분시란 다섯 마리 소에 사지와 머리를 밧줄에 묶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몰아 죽이는 형벌이죠.

죄 짓지 말고 삽시다.

여인은 천만다행히도 예수님 앞에 끌려왔기에 무서운 투석형을 면하고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 나와 이렇게 죄를 용서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온 사람들입니다.

현장에 함께 있었던 요한 사도는 오늘 이 사건 속에서 무엇을 깨달았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요한사도 만큼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행동에 깃들인 심오한 영적 진리를 꿰뚫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도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요한사도가 전하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길 원합니다.

또 여인이 만났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 만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진지하게 행함으로 축복받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앞 장에는 초막절이라는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예수님과 유대종교인들과 충돌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라고 진술하시고 바리새인들은 반박하며 격론을 벌입니다.

그리고 앞 장 마지막에 보면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1절에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죠.

원래 원문에는 그러나라는 단어가 있는 데 우리 번역에서는 빠졌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고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고향이 갈릴리신 예수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셨지만 돈도 없고 마땅히 묵으실 곳도 없으셨던 것이죠.

감람산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실 때 종종 머무시던 곳입니다.

편안한 잠자리도 없이 빡빡하게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던 예수님의 고단한 모습을 요한사도가 아련하게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2라운드가 시작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비장의 카드를 빼들고 들이닥친 것이죠.

예수님은 이른 아침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셨고 명절에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앉으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내려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광경입니까?

전에 들어본 적 없는 진리의 말씀에 깊이 빠져든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한 모습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만큼 우리 심령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촉촉한 단비에 잎새들이 춤추는 것처럼 우리 영혼이 말씀에 살아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지 모르고 며칠씩 예수님을 쫒아 다녔던 것을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생수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바로 그 때 그 평화를 깨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그 여인을 끌고 나타난 것입니다.

천상을 누리던 분위기는 갑자기 세속의 음탕한 죄와 죽음의 냄새로 술렁입니다.

종교인들은 예수님께 이 여자를 어떻게 판결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교활하게 추궁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어떻든 그들은 이미 승리 할 카드를 쥐고 있는 것이죠.

만일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 불렸던 예수님의 사랑은 말짱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정면으로 어긴 자니 하나님의 메시야가 아니라는 카드를 내밀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진퇴양난에 빠진 예수님을 주목하며 주님의 입장표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교묘하게 궁지에 내 몰 문제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곤혹스럽게 하려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자신이 시비를 거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철없는 그들의 행동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번번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경이롭고 지혜로운 답변이었습니다.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지혜로 논쟁에서 이기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영적인 진리가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답변을 통해 곤궁을 빠져나가실 뿐 아니라 깜짝 놀랄 심원한 구속의 원리를 드러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듣고 갑자기 몸을 굽히시더니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암호 같은 행동,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에 다 시선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궁지에 몰려 딴 청을 하시는 줄 알았는지 의기양양해서 더 독촉을 해댑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이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나님의 지혜로는 해법이 안 나오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전세는 급반전되었잖습니까?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할 입장이 되버린 것이죠.

이 말씀이 멋있는지는 알아서 정치판에서도 걸핏하면 예수님의 허락도 안 받고 이 말씀을 남용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전에 성희롱 발언을 했던 강용석의원 해임안을 부결시킬 때도 김형오국회의장이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합니다.

그랬다가 욕을 보따리로 먹었죠.

아무나 쓴다고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튼 도덕적인 범죄를 빠져나갈 구실로 세간에서 얼마나 자주 애용하는 말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흠찟 놀라고 군중 가운데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본문에서 제일 먼저 돌을 내려놓고 돌아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돌을 내려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 누구도 돌을 들고 따라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막연한 추측으로 돌이 하나 씩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돌아서서 가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상한 것이죠.

그저 인생을 알만한 나이 지긋한 사람부터 시작해 젊은이 까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돌아갔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의롭다 알고 남을 정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날카롭게 그들의 양심을 지적할 때 자기 역시 죄인일 뿐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남의 잘못이 보이고 단죄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있다면 내 죄를 밝히시는 성령님의 조명을 아직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필요한 죄인일 뿐입니다.

한 여인의 죄로 시작한 문제를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진리로 이끌고 가시는 예수님의 지혜가 놀라울 뿐입니다.

여인과 둘이만 남게 된 예수님은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다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는 여인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의 마음과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 말씀, 우리는 이런 인격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이 세상에서 살지만 매일 나를 보고 실망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때론 창피해서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오늘 바리새인처럼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정죄합니다.

프라미스란 연극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분주히 무대를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연극이 진행되는 데 그 중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고 출연하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의 배역을 받은 사람은 무대를 절대 떠나지 않고 계속 등장인물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는 마귀를 떠올리면 섬찟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마귀가 하는 일은 끊임없이 우리의 약점을 지적하고 죄를 정죄하고 낙망하고 자신감을 잃게 합니다.

이런 정죄감에 빠지면 믿음도 무너지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사라집니다.

우리가 고의로 지은 죄라면 당연히 회개하고 돌이켜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좀 용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속죄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여인이 평생 그의 죄에서 떠날 수 있었을까요?

한 순간에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우리의 약점과 기질이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의지하고 회개할 때 보혈로 덮어주십니다.

한 청년의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얼마나 하나님이 싫었던지 친구의 간청으로 교회 문 앞까지 따라왔다가도 교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두시간을 밖에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 데 그래도 하나님, 아버지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도무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건성으로 성경을 뒤적이다 바로 이 요한복음 본문을 읽는 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 순간 말씀 속에서 이 진실하신 인격자 예수님을 청년이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나자 성경 말씀이 읽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생애가 믿어지고 그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 천년 전의 사건이 기록 된 성경말씀을 통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신비한 생명력을 품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 학창시절엔 만화책 보는 재미가 참 쏠쏠했습니다.

만화책을 한 열권 쯤 쌓아놓고 뜨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리면 참 세상 부러울 게 없던 시절이었죠.

한 때 베르사이유의 장미란 만화책이 인기절정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만화인데 마리 앙뜨와네뜨를 호위하는 친위대장이 오스칼이라는 장교입니다.

만화 속 오스카 장교의 캐릭터가 얼마나 멋있는 지 만화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죠.

다음 편이 나오길 기다렸다 만화책을 빌려 돌아올 때 그 설레임은 대단했습니다.

스토리가 궁금해 빨리 읽고 싶기도 하고 음미하며 오래 읽고 싶기도 한 그 갈등을 느끼며 하여튼 만화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만화 속 인물인데도 진짜 인물처럼 사람을 매료시키더군요.

이 이야기를 왜 제가 합니까?

아무리 소설과 만화 속 인물에 매료되었다고 오스칼종교 같은 게 생기면 제가 거기 가겠습니까?

사람은 현실과 가상을 구별합니다.

우리가 단지 기록 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믿음이 가상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걸 믿고 있다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그 세계가 정말 실재한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지금 믿고 있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라는 것이죠.

만일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한 의로운 청년의 죽음이고 천국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어요.

이 모든 것이 가상이라면 좀 믿다가 내가 이거 뭐하는 짓인가 회의가 오고 걷어치우게 됩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지금도 동일한 인격자로 천국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중보 해 주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그 인격자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 삶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히 주님을 의지하는 견고한 인생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는 복된 믿음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러면 오늘 설교가 이것으로 다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한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만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본문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1500년 동안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시고 이제 와서 그게 아니라면 뭐냐는 거죠.

그게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꼭지를 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이 내놓는 율법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예수님이 죄인을 무조건 감싸시는 것은 율법을 폐기하시는 결과가 되는 것이죠.

똑같은 하나님께서 죄를 대하시는 방법이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대가 달라져서 그런 것일까요?

며칠 전 뉴스에 보니 결혼을 하지 않고 남녀가 동거하는 것에 대해 청소년의 58%가 괜찮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자녀가 둘이 있으면 그 중 하나는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치관은 시대와 풍조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죄에 대해 칼을 가시는 분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다 덮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늘 간음죄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입장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 철저하시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 마다 이미 범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시기에 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십계명을 다 지켜야 합니다.

경건하게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주일을 지켜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에 해를 가해선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는 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지킵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니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새 계명이 어떻게 관계가 있고 짝이 맞는 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새신자분들이 많아 이 내용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제가 잘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모세의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것을 잘 모르면 복음에 대해서도 구원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이 장차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백성이었겠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진 사람들이라 하나님을 싫어하고 죄가 더 친근하고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공존하실 수가 없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과 그런 이스라엘이 함께 살기위해 하나님이 방법을 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고 애굽의 질병도 없게 하시고 가나안땅의 원수와도 다 싸워줄 것이니 너희는 이걸 지켜서 거룩한 내 백성이 되어다오.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 할 죄악을 열 가지로 정리해서 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십계명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잘 지켜서 영원히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막 결혼 한 신혼부부들이 서로 그런 언약하잖습니까?

0 교회 김병0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꼭 지금 몸무게를 지켜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무리한 언약을 하셨더군요.

김목사님이 사랑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사모님이 꼭 지켜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었겠죠.

신명기 910절에 보면 모세를 통해 십계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 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손으로 직접 십계명 돌 판을 기록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워 하나님의 거룩하신 신체를 직접 사용하셔서 십계명 돌판을 써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수로 직접 쓰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과 사상 그 자체가 그래도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을 어긴 자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제명됩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범죄자는 엄격하게 처벌하도록 하십니다.

간음죄에 대한 투석형의 이유를 신명기 2121절에서 명백히 밝힙니다.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그렇게라도 해서 축복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네 오른 쪽 눈이 범죄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쪽 눈으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좋으니라.

신약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4절에 간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그런데 오늘 이 현장에 모인 사람은 다 죄인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물러났죠.

심지어 율법 잘 지킨다고 자부했던 종교인도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을 주셨지만 죄인들에겐 그걸 지킬 능력이 아무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비밀은 이것입니다.

이 율법으로는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죄인에겐 죄를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임무일 뿐입니다.

로마서320절이 말씀하시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하나님)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까?

21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오늘 예수님께서 여인을 용서하시고 둘러 선 모든 죄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을 파기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의 죄를 다 대속해 주신다는 것을 담보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킬 수 있도록 마음 속에 새로운 법을 새겨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암호 같은 주님의 행동에 숨겨있습니다.

본문에서 항상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땅에다 무슨 말씀을 쓰셨을까?

내용을 추측하는 신학자들이 많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모르니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무의미한 행동을 과연 예수님께서 하셨을까요?

그리고 요한사도가 두 번씩 그걸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짧은 삼년여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 일거수 일투족이 다 철저한 구원의 원리와 관련 된 행동과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들은 꼭 구약성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냥 돌발적인 행동을 하신 적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땅에 글을 쓰신 이 신비한 행동도 구약성경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조금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글을 쓰셨다는 내용은 성경 전체에 단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까 살펴본 대로 모세에게 전해주셨던 십계명 돌판을 기록할 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오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땅에 글씨를 쓰신 사건입니다.

다니엘서에 벨사살 왕 앞에 나타나 글씨를 쓴 손은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친수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신 의미를 충분히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 모세에게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쓰신 율법을 주신 것처럼 새로운 율법을 지금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직접 땅에 적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돌판이 아니고 땅입니까?

창세기에 아담의 창조에서 하나님이 땅에서 흙을 취하여 사람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땅에서 취했다는 말씀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땅에 기록하셨다는 것은 곧 주님의 새 계명을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직접 기록해주시겠다는 뜻이란 것입니다.

예레미야31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오늘 증거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죽어도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사랑하며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일단 그 법을 좋아하질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우리 마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젠 우리 마음판을 성령께서 바꾸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기록하셨기에 우리가 그걸 지킬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젠 하나님의 계명을 안 지킬 때 보다 지킬 때가 우리 마음이 더 평안하고 더 축복되다는 걸 깨닫고 느낀다는 것이죠.

그걸 예수님께서 이루기 위해 낮고 천한 곳에 오셨고 겸손하게 십자가를 지고 이루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야기도 본문 속에 담겨 있습니다.

브뤼겔이란 화가가 그린 예수와 간음한 여자란 작품이 있습니다.

같은 주제의 다른 그림과 달리 등장인물들이 다 서있고 오직 예수님만 몸을 굽히고 바닥에 글을 쓰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던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린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 앞에 꿇어 엎드린 것처럼 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3절과 9절을 보면 여인이 서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 발아래 꿇어 엎드렸다고 생각한 게 틀렸다는 것이죠.

본문에서 몸을 굽혀란 단어를 요한 사도가 두 번 다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몸을 굽히신 행동의 깊은 의미를 요한이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혈기등등하게 예수님을 몰아 붙이는 데 주님이 낮은 자세로 몸을 굽힌다는 것이 당시엔 요한사도의 눈에도 자존심이 상했을지 모릅니다.

요한사도가 굳이 몸을 굽혔다는 단어를 강조해서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하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목격한 요한사도가 그때 어떻게 비천한 죄인을 위해 주님이 한없이 자신을 낮추셨었나 그 낮아지심이 결국 십자가에 오르시기 까지 하셨다는 깊은 감동이 각인되었다는 것이죠.

우리를 위해 이렇게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속죄를 통해 흙과 같은 연약한 우리 마음에 성령의 법을 친히 기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돌에 새겨진 율법은 지킬 수 없었지만 우리 심령에 오신 성령께서 이전 새 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내용들이 오늘 본문에 다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확신하는 것 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병 낫고 복 받으라는 메시지가 없어서 아쉽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축복이십니다.

예수님만 확고히 믿으면 이 세상 문제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모든 게 다 해결되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그 인생은 흔들리는 울타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믿고 우리 감정과 상관없이 매일 되뇌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 안에서 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다.

세상은 더 이상 두렵지 않고 마귀는 우리를 더이상 정죄하지 못할 것입니다.

소망의 주님이 안전과 평안가운데 우리 길을 신실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013년5월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