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수련회 첫째날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한복음4장7절-19절
어떤 권사님 동네에서 진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노부부가 있었는데 생전에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늙어 두 사람 모두 치매가 되었데요.
자식들이 두 분을 요양원에 모셨는데,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아 할 수 없이 각각 다른 곳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두 군데를 다니다 보니 힘도 들고, 어차피 치매로 서로 못 알아보니 요양원 한 방에 합쳐서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한 방을 쓰시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며 예쁘다, 예쁘다 하며 그렇게 얼굴을 쓰다듬고 만져주고 하더랍니다.
사랑을 듬뿍 받은 할머니가 기적이 일어나 치매가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오게 되었다고 그래요.
자식들이 아버지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좀 부탁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아닙니다.
할아버지야 맨 정신이 아니니까 그렇게 했지만 할머니는 맨 정신이 돌아왔으니 어떻게 할아버지를 이뻐했겠습니까?
웃기는 하지만 한편 옆구리가 시린 이야기입니다.
가장 가깝다는 부부 사이조차도 사랑하며 살지 못하는 인생들이니 힘든 데다 고독하기까지 하다는 것이죠.
가족끼리도 따뜻하게 덮어주지 못하고 날을 세우고 사니 삶이 얼마나 껄끄럽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수가성의 여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결혼이 행복을 주리라 믿고 쫓았지만 결혼은 행복이 아닌 상처와 고통만을 남겨주었습니다.
다섯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여섯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수가성의 여인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셨다는 것이 바로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는 요한복음4장을 중심으로 수가성의 여인을 찾아 가신 예수님의 사랑과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임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체험하는 은혜가 없었다면, 오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잘 따르고 있는 분들이라면, 오늘 성령님의 충만케 하시는 은혜가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문은 공생애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지역에서 잠시 사역하시다 다시 고향이 있는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가고 계셨습니다.
지도상으로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그 중간에 이 사마리아지방이 끼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혼혈 유대인으로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무시와 차별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같은 도시 사람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부분 갈릴리 출신입니다.
갈릴리라는 지역 역시 유대인들이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르며 이방인과 섞인 과거가 있다며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사람들조차도 사마리아인은 상종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차별과 편견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까지도 예루살렘을 왕래할 때 사마리아지방을 피하기 위해 3,4일더 걸리는 요단강 계곡 쪽으로 돌아서 다녔다고 합니다.
역사가에 기록에 의하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가던 유대인을 사마리아인이 피살한 것으로 인해 두 지역간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싫어하는 것은 어지간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굳이 사마리아를 관통하는 여행코스를 잡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형적인 유대인들이니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따랐던 것이죠.
사마리아지역의 수가라는 성 앞에 이르자 예수님은 우물가에 털썩 앉아 버리셨습니다.
무려 72킬로 미터의 길을 걸어 온 여행에 다들 지쳐있었지만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제자들은 싫지만 억지로 수가성읍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마리아 생각만 해도 혼혈족의 불결한 이미지가 떠오르고 싫어 죽겠는 데 성읍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사와야 했으니 제자들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이에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나온 것입니다.
시각이 정오인데 한낮의 중동지역 날씨가 어땠겠습니까?
김덕영집사님이 지금 거기서 고생이 많으실 겁니다.
한 여행객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24킬로를 도보로 걷기 위해 생수통을 짊어지고 걸었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고 합니다.
이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물을 길러 온 여인이라면 분명 사연이 있을 것 같죠?
여러 번 결혼 생활이 파탄 나고 지금도 남편이 아닌 남자하고 살고 있는 평판이 좋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가 온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걸으셨습니다.
여인은 흠칫 놀라며 유대인 남자가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하냐고 되묻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까지 말씀한 대로 입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유대인들이 어떤지를 알고 있던 이 여인이 당연히 말을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낯선 유대인 남자를 경계하는 수가성 여인의 첫 반응은 처음 전도를 받고 뒷걸음질 치고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처음 전도를 받을 때 다 그랬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실패하고 더 오염된 삶을 살고 있는 여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런 방문에 움츠리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인에게 부드럽게 다가가 그 완강한 마음을 열고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경계심을 보이는 여인에게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금방 물 좀 달라고 하던 분이 대뜸 자신이 생수를 갖고 있다고 하니 앞 뒤가 안 맞는 이야기 같아 보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신 것이 항상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인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사람의 눈을 피해 물 길러 오는 것이 매일 겪어내야 하는 가장 큰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다 우물가에 아낙네들 몇이라도 남아 있으면 오던 길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고충을 알고 계셨기에 관심을 보일 대화로 여인을 진리로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적중하지 않았습니까?
여인은 점점 예수님과의 대화에 빠져 들고 결국 그 생수를 좀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하는 입장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백전백패 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실 방법이 뭐가 먹힐지 너무나 정확히 아십니다.
왜 나를 이렇게 다루시냐고 불평하신다면, 그것만 먹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여인은 처음에는 자기의 경험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을 보입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 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들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사람들은 처음에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근거로 예수님의 초청에 반응합니다.
구원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소개받을 때, 과연 이 세상이 주는 많은 것들에 비해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죠.
여인의 말에서 이 우물을 얼마나 대단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의 말에는 이 우물에 대한 자부심과 경외심마저 담겨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아직 우리에게 이렇게 커 보인다면 믿음의 여정은 바로 여기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일수록 더 집착하게 됩니다.
다른 아낙네들에게는 이 우물은 그냥 단순한 우물에 불과합니다.
우물가는 아낙들의 지루한 삶에 얕은 웃음을 주고 잠시 시름을 달래주는 일상의 장소일 뿐입니다.
평범한 그들의 행복이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때, 우물가는 여인에게 동경과 두려움의 장소였습니다.
남들은 이미 가졌기에 하찮게 여기는 것이라도 내게 그것이 없다면 그게 얼마나 우리를 아프게 합니까?
누구나에게 그런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남이 가진 평범한 가정, 직장, 가정, 학벌, 자식, 외모, 이런 것들이 내게 없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깊은 상처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고 나는 더 없이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죠.
여인에게 우물가의 일상과 세상의 물은 고통이고 그림의 떡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여인에게 결코 가져보지 못한 생수를 주겠다고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곳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발견합니다.
세상의 물을 먹는 자들은 다시 목이 마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다시 목마르게 하는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다 경험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잘 해내고 좋은 것을 얻었다 해도 그 다음은 또 목이 마릅니다.
인간의 내면을 만족시켜 줄 것은 이 세상 무엇으로 안됩니다.
미국대학의 한 연구팀에서 DNA를 연구하다 발견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 우울인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밖의 여건이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우울인자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불행감을 자꾸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물은 절대 우리에게 근본적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미인과 결혼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아름다운 연예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왜 결혼이 깨집니까?
쓸 만큼만 있으면 참 행복할 것 같은 데, 평생 쓰고도 남을만한 돈을 가진 재벌2세들이 왜 그렇게 재산권 소송에서 헤어나질 못합니까?
대단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서 그렇지만 우리 소시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근본적인 인생의 갈증이 사라집니다.
본질적인 목마름이 없어집니다.
갈증을 해소할 무언가를 얻기 위한 방황이 끝납니다.
그러나 이미 생수를 얻은 우리도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만족을 구하지 않고 세상에서 무언가를 구하려하면, 마음에 불안이 오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생각하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조급해하고, 세상에서 만족한 것을 누려볼 생각을 하고 있으면 틀림없이 샘솟는 생수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 안에 영생하는 샘물을 얻은 뒤에도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일시적인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성도들이 예수님 아닌 것에 더 마음을 두면 평안이 없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이런 목마르지 않은 물이 얼마나 간절히 욕심이 났겠습니까?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좀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면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영원한 생수를 받기 위해서는 남편을 불러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수를 담기 위해서는 지금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세상이 주는 물을 퍼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직까지 포기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한 집착, 결혼이 내 인생의 갈증을 다 만족시켜 주리라는 세상의 가치관이 가득 찬 심령에 생수를 담을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은 그야말로 돌직구였던 것입니다.
여인이 황급히 남편이 없다고 말한 것은 과거의 삶 전체를 감추고 싶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감추고 싶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여인의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물도, 아낙들의 뒷담화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여인을 비참하고 괴롭게 하는 것은 누구에든 감추고 싶은 죄였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쫒아 이리 저리 부딪히고 방황하며 손에 쥐려고 애를 썼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결과적으로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문제 자체만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전전긍긍할지 모르지만 사실 문제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어쩌면 낭비하는 습관이 문제일 수도 있고 더 깊은 내면엔 허영심이란 죄가 있다는 뜻입니다.
대인관계에서 자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내가 가는 곳엔 꼭 이상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죄의 본성 중 유독 편협하고 교만한 죄 때문일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내놓자는 것입니다.
행복을 찾아 헤맸지만, 가는 발자취 마다 찍어 놓은 죄의 발자국을 보라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죄가 점점 더 나를 옭아매고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지는 인생.
이것이 바로 세상 물로 만족하려 했던 인생이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십니다.
내가 방패막이 삼아 세상을 살고 싶어 했던 그 무엇. 마치 모든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아 쫒고 있는 그 무엇.
감추기 위해 허망한 것으로 자꾸 덮어 씌우고 있는 그 것.
그것을 지금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오늘 수술하고 깨끗이 버리자.
결코 만족도 행복도 줄 수 없이 신기루처럼 따르고 있던 그것을 오늘 꺼내 내버리고 내가 주는 영생하는 샘물을 받아라.
이를 위해 내가 천국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너를 찾아왔다.
이 음성을 오늘 모두가 듣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분 한분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정말 우리에게 있었던 이해할 수 없던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됩니다.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렵고 힘든 시기도 많이 겪었지만 인생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은 사라졌고 제게 항상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잘나가는 사람도 부럽지 않고 잘난 사람도 별로 부럽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걸 아는 그것이 왜 그렇게 나를 당당하게 하는 지. 남 부러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붙들고 있는 그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한,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샘물이 되어주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계획한 게 더 낫다고 고집하고, 내 인생의 권한이 내게 있다고 주장하는 한, 더 아름답고 완벽한 하나님이 계획한 인생을 펼쳐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으로 가져 갈 남편이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욕망이든, 여전히 내가 주인 된 삶이든, 감춰진 죄 문제든, 깊이 숨겨둔 열등감이든, 오늘 밤 성령께서 우리 양심의 깊은 곳을 만져주실 때,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우리의 가장 수치스러운 문제, 절대 남이 건드릴까봐 웅크리고 있던 아픈 상처도 이 시간 예수님 앞에 내어 드리길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심령을 오늘 밤 영원한 생수로 채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14수련회 둘째 날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요한복음4장19절-30절
이번 수련회에서는 우리는 수가성의 여인의 구원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을 찾아가신 때를 살펴보면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하나님께 나올 때가 언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만나러 가신 때는 행복에 부풀어 첫 결혼을 하고 남들처럼 알콩달콩 살아가던 때가 아닙니다.
첫 결혼이 실패하고, 또 기대를 갖고 다른 남편을 만났지만 역시 상처만 남기고 두번째 결혼도 불행하게 끝이 났습니다.
다섯 번의 결혼이 다 실패하고 이젠 정상적인 결혼의 행복은 꿈도 꾸지 못할 최악의 상태가 된 상황입니다.
현재 함께 사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그냥 남자였습니다.
인생에 대한 회의가 오고 환멸을 느낄 때, 내 자신의 무능함에 앞 날이 두렵게 다가올 때, 그 때가 아니면 사람들은 예수님께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옆에 다가오셔도 안중에 없죠.
지금 삶이 너무나 재미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건강해서 매일 운동하고 등산 다니고 축구하는 사람들, 죽음 다음의 생에 대해 아무 관심 없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기정사실이란 생각조차 뇌리에 없습니다.
사업이 궁지에 몰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를 도와 줄 어떤 절대자를 떠올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귀신들려 인격이 파탄 나고, 질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손가락질 속에서 살던 자존심이 다 무너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결같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고 괴로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성경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재산이 있고, 건강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나온 때를 생각해봐도 공감이 가실 것입니다.
버틸 때 까지 버티다 삶의 압박과 초조와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버티냐면 오늘 주인공 여자처럼 무려 여섯번의 결혼이 실패할 때까지 버틴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아니고도 살 방도가 있을 때 까지는 솔직히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학벌이 좋고 잘 살고 세상적으로 큰 근심이 없는 사람들, 게다가 도덕적으로 괜찮게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을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고린도성도들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다 그런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기분 나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부름을 받아서 왔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한없이 존귀한 자들이 되고 세상적으로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능력있는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감사한 게 우리가 인생의 고비를 만나 파탄을 맞지 않고 이렇게 예수님 앞에 나와 삶이 수습되고, 호전되어 간다는 것이죠.
지금 내 삶에 만족이 없고, 무얼 해도 갈증이 나고, 항상 걱정과 근심이 누르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가장 좋은 바로 그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을 때, 그 문제를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이 땅의 문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는 문제는 무슨 영적인 성장이나 하나님나라 같은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냥 우리 가정문제고, 우리 아이 대학 합격하는 것이고, 직장문제, 건강문제, 돈 문제 뭐 다 이런 것입니다.
그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그 내면의 깊은 죄가 모든 문제의 범인이라는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에게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갈증이었고, 남의 눈을 피해 물 길러 오는 문제였지만 예수님께서 남편을 여섯씩이나 둘 수 밖에 없는 죄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어제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죄가 죄라는 것을 자꾸 알게 해주십니다.
죄에 대해 감각하지 못하는 한,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내가 죄를 모르는 데 무슨 구원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곤란한 형편과 삶에 지쳐 교회에 발을 디딘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조금씩 내 죄를 지적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불편하게 할 때가 있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본문19절을 보면 여인이 드디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말씀과 성령이 우리를 비추시면 비로서 우리 영이 깜짝 놀라 오직 세상을 향했던 눈이 영적인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물만 먹던 삶에서 이제 영적인 문제에 진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가성의 여인도 영적인 관심을 보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 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런데 영적인 관심이 생기더라도 사람들은 처음엔 자기가 경험하고 줏어 들은 이 땅의 종교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어려서 부터 무속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적인 관심이란게 무속적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무당이 굿을 해서 신령을 잘 달래 액을 면하고 복을 받는 취지로 하나님을 믿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혹은 종교가 다 같지, 다 좋은 것 가르치니 아무거나 믿고 착하게 살면 복받지. 이런 차원이라는 것이죠.
전도를 해보면 종교에 대해서 사람들이 다 이렇게 나름 아는 체를 합니다.
부모 때부터 보아오던 무속과 유교와 불교, 이런 게 짬뽕 된 나름대로의 종교관을 갖고 그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자꾸 내가 알고 있는 이 땅의 종교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속죄해주셨다, 이런 이 낯설고 이상한 진리는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지금 사마리아여인의 영적 관심이라는 게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기 민족들이 드리는 예배 행위, 실은 하나님의 규정하신 예배에서 한참 벗어난 그 예배를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되는 지 절대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21절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자라온 배경과 한국적인 정서로 인해 갖게 된 잘못된 믿음이 수도 없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신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조상 적부터 알아오던 막연한 천지신명이 아닙니다.
유대민족을 통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보여주신 그 하나님. 인간의 구원을 위해 메시야를 보내실 유대민족을 이루시고 그들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계시해주신 그 하나님,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요한계시록을 통해 인류역사의 종결자와 심판자가 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역사의 주권자 되시고 역사의 한 복판에 좌정하고 계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주변나라들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역사하시고, 기적을 통해 존재를 보여주신 하나님을 반드시 유대민족의 역사인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 구원의 모든 역사를 계시하셨고 거기서 복음이 전세계로 전해져 온 인류가 구원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기 이전에는 우리 민족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직 성경을 배워서 자신을 계시해주시고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그 인격적인 하나님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정말 자칫하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천지신명 처럼 하나님을 부르며 자기 확신대로 믿기가 쉽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해 준 대로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막연히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그냥 인간의 종교입니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통해 계시해주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준비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직 인류를 구원하실 한 분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바로 메시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지목하시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단지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결코 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영이 죽은 상태에서 육으로 신을 섬깁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육으로는 절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감지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답답하다면 아직 육으로 예배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영으로 거듭나게 하셔야 비로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의 눈이 그제사 성경에서 들은 한 분에게 쏠립니다.
25절,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드디어 여인의 입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을 좀 시원하게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꼬인 인생도, 희뿌연 종교생활도, 그리스도가 오시면 해결될 거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구원의 문턱에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막연한 하나님을 믿는 데 지쳤습니까?
예배는 드리지만 영이신 하나님을 육으로 예배하니 예배에 감동도 감격도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안에 깊은 갈증이 생깁니다.
‘예수님에 대해 좀 알고 싶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사람에게 즉시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일부러 숨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 그리스도를 간절히 만나길 원한다면 자신을 드러내 만나주십니다.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나자 드디어 자신을 억누르고 헤어나지 못하게 옭아매었던 죄의 짐이 한 순간 벗겨지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기쁨에 겨워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신앙의 여정의 한 시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에게 이스라엘에서 사셨던 한 유대인 랍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잘 들여다 보면 각자가 사마리아여인의 변화되는 과정 중에 한 시점에 있습니다.
동경하고 쫒아가던 것에 낭패를 당하고 세상과 사람에 대해 불신과 실망감에 빠져 있다 겨우 예수님 앞에 나온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계시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막연한 하나님을 섬기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그리스도로 분명히 만나고 따르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어느 정점에 있든지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들려주시길 원합니다.
내가 그로다, 내가 너의 죄를 속죄하고 구원할 그 그리스도이니라.
이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는 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어떤 행복을 쫒고 있든, 인생은 끝이 납니다.
우리는 이 인생 뒤에 있을 생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밤은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우리의 속죄주 그리스도이심을 만나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 눈을 열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계시해 주셨던 바로 그 예수님을 만나는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2014수련회 셋째 날(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한복음4장27절-38절
오늘은 주일예배이자 수련회 마지막 날이 되겠습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너무나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그 중에 더욱 더 축복 된 메시지를 우리에게 들려주실 것입니다.
본문을 읽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가 무엇인지는 다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전도해라’ 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대와 민족과 신분을 초월해서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에게 오늘 이 복된 말씀을 주셨고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말씀하셨듯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을 또 자세히 살펴보며 예수님의 말씀이 왜 우리에게 복된 명령인지를 깨닫게 되길 소망합니다.
어제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내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밝히심으로 여인의 삶에 구원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시고 나의 죄를 속죄하신 구주가 되심을 다 깨닫는 은혜를 주신 줄 믿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27절에 사마리아 성 안으로 음식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온 것으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돌아와 보니 예수님이 사마리아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이상히 여기고, 깜짝 놀랐다고 기록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왜 사마리아여자를 상대하고 계시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분위기가 느껴지십니까?
첫째 날 제가 말씀드렸죠?
보통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막상 사마리아 땅에 들어서자 예수님은 성읍 안으로 들어 갈 생각을 안하시고 우물 어귀에 털썩 주저 앉으시고 제자들만 성안으로 들여보내십니다.
평소 예수님이 하시던 대로라면 힘들다고 제자들만 보내 음식을 사오라고 하실리가 없었겠죠?
먹을 것을 먼저 챙겨주신 분은 항상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성경 여기저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 무엇이라고 제자들이 판단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긴 하셔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내심 자기들만 사마리아사람들에게 보내 음식을 사오게 두시는 예수님께 불편한 심기였을지 모릅니다.
유대인만 사마리아인을 상종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마리아인도 유대인을 싫어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무리지어 주욱 들어와서 먹을 것을 사겠다고 할 때, 기분 좋게 음식을 팔 리 만무한 사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먹을 것을 구해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힘들게 요기거리를 구해서 우물가로 돌아왔더니, 거기서 예수님이 뜻밖에도 사마리아여자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남자들이, 특히 랍비들은 낯선 여자들과 밖에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제자들 눈에 예수님의 모습이 이상하게 비쳤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하지 않는 사마리아사람을, 그것도 여자를 상대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이 분명히 탐탁하지 않았습니다.
랍비로서의 체신이 없어 보이는 기행이라고 느꼈을 만합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무슨 일이냐 끼어들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문 제자들 때문에 분위기가 좀 썰렁했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을 만나고 감격한 여인이 세상에서 쫓던 물동이를 걷어차고 새 삶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설교를 많이 듣고 은혜도 받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그렇게 추측할만한 단서는 없습니다.
물론 여인에게 구원의 감격은 워낙 충격적이기에 물동이를 깜빡 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먹고 살던 물동이, 그렇게 쉽게 걷어 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굳이 요한사도가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 둔 사실을 기록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렸다고 하는 말 앞에 원문에는 ‘그래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죠.
제자들이 골이 나서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무안해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황급히 마을로 들어갔다.
이 말씀을 왜 짚고 넘어가냐 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사마리아지역을 찾아오셨는 지 알지도 못했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찾아내시고 만나시는 의미가 무언지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구원할 뿐 아니라 영혼을 추수하는 일에 부르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죠.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그런데 제자들 마음이 전혀 죄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에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자를 전도하신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도 영혼을 구원할 사명을 이제부터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한편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간 여자는 뜻밖의 행동을 보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를 분명히 꺼려했을 여자가 동네방네 다니며 떠들고 다닙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 복잡한 과거지사를 다 알아 맞춘 사람이 있으니 와서 좀 보시오. 이 사람이 그리스도가 아니겠소.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감추고 싶어했던 그 수치스럽던 삶, 열등감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정말 내면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과거의 죄도, 불행한 삶도, 다 전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드러내도 더 이상 창피하지 않고 상처가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이 참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가 옛날 같으면 어떻게 과거의 내 죄를 스스로 폭로하겠습니까?
내 열등감이 뭔지 드러내기가 참 힘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고 나면 우리가 은혜스럽게 간증하는 게 다 세상에서 죄도 짓고, 나쁜 짓도 좀 했고, 내가 좀 못된 사람이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내가 이렇게 변하고 달라졌다는 게 그게 간증이고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죄의 수치심을 치유받고 나면 그렇게 심하게 자신을 가리고 위장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자는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를 드러내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희한한 장면은 이런 평판이 나빴을 것 같은 여자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30절에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이 말씀의 원어의 뜻에는 ‘몰려오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여자의 말을 듣고 떼를 지어 예수님 계신 곳으로 몰려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감격스럽고 가슴이 뭉클한 장면 아닌가요?
죄인들이 구원을 받겠다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모습만큼 진실 되고 아름다운 광경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31절을 보면 그 사이에 제자들은 음식을 펼쳐 놓고 예수님, 좀 드시죠.라는 것입니다.
이 두 그룹 사이에 상반 된 분위기가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은 구원에 눈이 떠져 천국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상종도 않던 유대인인 예수님 앞으로 몰려오고 있는 데, 제자들은 그런 분위기는 감지도 못하고 땅의 음식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장하신 예수님도 잡수시고, 제자들도 식기 전에 어서 먹어야 겠죠.
그러나, 이 두 그룹의 행동 가운데에 ‘그 사이에’라는 긴박감이 있는 용어를 쓰며 사도요한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역동적인 모습과 이 땅의 음식에 코를 박고 있는 제자들의 당시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때 자신들의 모습이 참 연약하고 무지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습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에 갈급한 마음을 갖고 모여들 때, 제자들은 이 땅의 메시야 왕국에서 한번 멋들어지게 정치해볼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으로 심는 자는 영의 일을 거두고 육신으로 심는 자는 육신의 것을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32절에서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답답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누가 벌써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나보라며 서로 수근거렸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동문서답은 하나님의 뜻을 정말 잘 못 알아먹는 우리하고 닮은 것 같습니다.
항상 관심은 우선 이 세상의 것이죠.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구원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죄에서 구원해 내면 밥 안드셔도 배가 부르시다는 것입니다.
밥 먹는 일보다 더 관심 있는 일이 있으십니까?
세상에서 밥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우리를 사로잡는 일이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밥 먹는 일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게 더 배부르다고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에 한 없이 집착하고 싶지만 더 만족스럽고 배부른 일은 사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고, 전도해서 죄인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섞지 않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신 말씀과도 통하는 말씀이죠.
하루 하루가 참 녹록하지 않은 인생입니다.
비단 나이가 먹어서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청춘도 돌이켜 보면 고뇌가 많고 죄가 발목을 잡고, 가난과 불안 속에 마음껏 젊음을 누리지도 못하고 넘어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 마다, 내일이 두렵고 자신감이 사라질 때 마다, 눈을 들어 나를 사랑해서 죽으셨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렇게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아버지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되고 힘이 솟아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면 어느 새 불안하던 마음을 평안으로 감싸주시고 어두운 그림자가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이런 구원의 기쁨과 은혜를 다른 사람도 누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 중에 아직도 과거에 우리가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과 인생에 대한 허무에 빠져 실체도 없는 행복을 찾아 쫒기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도 불러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35절을 보면 너희는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판단할 때, 아직 구원의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 보이겠지만, 영적으로 이미 다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아직 때가 아니야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추수 때가 얼마나 중요한 지 농사를 지어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넉달 지나서 추수할 생각을 하고 있는 데, 이미 곡식은 다 익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넉달 뒤에 곡식을 거두러 나가면 이미 늦습니다.
추수시기를 놓치면 곡식이 날마다 상합니다.
우리가 추수해야 할 영혼들을 뒤로 미루고 있을수록 더 다치고 더 상한다는 것입니다.
추수할 주인은 마음이 급하시다고 합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고 있다.
주인이 얼마나 급한 지 일도 끝나기 전에 선금부터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죄와 사탄의 억압 속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급하신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구원의 씨앗을 뿌려주신 예수님과 복음을 전해서 구원얻게 하는 우리가 함께 즐거운 것이 바로 전도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즐거움은 세상의 어떤 즐거움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교회에 잘 출석하고, 믿음이 든든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보람 있고, 하나님 앞에 내가 유일하게 자랑해도 될 만한 일입니다.
성경에서 추수라는 의미는 종말론적인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 땅에 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종말론적 믿음과 영혼을 추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함께 갑니다.
고인이 된 스티브잡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언젠가는 인생이 끝나고 죽을 것이라 생각하면 부차적인 것은 다 없어지고 본질만 남는다.’
멀지않은 미래에 이생을 정리해야 한다면 지금 내가 집착하는 것들이 과연 그렇게 가치있는 일일까요?
나와 가족들에게 이생에서의 종말이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영혼이 구원받고 영혼을 구원한 즐거움과 만족과 기쁨은 역사의 종말, 내 인생의 종말을 맞았을 때, 더 진가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치고 하나님나라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에서 내가 전도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감격을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밥드시는 것 보다 더 전도가 배부르다고 하셨습니까?
천국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려고 그렇게 전력을 다했습니까?
천국에 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나산가족수련회를 통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셔서 가장 값지고 영원한 보배를 천국에서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는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몰랐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그런 위기와 벼랑 끝에 삶을 사는 불쌍한 영혼들을 성령께서 보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영상을 하나 보신 뒤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젊은 목사가 저렇게라도 해서 복음을 전해보겠다는 진실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들이 기도를 부탁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제 우리도 사마리아여자 처럼 내가 만난 예수님을 메시야로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복음전하기를 작정하는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주의 나라를 위해 구할 때, 내 마음을 짓누르는 세상 근심과 문제들도 넉넉히 감당하고 승리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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