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안타까운 세월호 침몰로 인해 고통을 겪는 분들과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참 소망을 주시길 원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부활, 그 이후입니다.
먼저 부활에 대해 말씀을 나눈 뒤, 그 이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은 인간의 운명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부활의 진리에 대해 성도들이 얼마나 깊이 있게 생각하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잘 이해한다면 우리의 구원과 부활에 대해 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역사성과 증거에 대해 여러번 말씀을 나누었기에 오늘은 좀 다른 각도에서 부활을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일어나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왜 사망은 권세를 갖게 되었는지, 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망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인지 궁금증을 가져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망은 단지 죽음이라는 현상만이 아니라 주도적인 힘을 가진 거대한 세력으로 성경에서는 표현됩니다.
특히 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마귀라고 히브리서는 기록합니다.
사망은 선악과 언약에 대한 아담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은 아담의 불순종과 함께 즉시 효력을 발생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17절에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 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한번 태어난 사람에게 이 사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된 것이죠.
모든 인간 위에 사망이 왕노릇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이기에 누구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것을 합당한 원칙이 없이 임의로 해제하신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불완전하시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일하고 완전한 길인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문제입니다.
사망의 체제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망은 죄인에게만 작동하게 되어 있는 데 의인이 죽으셨으니 사망이 예수님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 것이죠.
컴퓨터로 말하자면 모순 된 명령어도 인해 자폭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참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에 부활에 대해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것처럼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성경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망을 고통에서 풀어서 살려주셨다’가 된다고 합니다.
어차피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시기에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인이 아닌 예수님을 덥썩 삼켰다가 죽을 지경이 된 사망이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기사회생했다는 것입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붙은 모든 사람들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5장21절의 말씀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그냥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나도 부활한다.
이렇게 확실히 믿고 기뻐해도 됩니다.
그러나 이 두꺼운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더 깊고 풍성한 구원의 지식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깊은 영적 원리들은 '되는 대로', '주먹구구식'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인생의 위기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는 것이 더욱 더 확고해집니다.
요한복음20장에 보면 이 첫 부활절의 모습이 상세히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그들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9절에서 요한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리스도가 썩지 않고 부활할 것에 대한 구약성경의 여러 예언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죠.
후에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다윗의 시편16편의 말씀을 증거로 유대인을 향해 자신 있게 주님의 부활을 전도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미리보고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기록하지 않았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여러 시편과 욥기와 이사야서 여기저기에 이미 예언되었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자들이 잘 몰랐기에 예수님이 생전에 부활을 말씀하실 때 이해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믿는 성도들에게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채워질수록 우리의 믿는 바가 진리라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 심령에 채워지면 죄와 유혹과 귀신이 결코 우리 마음 속에다 둥지를 틀 자리가 없게 됩니다.
또 깨달은 말씀을 기준으로 살면 삶에 대해서도 놀라운 지혜가 생깁니다.
시편107장20절은 심지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몸과 환경을 치유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혼미한 마지막 때 예수님을 따르려면 더욱 말씀 없이는 안됩니다.
오늘 부활에 대해서도 고린도전서15장22절이 이렇게 확증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근거없는 막연한 믿음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영광스럽고 신비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확고하게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 삶의 끝에 죽음이라는 얇은 커튼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는 영생의 삶이 너무나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24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은 상태이고 부활 할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천국이 너희 안에 이뤄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목숨도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들의 눈에는 현세 속에 영생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확실한 부활과 영생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죠.
오히려 죽음을 넘어 담대히 영생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런 부활의 생명을 확신하고 삶을 통해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부활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다음은 그 이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앞 장에서 부활절은 끝났습니다.
요한사도는 20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진술을 마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21장이 책 맨 뒤에 작가가 최종적인 결말을 에필로그로 덧붙이듯 그렇게 첨가되어 있습니다.
아주 멋있는 저술 방법을 요한사도가 택한 것이죠.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내용과 진술을 보면 요한사도가 상당한 식견과 지성을 갖춘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안이 부자였잖습니까?
공부를 좀 했던 것이죠.
베드로 사도의 경우 제자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반면 글쓰는 것은 별로였나 봅니다.
성경을 많이 저술하지 않았죠.
베드로 전후서 뿐인 데 그중 전서는 실라가 대필했다고 밝힙니다.
그 대신 베드로사도는 현장에서 교회를 돌보는 일에 총력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적당한 환경과 재능을 주셔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특별난 형태로 맨 마지막에 따로 배치한 것은 그만큼 요한사도가 디베라바닷가의 일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 것인지 잘 깨닫게 되시길 원합니다.
20장에 보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 중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손의 못자국을 보여주시며 주님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올바로 인식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120킬로나 떨어진 갈릴리 호수입니다.
그들이 다시 고향 갈릴리로 돌아왔고 다시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성경을 토대로 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단 두 번만 모습을 보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14절이 정확하게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 모습을 보이시고, 그것도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시질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다음 무얼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주님을 기다리다 부활절 날 천사들이 한 말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천사들이 주님이 갈릴리로 가시니 거기서 만나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 갈릴리로 돌아 온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역시 그들이 갈릴리로 가서 주님을 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왜 갈릴리로 제자들을 부르셨는지는 본문을 살펴보는 중에 저절로 알게 됩니다.
갈릴리로 돌아온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혼란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며칠이나 기다렸는지는 모르지만 기다리다 못한 베드로가 불쑥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베드로의 성격이 여전합니다.
기다리다 답답해서 옛날 고기잡이 배를 끌고 바다로 나간 것입니다.
함께 몰려있던 다른 제자 여섯 명도 무료하던 중에 우리도 함께 가겠다 나선 것이죠.
그런데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오랜만에 던져 본 투망이 어색했을까요?
그 새 실력이 다 녹슨 것일까요?
메시야왕국을 꿈꾸고 하나님의 혁명에 뛰어들어 삼년 반을 몰두하다 과거 생업의 현장에 돌아간 그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귀신이 쫒겨 가고, 병자가 벌떡 일어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듯, 손에 잡힐 듯 느껴지던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맛 본 제자들에게 물고기 몇 마리를 낚아 올리는 그물질이 성에 찼겠습니까?
저는 그 허탈함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교회를 즐겁게 다니다 어느 날 이 모든 것을 중지하고 다시 세속적인 과거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 즐기던 그것들이 다시 똑같이 즐거울까요?
교회를 나오지 않는 주일 아침의 늦잠이 마냥 달콤하기만 할까요?
이젠 우리가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죠.
율리우스가 주사위는 던져졌다 말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점령하지 않습니까?
이젠 이 세상의 것으로는 우리 영이 만족되어 지지가 않습니다.
영이 죽었을 때는 몰랐지만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이상 살아난 우리 영은 계속 영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어도 예배를 드리러 나오고 은혜의 자리를 사모해서 나오는 것이거든요.
그날 밤 어둠 속에다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는 분명히 과거와 같이 물고기에 집착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성도들은 아무 일에도 의미를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분리 된 삶은 텅 빈 그물 같고 허탕치는 인생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상에서의 삶은 무엇을 많이 이룬 것 같지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어0씨가 한국에서 성공한 사람 중 일곱번 째로 뽑혔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씀하더군요.
예수님을 믿고 보니 그게 성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빈 그물이나 다름없는 인생이라는 것이죠.
그의 인생의 바닥에 짙게 깔린 허무감이 바로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도 죽음을 느끼고 울었다고 그의 시 메멘토모리에서 노래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성과 없는 투망질로 날이 새어가는 데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다고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그냥 서계셨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의 문법을 따져 번역했다면 오래 전부터 거기 계셨다는 과거 완료시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밤 새 그들이 그물 던지는 모습을 지켜보셨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찡해지지 않습니까?
사상누각처럼 산산조각 난 꿈, 실체가 드러난 실패한 믿음,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진 착찹한 제자들의 마음을 주님이 다 보고 계셨습니다.
텅빈 그물을 건지는 허탈한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밤 새 지켜 보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충만하고 하나님을 위해 열렬히 헌신할 때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에 걸려 넘어졌을 때, 기대가 좌절로 바뀌어 당황해 할 때, 몸과 마음이 다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때로 힘든 문제가 생기고 감당하다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내 영혼이 강해지고 튼튼하게 단련되는 때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운동도 그렇지 않습니까?
근력과 체력이 업그레이드 되려면 조금 더 바벨을 얹어야 하고 조금 더 강도 높은 훈련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미 익숙해진 강도만큼 해 나갈 땐 현상유지는 되겠지만 성장하고 성숙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힘든 연단의 시기가 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 시련을 통해 제 마음을 연단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하고 내가 이 땅에서 이뤄야 할 믿음의 목표를 향해 곧은 길로 가게 하는 것이죠.
정답도 알고 결과도 알고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도 너무 잘 아는 데 힘들 때는 예수님께 대해 제 마음이 좀 닫히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알면서도 좀 그래요.
그러면 그런 나를 예수님께서 가만히 주시해 보고 계시다는 것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착찹한 마음을 주님께서 다 들여다보시며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계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도 지금 사실은 상처받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도 깊은 상처가 된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게 우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힘겹게 그물을 던지고 걷어 올리며 상처난 감정과 싸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헛된 시도로 지쳐가고 그것마저 포기한 새벽에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혼란의 와중에 있을 땐 우리가 하나님께 잘 집중하지 못하고 음성을 듣지도 못합니다.
본문에서도 그들이 지쳐 포기했을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걸으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자식처럼 제자들을 부르는 친근함과 측은해 하시는 마음이 와 닿습니다.
그들이 힘없이 아무렇게나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고기 잡을 곳을 지적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여기서 주시는 교훈이 하나님나라의 큰 결실이든 세상의 성공이든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내 인생을 조준해서 걸어갈 때에만 내생과 이생에 유익한 결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어느 정도 많으냐면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예기치 않은 성공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이죠.
이제까지 예수님 안에서 살아온 제 인생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고비마다 최상의 것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도님들도 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있던 요한이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반가움과 놀란 마음으로 ‘주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웃통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급한 성질대로죠.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행동을 하나 짚어 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뒤 뛰어 내린 것입니다.
물 속을 헤엄치려면 오히려 입었던 겉옷도 벗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배 안에 있는 겉옷을 나중에 챙겨도 되는 데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전에 거리낌 없이 예수님을 대하고 항변하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던 그 주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제 확실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내 인격의 주님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예수님 앞에 설 때 옷매무새를 다듬고 예를 갖추게 된 것이죠.
하나님 임재의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영이 인지하게 되면 예배자세나 기도나 찬양이나 일상의 삶 속에서도 분명히 태도가 달라집니다.
본문에서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감히’ 이런 말은 이전에 제자들과 주님 사이에 없던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인지하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해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과거와 똑같이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제자들을 똑같이 대하십니다.
실패했을 때나 의기충천했을 때나 주님께는 똑같은 제자 그대로 입니다.
사실 믿음과 의심이 종이 한 장 차이 밖에 안되는 게 연약한 우리 모습입니다.
육지에 올라 온 제자들이 발견한 것은 해변가에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생선을 굽고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허기진 제자들이 아침 요기 할 것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승천하신 예수님도,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예수님도 이렇게 우리를 자상하게 사랑하시는 바로 요한이 말하고 싶은 그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쭈볏거리며 예수님 앞으로 다가왔지만 이 분위기 느껴지십니까?
이미 주님을 두고 다 도망가고 십자가의 고난을 지켜주지도 못한 제자들이니 얼마나 얼굴이 부끄러웠겠습니까?
이런 마음 들키고 나면 부모든, 배우자든, 자녀든, 동료든 면목이 안서는 것이죠.
제자들은 예수님께 사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염치가 없을 때는 사과도 잘 안 나옵니다.
누가 뭐라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어색한 정적이 흐를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지금 잡은 생선 좀 몇 마리 가져 오너라’
그 때서야 그물을 끌어올리고 생선을 꺼내 세어보고 숯불에 굽고.
분위기 아시겠죠?
이렇게 시끌 시끌하다보면 어느새 서먹했던 분위기도 얼버무려 지는 것이죠.
그 때 주님께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며 떡과 생선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마땅히 책망 받을 일을 했는데 누군가 덮어주었던 경험 있으십니까?
경을 치게 혼날 줄 알았는데, 내 실수와 약함을 이해하고 덮어주던 경험, 부모님들께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야단맞는 것도 큰 교훈이지만 때로는 알면서도 덮어줄 때 더 큰 교훈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사람들도 자기가 잘못하는 것 다 압니다.
자기 하는 일에 다 자신감이 없고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지 두렵습니다.
우리에겐 잘못에 대한 질책보다 격려가 더 필요합니다.
큰 보자기를 가지고 다니며 좀 덮으면서 삽시다.
잠언19장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은 제자들의 어쩔 수 없는 그 연약함을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잘 믿고 경건한 제자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말씀도 더 읽어야 겠고 기도도 좀 더 하고, 교회를 위해서 뭔가를 더 해야겠다는 마음은 다 있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이죠.
예수님이 왜 갈릴리로 제자들을 부르셨겠습니까?
예루살렘은 제자들에게 트라우마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화려한 영광을 쫒다 실패한 장소였고, 스승의 신의를 저버린 장소였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아픔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에서 회복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었던 그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인정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확신한고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시고 본래의 영광으로 부활하셨지만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깊이 느낀 뒤 그들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갈릴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를 이해하시는 깊은 긍휼을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낀 곳이 갈릴리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다 지치고, 삶에서 지칠 때,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그 사랑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행복하게 예배하고 웃고, 기뻐하는 주나산교회가 우리의 갈릴리일지 모릅니다.
아직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갈릴리가 없으시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기서 더 깊이 만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과 기도와 삶에서 순종하며 더 풍성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해 가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고난주간 힘겹게 쳐진 어깨를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부활의 소망과 지금도 지켜보고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굳게 의지하고 새 힘과 능력으로 일어서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년4월20일 부활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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