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는 탤런트 김자0권사님의 소천 소식에 다들 좀 놀라셨을 것입니다.
올 봄에 여기 올림픽 공원 공연장에서 ‘봄날은 간다’라는 악극에 출현할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너무 급작스런 죽음인 것 같습니다.
그 때 저희 어머니가 췌장암 판정받고 저희 집에 오셨을 때인데 그게 좀 보고 싶다고 해서 구경 갔다 오셨거든요.
몇 달 못 살거라던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신 데 쌩쌩하게 공연하던 분은 먼저 가셨다는 게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습니다.
다윗이 죽으며 한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참 아깝다 싶은 사람도 가고, 평생 곤고한 짐을 지고 살다 쓸쓸하게 여생을 보낸 사람도 가고, 정해 놓은 순서도 없이 사람들은 다 돌아가더군요.
우리의 돌아갈 곳이 확고하게 준비되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사그러들지 않는 본질적인 질문들이 있습니다.
낙엽이 떨어져 거리를 뒹구는 스산한 모습을 볼 때,
병실에서 주렁주렁 호스를 끼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사람을 볼 때,
쓸쓸히 혼자 먹는 밥상 앞에서 음식을 씹다가,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또 깊이 눌러 놓았던 그 질문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오늘 본문은 이 원초적인 인간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라 해도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기독교 안에만 있는 내세와 구원과 하나님, 이런 것들에 대해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복은 세상의 원리에 맞아 떨어지면 누구에게나 열립니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나면, 교회에서 복을 바라지 않아도 평생 풍족하게 먹고 쓰고 삽니다.
머리가 좋게 태어나고 성실하기까지 하다면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남들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이죠.
배경이 없어도 근면 성실하게 일한 사람들은 그 수준에 맞게 재물을 모으고 그런대로 또 살아갑니다.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신자들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거의 비슷하게 적용되는 이 땅의 원리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부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랐더니 세상적으로 큰 성공을 했다.
이런 게 예수님을 믿는 목적의 전부라면 그건 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대로 살아가면 세상에선 더 성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안가고 회사에 공헌하는 사람이 더 빨리 출세할 수도 있습니다.
술자리다, 접대 골프다, 윗선에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경영자들이 절대로 끌어주질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예수님 말씀대로 남을 돕고 살면 어떻게 부동산을 여러 개씩 소유한 부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도 다 자기 삶을 위해서는 지혜롭고 수완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할 지상명령은 다른 것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김병0 목사님이 성도의 기업체에 심방을 가셨다가 한 여자직원하고 대화를 하며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과거에는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교회에 발길을 끊었냐고 물었더니 아픈 과거이야기를 꺼내더랍니다.
이모가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 새벽기도 하러 가시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며 시험에 들어 교회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목사님이 물으셨대요.
‘ 왜 죽는 것이 꼭 불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님들도 죽는 것이 불행입니까?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보시는 사건이라고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죽음의 순간, 성도들은 이생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에 들어가고 영원한 복락을 맞게 되는 것 아닙니까?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는 죽음조차 신자들에게는 다르게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세계를 알고 그 눈으로 내세와 현세를 다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끝없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과 그 해답을 아는 사람들은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지 세상적인 복은 좀 빈곤해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세상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천하를 다 가져와도 꿀리지 않는 바로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와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바로 ‘그것’이 없어 갈등하고 목마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갈등과 고민에 견디다 못해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보면 단지 호기심으로 한밤중에 누굴 찾아 올 그런 경솔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웬만하면 밤에는 전화를 안하죠.
더구나 집을 찾아가는 그런 일은 안합니다.
만일 한밤중에 찾아가야 할 일이라면 그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경우죠.
1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합니다.
또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니고데모는 향품을 백 근이나 가지고 와서 주님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부자였다는 것이죠.
세상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니고데모가 야심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밤에, 그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온다는 것은 잠 못 이루게 하는 절박함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단지 다른 유대인들의 눈이 신경 쓰여서 만이 아닙니다.
니고데모를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게 만든, 심령의 깊은 충동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부단히 목마르게 하는 삶의 본질을 묻는 바로 그 질문인 것입니다.
처음 니고데모는 예수님 앞에 나와 좀 장황한 인사말을 건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들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분이라며 진심으로 존경심을 표합니다.
그런데 3절에 보니 예수님은 엉뚱하게 응수를 하십니다.
니고데모의 말과는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말을 대뜸 던지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묻지도 않는 말씀을 하신 것이죠.
예수님이 왜 이렇게 헛도는 대화를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미적거리는 니고데모의 갈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시고 직답을 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이렇게 답답한 이유를 정확하게 꼭 집어서 물을 수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럴 때 있잖습니까?
어디가 가려운 데 정확하게 어느 지점인지 몰라 여기저기 긁지만 시원치 않을 때.
니고데모가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분명히 세상에서도 갖출 것은 다 갖췄고, 민족들에게 존경받는 정치가이고, 율법대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섬기는 종교지도자인 데,
도대체 뭐가 부족한지 만족스럽지가 못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확신이 안생기고 불안하냐는 것입니다.
남들은 니고데모야 말로 당연히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거예요.
이상하다, 분명 뭔가 부족한 게 있나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집어 주신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답답함은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니고데모 같이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아서 답답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도 못하는지 모릅니다.
도무지 천국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에 대해서도 내면에 밀착되지 않고 겉돌기만 한다는 걸 자기가 압니다.
깨달은 진리만이 나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거든요.
그 이유는 바로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아서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예리하게 지적하신 것이죠.
예수님이 니고데모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건드리자 니고데모가 바짝 주님의 말꼬리를 붙들고 다가 갑니다.
영적으로 무관심하던 사람이 왠지 말씀에 끌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겨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과의 대화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정말 우리 궁금한 것 좀 누구에게 속 시원하게 듣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해답이 다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니고데모에게 해답이 되시는 주님이 가까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데,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이미 태어나서 이렇게 늙어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냐,
모친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질문을 막 쏟아내는 것이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한 술 더 떠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면 나중에 죽어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직 삶의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눈을 떠서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다 똑같은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우리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거듭나야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내생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단 한번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거듭나지 못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습니다.
율법대로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니고데모가 크게 얻어맞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듭나는 것을 비밀스럽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공공연히 거듭나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거듭나야 한다는 진리는 교회에서 매일 가르쳐야 될 가장 기본적이고 중대한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했는데 무슨 성장이 있고 축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오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잖습니까?
‘네가 거듭나야 되겠구나.’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거듭나야 하는 이 중요한 진리가 잘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바르게 전하지 않는 설교자는 나중에 예수님 앞에서 큰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거듭나지 못한 지도 모르고 구원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지 두렵습니다.
분명히 거듭나지 못한 신자인 줄 알면서도 사실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거듭나야 되는 게 시급합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 설교자가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재앙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교양과 상식이라는 이유로 할 말을 바로 못합니다.
아무렴 당장 기분 나쁜 게 생명보다 더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같이 중요한 메시지를 절대 흘려듣지 마시고 나를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환하게 보이게 됩니다.
오늘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을 갖고 나오셨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내 눈이 열리면 그 다음, 이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도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왜 일어났는 지, 내 인생의 전체가 해석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거기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고 그래서 평안과 담대함으로 세상을 감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모두가 거듭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장차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정말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된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거듭나는 중대한 두 가지 핵심요소를 지시하는 말씀입니다.
인간 쪽에서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구분해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물로 태어난 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하는 결단을 말합니다.
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물세례를 말합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는 물세례 속에 담겨있는 그 정신과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육적인 삶이 하나님과 원수라는 것을 깨닫고 과거의 나를 물속에 수장하는 것이 물세례의 의미입니다.
어물어물 교회를 몇 년 다니다 보니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신자들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대신 유대공동체에서 쫒겨 나는 것이고, 이 땅에서는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는 신분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만큼 이 땅의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결심이 바로 물세례입니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세례 받는다고 죽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대신 누가 진짜 육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결단한 것인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며칠 전 교회 문손잡이가 파손되서 교체를 했습니다.
열쇠 업을 하는 사장님이 명성교회 집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새벽기도를 7년 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팔에 깁스를 한 날도 새벽기도를 가셨다는 것예요,
그래서 제가 참 훌륭하십니다. 라고 했더니 그 분이 하시는 말이 ‘아이쿠,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 앞에 죄만 짓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 그게 그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 앞의 죄인 됨을 철저히 깨닫고 하시는 진심이란 게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내 자신이 끔찍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나를 죽이고 거듭나길 원하겠습니까?죄로 인한 내 삶의 몰락과 장차 받을 심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거기서 돌이켜 하나님을 따를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의 무서운 결과를 제대로 알아야만 죄의 원흉인 나를 물속에 수장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내 현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분명히 말씀해 줍니다.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려면 단지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30여 가지 이상의 죄와 그 근본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이런 진지한 마음을 가질 때 외부로 부터 우리를 감동하셔서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면 본성적인 죄가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럽고 흉물스러운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회개한 죄인인지는 얼만큼 자신의 죄성을 깨닫느냐를 보면 압니다.
이런 신자들은 어떤 희생과 헌신을 해도 예수님과 사람 앞에 자랑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열쇠집 사장님처럼 항상 부족하고 더 순종하며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을 뿐입니다.
정말 날마다 죄인인게 송구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이죠.
우리가 얼마나 교회생활을 잘하냐, 헌금을 많이 내냐, 기도를 열심히 하냐, 이것은 거듭남의 기준이 절대 아닙니다.
먼저 내 죄를 제대로 볼 줄 알고 그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 또 그래놓고도 매일 제대로 못살고 있는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매일 의지하는 사람이 진실 되게 회개한 사람입니다.
다음, 우리가 이렇게 진심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도 성령으로 거듭나는 원리를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여기서 보면 회개하는 것에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들어가는 데, 그게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성령을 받는 것 사이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죄를 뉘우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은 대상자가 용서해야 죄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죄는 결코 그냥 사해지는 게 아니라 죄 값에 따른 형벌이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치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면 회개한 죄가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가 된다는 것이죠이게 바로 14절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순종했던 죄인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불뱀에 물린 상처가 다 나아 살아났던 구약의 일화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예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무죄한 자가 됩니다.
죄가 사해져야만 비로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회개하고, 플러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속죄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성령께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자꾸 말씀 앞으로 인도하시는 것도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이때는 외부에서 우리를 계속 감동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정말 거듭나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깊은 영혼의 좌소에 들어오셔서 죽은 우리 영을 살려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의지적으로 내 죄를 속죄하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으로 섬기겠다는 결단이 없으면 인격체이신 성령님은 절대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모르고, 속고 들어오시겠습니까?
나는 내 스스로에게 속을지 몰라도, 성령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만 죽었던 우리 영이 거듭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땅 자연계만 인지하던 사람에게 거듭나면 영의 세계가 지각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충만하신 것과 하나님이 바로 나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거듭나면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출생은 육의 출생과는 달리 비밀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이 신비입니다.
그것이 8절 말씀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은 실체가 있고 그 방향을 느낄 수가 있지만 발생한 순간을 우리가 모르듯이 언제 성령으로 거듭나는 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고,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게 가슴에 벅차며 눈물, 콧물 흘리는 순간 거듭난 것이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거듭나있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단지 크게 체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우리 힘으로 바람의 방향을 조정할 수 없듯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은 인간이 간섭하고 조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야 말로 철저히 성령께서 그 지혜와 경륜 가운데 자율적으로 행하시는 고유의 영역입니다.
그럼 우리가 거듭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
우리의 본심이 백프로일 때 성령께서도 백프로 일하신다고 믿습니다.
본인이 생각해도 내가 결단하지 않았다면, 그런 마음에 성령께서 밀고 들어오셔서 거듭나게 한 일은 절대로 없다고 봅니다.
물론 성령으로 거듭났는 데 왜 이 모양이냐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죄의 본성은 끝없이 하나님을 밀어내고, 거룩을 기피합니다.
그래서 거듭나도 영적인 싸움이 나 자신과 평생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에 대해 잘 이해가 되셨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노년에 그린 피에타란 그림이 있습니다.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에 대한 슬픔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말합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시신을 안고 비통해 하는 모습을 조각한 베드로성당 피에타야 말로 미켈란젤로의 걸작 중 걸작이라고 하죠.
그런데 미켈란젤로 노년에 그가 그린 피에타란 그림은 좀 다릅니다.
그의 노년에 오랫동안 그린 이 그림은 축 늘어진 예수님의 시신을 뒤에서 받치고 있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날 거듭나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그 니고데모의 얼굴을 자기의 자신의 얼굴로 바꿨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내리고 향품으로 몸을 닦아드린 니고데모의 헌신을 자신도 죽기까지 드리고 싶었던 것일까요?
슬픔으로 굳게 다문 입술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의 신앙심이 느껴집니다.
죽기 전 미켈란젤로는 한참씩 그 그림 앞에 앉아 예수님을 묵상하곤 했다고 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성령으로 거듭났고, 어떤 분들은 육적인 나를 수장시키고 거듭날 것인지 의지적인 결단을 위해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묘한 생명력이 있어서 말씀을 듣고 배우면 분명히 우리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결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확실하게 진리를 깨달을 때 까지 열심히 성경을 보시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으시고 내 구원을 위해 진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4.11.23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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