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14장1절-11절:수련회 둘째 날)

남수연 2013. 8. 5. 15:25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 날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잡수시던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좀 전에 흥겹게 바비큐를 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듣지만 본문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점점 분위기가 침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란하고 침통한 얼굴을 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우리도 세상일을 잠시 접어두고 하나님 안에서 은혜의 시간을 갖기 위해 모였지만 여전히 마음 한 켠에 걱정거리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변함없이 명령하시는 것은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어디 염려가 되지 않습니까?

마음을 아무리 편히 가지려 해도 근심과 염려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근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몇가지 교훈을 살펴볼 때 성령께서 큰 은혜로 임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근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에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작아질수록 근심 염려는 점점 커집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생기고 믿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든든하게 의지하고 믿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올라가시겠다는 이 현실을 제자들이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왔던 것은 그럼 다 무엇이란 말인가?

속은건가?, 예수님이 실패하신 건가?

이런 갈등과 의심이 온통 머리 속을 휘젓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런 위기에 빠질 때가 누구나 있습니다.

분명히 잘되야 맞는 데 안 되는 것입니다.

최선의 노력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고 확신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우리를 실망시킬 때 우리 믿음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 현실에 대한 근심과 염려가 덮쳐 옵니다.

지금 제자들 마음 속에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되는 걸까?

3년 간 생업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는 데 이제 뭘 먹고 살아야하나?사람을 낚게 해주시겠다던 예수님의 약속은 공수표가 되는 걸까?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틀림없이 우리까지 체포할 텐 데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다 십자가에 달리는 건 아닌가?

그 두려운 생각들로 제자들의 얼굴에 근심이 어둡게 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니 안되기도 하고 속도 상하셨을 것입니다.

그 허탈하고 낙심한 마음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근심 좀 그만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심코 어딘가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 참 굳어있고 어둡다는 생각에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아는 누군가를 길에서 보았는 데 대부분이 근심이 끼어 있고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을 보게됩니다.

이런 저런 근심이 떠나지 않는 게 우리의 사는 형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이 무슨 근심을 하고 있는 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읽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 마음에 들어 찬 근심도 다 아시죠.

오늘 저녁 어제 밤에 이어 근심 좀 그만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듣고 나서 또 근심하고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결과적으로 헛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걱정하는 것과 달리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민란 죄의 주동자가 체포되었다면 가담자도 색출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하신 대로 그들 모두 안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두려워 했지만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담대히 설교했더니 약속하신 대로 유대인들을 오천명 씩 낚기 시작합니다.

불과 얼마 뒤 제자들이 지금 근심하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예수님 말씀이 맞잖아요, 근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우리는 이미 이긴 경기의 재방송을 보듯 지금 제자들의 모습을 관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좀 믿고 염려하지 않아도 될 텐데 죽을 것 같은 근심에 눌려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좀 안됬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근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들 또한 잠시 뒤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문제들을 돌봐주신다는 말씀인 데 일이 이뤄지는 동안 뭐하러 근심하며 괴롭게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제자들에게 그들의 걱정하는 것들이 단지 쓸데없는 기우였다는 게 확실한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근심도 다 쓸데 없는 일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근거해서 잘 생각하며 믿어야 합니다.

매순간 바뀌는 감정과 앞에 있는 걱정거리만 바라보면 평생 근심 걱정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걱정거리 해결되었지만 또 다음 걱정하며 살 것이잖아요?

근심이 버릇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근심과 염려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안되죠?

그야말로 껌딱지처럼 우리 뇌리에 찰싹 달라붙은 근심이 어느 순간 없어진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습니다.

근심에 몰두하려는 것은 우리의 죄의 본성입니다.

다른 악을 저지르는 것처럼 근심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고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근심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잖습니까?

주변에 크게 근심할 일이 없으면 괜히 자기 건강을 염려하며 병원을 전전하는 건강염려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순천향병원에 진료하러 오는 사람들의 20%가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는 데 그냥 불안해서 찾아오는 염려증환자라고 합니다.

아무리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 나와도 그럴 리가 없다고 또 다른 병원을 전전하고 다닌답니다.

나중엔 정신과 질환으로 발전되고 스스로 근심하다 보니 실제 신체적인 병이 되는 사례도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언 17장22절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그런 염려에 발목이 잡혀 아무 것도 못하는 삶을 원치 않으십니다.

염려가 얼마나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그야말로 뼈를 마르게 합니까?

성경에선 근심, 염려, 걱정에 빠지는 것을 무조건 막으십니다.

기독교인의 표지가 무엇입니까?

기쁨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확실하게 보장 된 미래에 대한 소망이라고 말씀합니다.

다 염려하고는 먼 것들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이끌어 주시는 데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며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앞으로의 좋은 결과를 믿으십시오.

오늘 예수님 말씀을 대로 우리 모두 오래동안 친구처럼 끼고 살던 염려와 근심을 다 쫒아버리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낙천적인 성격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코 앞에 버티고 있는 문제를 보고도 근심이 안되겠습니까?

제자들 상황도 우리가 가진 근심처럼 너무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근심하지 말라며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말씀은 좀 엉뚱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천국에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장 고민하는 문제는 생업의 문제이고 실패의 문제고 체포 될 문제인 데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거처가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코 앞에 문제가 있는 데 앞으로 먼 훗날에 닥칠 천국의 소망이 근심을 멈출 썩 좋은 방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그러나 세상에서 인류의 죄악 된 역사가 진행되는 한, 마귀의 세력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죄성이 내 삶을 이끌어 가는 한 근심거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근심거리는 당장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당장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근심거리입니까?

우리 힘으로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곤고한 짐이고 걱정거리인 것이죠.

기도한다고 갚아야 할 빚이 한 순간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얽히고 설킨 문제들이 한 순간 풀리지도 않잖아요.

그 문제들을 위해 우리는 해결할 방법을 궁리하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렇게 근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차하게 곤고하게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걱정 많은 세상에 침몰하지 말고 우리의 소속이 있는 영원한 천국을 기대하고 바라볼 때 당장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근심도 털어낼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고 모든 것이 완성되고 풍족한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성도들의 인생입니다.

군대있을 때 초코파이 한 개에 목숨을 걸지 모르지만 제대를 생각하면 맛있는 사제음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설령 이 땅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해도 천국에는 나를 위해 진짜 좋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나의 내세에 모든 좋은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신다는 것이 이 땅에서 근심에 질식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이 진짜 힘이 될 만큼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도마가 5절에서 예수님께 난감한 목소리로 이렇게 되묻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 지 알지도 못하는 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사옵나이까?

얼마나 답답한 말인가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천국에 가는 길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기적도 보고 말씀도 듣고 천국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았는 데 예수님이 떠나실 것을 생각하니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평소에 믿음이 있고 천국을 확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환란이 닥치고 걷잡을 수 없는 풍랑에 정신을 못차리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어디계시고 과연 천국이 있는 것인가?

내가 죽은 다음 살아야할 영원한 생이 불분명하다면 얼마나 두렵고 절박한 마음이겠습니까?

도마의 마음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죽음 뒤의 내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죽음 뒤의 삶을 생각할 때 그야말로 두려움입니다.

힐링캠프에서 결혼계획에 대해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김제0동씨가 결혼 생각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죽음 앞에서는 허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이런 인생을 다른 생명을 낳아서 넘겨주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티즌들이 더 웃깁니다.

김제0동, 힐링 너무했나?

아무리 힐링 캠프를 차려서 마음의 상처를 좀 위로받는다 해도 죽음과 내세와 내 운명에 대한 문제는 영원히 인간에겐 이해 못할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고 있고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제가 죽는 순간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쨌든 우리 육체는 좀 고통가운데 있겠죠.

그런데 어느 순간 간단히 옷을 벗듯 내 인격체, 내 본질이 전혀 고통도 없이 몸을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숨이 멎으면 내가 영원히 사라지는 죽음이 오는 줄 알고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막상 심장의 박동이 멎는 순간에도 나 자신은 그냥 여전히 똑같은 나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런 아버지 나라로 순식간에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날 예수님의 재림 때 다시 나의 육체와 결합되어 완전하고 아름다운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모든 좋은 것들만 누리며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천국의 영광을 아시기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도 평생 근심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십자가의 형벌이 가까이 올수록 하얗게 질려 그 전에 벌써 사망했을 지모릅니다.

예수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지은 주님의 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먹기를 탐하는 자, 먹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며 초대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가서 함께 어울리고 즐거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가 초상집 같은 분위기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고통을 참아내신 것은 눈 앞에 있는 영광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천국에 처소를 예비하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근심 중에 다시 용기를 내고 기쁨과 소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은 지극히 경미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말씀대로 믿으세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모아도 천국의 한 조각 기쁨과 비교될 수 없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도마의 문제, 천국과 그 길이 막막한 사람들을 어떡합니까?

예수님께서 어리석고 의심이 많은 도마와 우리들의 질문에 다시한번 유명한 자기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국에 이르는 그 길은 오직 한 길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죄인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던 아버지의 영광의 나라의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너무나 깊고도 먼 심연을 느낍니다.

죄악으로 온통 오염 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체를 대면할 때 견디지 못하고 소멸됩니다.

그 죄를 가리기 위해 수도 없는 짐승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는 지성소 앞에는 두께가 30센티나 되는 무거운 휘장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새어나오면 죄가 있는 자들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그 지성소 앞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 찢어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0장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그 깊은 심연을 이어주는 길은 오직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의 몸입니다.

김동0목사님이 한 때 어쩐지 자기가 오래 살 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리 유서를 좀 써 놓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두 아들에게 유언장을 쓰는 데 김목사님이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이 말씀을 먼저 썼다고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유언장의 내용을 아직 어린 아들들에게 설명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큰 아이가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아빠,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어?’라고 하더랍니다.

순간 목사님이 입에서 자기도 생각지 않았던 말이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아빠가 가 봐서 알아.’

그 말을 하고 정말 맞다 기가막히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아빠가 가봤다면 맞을거야’ 하며 수긍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길 되신 예수님을 통해 걸어가 아버지께로 나아가셨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정말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갈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유일하신 길 되신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축복과 영화로운 생애를 준비하신 줄 믿습니다.

그 때 빌립이 궁금하고 참았던 말을 내놓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 질문에 예수님의 다리에 힘이 탁 풀리셨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하실 때 마다 이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거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모든 일은 아들의 뜻대로가 아닌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누누이 가르치셨습니다.

이제와서 생판 모르겠다는 듯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제자들의 초조한 눈빛을 보며 예수님이야 말로 앞이 캄캄해 지셨을 것 같습니다.

이 땅에 아직 죄인으로 있을 동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를 볼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기 위해 육신이라는 겉 옷을 두르시고 우리에게 오셨잖아요.

그리고 제자들을 그토록 사랑하시고 자상하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하나님 자신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아버지를 보이라고 재촉을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마당에 솔직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그 신성에 대해 의혹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의 가슴에 제자들의 이 불신의 말이 비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죄인들이 감히 볼 수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과 일체이십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마찬가지인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가 아니면 성부하나님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숨겨진 하나님을 떠나 그리스도에게 달려가라.’

성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과 광휘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죄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행한 모든 행적을 통해서만 살아계신 성부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성부하나님과 동일하신 성자 예수님에 대해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모든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죽어서 비틀어진 영을 되살려 주실 때 이 모든 영적인 세계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어리석은 질문을 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 비로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요한사도가 이걸 깨닫자 이렇게 탄성을 지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령께서 오셔서 그 모든 것을 해석하고 비춰주시니 그게 믿어지게 된 것이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바울사도 역시 골로새서1장 19절에 말씀하죠.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우리가 성령이 열어주시는 영적인 안목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가 믿고 확신이 들 때 이 땅의 어떤 문제와 시험도 넉넉히 헤쳐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깨달음과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주시길 오늘 밤 더욱 간절히 구하는 시간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작년 조계사에서 불교계의 논객이라고 불리우는 도0승려가 원로승인 고0승려에게 묻고 답하는 야단 법석이란 행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도0승려의 질문에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달음만이 인생의 해답이라 생각하고 22살부터 40살까지 참선에 몰두했지만 깨달음이 이뤄지지 않아 심각한 회의와 좌절감을 안고 선원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의문을 갖고 있는 데 고0스님은 깨달음 때문에 좌절감을 겪은 적이 없었는 지 알고 싶다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노승인 고0승려가 그런 질문을 한 것에 대해 경계를 하며 아직 깨달음의 도중에 있기 때문이라며 성철 큰 스님이 들으면 야단했을 것이라고 대답하더군요.

평생 도를 닦아 온 60이 넘은 두 승려가 나누는 이야기를 제가 읽고 참 생각이 많았습니다.

저분들이 정말 평생을 그 길이 무엇인지 고행을 하고 참선을 하며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저렇게 애를 쓰는 데 안된 말씀이지만 인간의 본질을 사색을 통해 구상해 놓은 불경에 적용하려니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 인간의 본질과 딴 판인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니 안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도0승려가 자신이 젊어서 폐결핵에 걸려 교회를 찾아갔는 데 목사가 문둥병과 결핵은 하늘이 내린 병이라고 하는 소리에 밖으로 나와 절로 들어갔다는 소리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절로 안타까운 기도가 흘러나오더군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고뇌하고 고행하며 구원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길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는 지를 생각하니 한없이 감사가 되었습니다.

부디, 우리가 누구에게건 내가 예수님이 길이신 걸 가봐서 알아, 자신있게 증거할 수 있는 체험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면 절대 성부 하나님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고행이나 인간의 사색을 통해 하나님아버지를 찾아가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에 십자가에서 내 죄를 속죄하시려고 여섯 시간을 매달려 고통당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느끼고 믿어지게 역사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과 왕으로 모실 때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이 또한 의심 없이 믿어질 것입니다.

2013.7.27.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