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 속에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운명이 바뀐 숱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재0후보가 정치인으로 입문하게 된 동기도 인권 변호사시절 노무0 전 대통령과의 숙명적인 만남 때문이라고 하죠.
또 굶주림에 지친 한 노숙인에게 라면 한끼 끓여준 만남으로 최일0 목사는 평생 밥퍼 주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공생애 사역을 함께 할 제자들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천년전 이름도 없이 역사 속에 사라졌을 시골청년들의 삶을 뒤바꾼 역사적인 만남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영생을 얻고 인생이 역전되는 축복도 받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내 인생이 역전되고 난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고 믿어지지 않는 분들은 어쩌면 아직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이것 밖에 안돼? 하는 분들은 더 큰 기대를 가지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확실히 모신 사람은 지금 형편이 남보기에 별볼일 없는 것 같아 보여도 본인은 확실히 압니다.
내가 대박 난 인생이란 것을.
예수님은 본문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와 똑같이 지금도 우리를 제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동네에서 어떤 아주머니께 전도지를 드렸더니 그 분이 눈꼬리를 올리시며 당찬 목소리로 ‘난 부처님 제자예요’라고 하는 데 제가 한 방 먹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난 예수님 제자예요’라고 시원하게 밝히게 됩니까?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죠.
마태복음28장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능력 있는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좋지만 제자가 되는 것은 별로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동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치료와 기적의 수혜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많이 모였지만 주님의 사역 마지막까지 제자로 남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나라 일군으로 지원하는 사람은 적어지고 주의 일에 대한 인기는 점점 식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최근 박근혜당선인 주변에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이 야심을 갖고 모여들겠습니까?
이 땅의 왕국에 충성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하늘의 왕국을 위해 충성하려는 사람은 적은 것이 안목이 짧은 사람들의 판단인 것이죠.
박당선자와 노선을 달리하고 떠났던 사람들은 지금 선택을 후회하며 밤잠을 설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절대 주님의 제자로 따르는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의 삶에 대한 부담이 싫고 때로 십자가를 져야 하는 순종이 매력이 없어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은 순종하고 따르는 만큼 댓가와 상급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헌신하고 따른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19장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현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예수님이 제자가 되라는 것은 제자의 삶이 축복된 것이기에 그러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힘들게 운동을 시키고 공부훈련을 시키는 게 어디 부모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제자의 특징을 살펴보며 우리가 모두 축복받는 제자의 삶에 다시한번 도전하기를 축원드립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메시야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의 제자들을 별로 배운 게 없는 어부 출신의 투박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본문을 보면 그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37절에 보면 최초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증거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온 두 제자입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40절에 이름이 나와 있죠.
다른 한 명은 이름이 없지만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사도라고 봅니다.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지만 이미 세례요한의 제자로 입문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선지자입니다.
그의 임무는 곧 유대사회에 등장하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임을 증거하기 위해 앞서 보내신 자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는 제사장아버지를 둔 안락한 집을 나와 어려서 부터 광야에서 훈련받으며 야성적인 삶을 삽니다.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었다고 성경은 기록하죠.
그에게 많은 제자들이 모였고 아마 제자훈련도 빡세게 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드레와 요한이 바로 이 세례요한을 따르는 제자였었다는 것이죠.
이미 그들이 메시야의 구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다음 두 번째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41절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메시야라고 확신한 안드레가 제일 먼저 그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예수님께 데리고 오죠.
베드로 역시 평소에 메시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랬기에 그도 역시 안드레의 말을 듣고 당장 주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다음 등장하는 제자는 빌립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직접 발탁되어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5절에 보면 절친한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빌립도 이미 율법에 기록 되었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에 대해 대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 친구 나다나엘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48절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우리 스타일로 말하자하면 기도원에서 소나무 뿌리 뽑히도록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물고기 잡고 내다 파는 일에만 정신을 쏟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메시야의 민족 구원을 열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제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만나 보면 영혼과 내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도 전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는 이 땅에서의 삶에 너무 만족해하고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 자체를 거부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제자 될 시기가 아닙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삶의 대부분을 현실적인 일에 몰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제자로 살아갈 믿음으로 굳게 성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바쁜 구조 속에 우리를 몰아넣고 숨 돌릴 여유도 없이 몰고 갑니까?
이렇게 휘말려 세속적이고 육적인 일에만 시간을 쓰고 몰두하는 사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성장하지 못하고 약체로 살게 됩니다.
육적인 삶에 모든 정력을 부었으니 육적인 삶이 번영하냐하면 그것도 아니더군요.
실제 삶에서 믿음이 능력이 되는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영적인 생명을 꾸준히 성장시켜 가야 합니다.
영적인 관심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 자주 참석하고 평소에 성경을 꾸준히 읽고 매일 시간을 내 기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관심도 점점 높아지는 것이죠.
신앙도 평소 실력이 중요합니다.
잘 단련 된 신앙인은 정말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남다른 것을 봅니다.
인생에 수없이 닥치는 험란한 파도도 견고하고 아름다운 제자의 믿음으로 이겨내는 것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빛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역경을 바꿔 선물이 되게 합니다.
제자의 삶은 우리 시야를 이 땅에서 돌려 하나님과 천국의 유업을 바라 볼 때 점점 더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되는 줄 믿습니다.
다음 달에 이사 갈 게 확실한 집에 도배하고 장판 고르고 치장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국의 영원한 삶을 위해 이 세상의 것을 투자하는 것을 예수님은 비유로 들어 불의한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메시야를 고대하던 제자들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 부름 받았듯이 하나님을 더 간절히 추구하는 성도들이 제자로 견고하게 설 줄 믿습니다.
역대상28장9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얼마나 더 잘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이 주의 강림을 갈망할 때 종교생활이 직업이었던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현재 누리는 안락한 삶의 변화가 오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던 것이죠.
그들은 영원한 반석을 버리고 모래 위에 허망한 집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는 찾고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과 메시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사람들 사이에서 막 꿈틀거리며 일렁이고 있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직장에도 가정에도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관심이 수런수런 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모이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낙심 된 성도들을 믿음으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모습이라면 얼마나 더 아름답겠습니까?
우리 가정에서 자녀들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고 가족끼리 서로 믿음을 세워주고 힘을 북돋아 준다면 정말 우리 가정이 천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가정을 세우고 모든 가족이 주님의 제자로 사는 믿음의 명문가정을 이루시길 축원드립니다.
성도들에게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은 절대적으로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자의 삶에 반드시 형통한 복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인터넷에서 한 목사님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상가지하에 교회를 개척하고 집도 연립주택 지하에 세를 들어 이사했습니다.
개척교회가 얼마나 어렵던지 하루 하루를 힘들게 버티는 데 설상가상 홍수가 나 교회와 집안의 집기들은 다 망가지고 수재민 보호소에서 돗자리를 깔고 살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에서 편하게 살던 어린 아들이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어느 날 아빠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을 믿는 데 왜 점점 더 가난해지는거야?’
어린 아들에게 뭐라 설명할 말이 없어 목사님은
‘음, 하나님이 지금 잘되게 하시는 중이야’ 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훌륭하게 성장해 복된 가정을 세웠고 교회도 견고하고 아름답게 세워졌습니다.
아들에게 했던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게 그대로 응답하신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라고 목사님은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지금 점점 마음이 힘들고 형편은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혼이 강건하면 반드시 범사가 잘 되는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 영혼이 제자의 믿음으로 세워져 요동치 않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주님의 첫 번째 강림을 고대했다면 우리들은 다시 오실 주님의 두 번째 재림을 고대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은 제자들에게 한없는 영광과 존귀의 날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면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고 재림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면 믿음을 다시 추스러야 할 줄 믿습니다.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불편해 하는 신부가 있다면 좀 문제가 있어 보이죠.
제자들이 메시야의 등장을 열렬히 갈망했듯이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만물을 새롭게 통치하실 날을 간절히 소망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요한계시록22장7절에서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또 요한사도는 요한일서 2장 28절에서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모두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깨어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난 주님을 적극적으로 증거 하는 사람들입니다.
최초로 예수님을 전도한 사람은 35절에 나와 있는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심을 보고 주님에 대해 정확하게 증언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가 확신하는 정보가 있다면 그걸 최소한 관계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본능입니다.
별로 대단찮은 정보인 것 같은 데 확신이 클수록, 또 상대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수록 침을 튀어가며 말하는 걸 보게 되죠.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에게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 것입니다.
전 한 여름을 제외하면 수면양말 신고 자는 것으로 톡톡히 덕을 본 사람이라 손발 찬 사람 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수면양말을 권합니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러 나오실 때 주님이 바로 그 분이란 것을 성령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는 (앞 34절에서)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거리낌 없이 증언합니다.
율법이 생활법이었던 당시 유대사회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대한 범법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체포되신 이유를 요한복음5장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세례요한이 이렇게 목숨이 위태롭고 유대사회에서 매장될 수 도 있는 증언을 서슴없이 할 수 있던 것은 메시야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확신하면 증거합니다.
그의 증언을 듣고 제자인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좀 의리 없는 제자들처럼 보이지만 진짜 메시야를 만난 이상 그 무엇이든 버리고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그 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그들도 주님이 바로 그 분이라는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곧 바로 베드로에게 가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빌립은 어떻습니까?
나다나엘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오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은 전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지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심판을 면할 대속자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천국을 준비하지 못한 가족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열망이 없겠습니까?
살 수 있는 길이 확실한 데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처럼 개인의 인생역사 중에 믿기 전과 믿은 후 before와 after가 확실한 사람들이 있죠.
하나님을 믿지 않던 시절을 생각하면 얼마나 캄캄하고 암울한지 모릅니다.
물론 그때는 그걸 잘 모르고 좋다고 살았습니다.
믿고 난 다음 훤히 열린 눈으로 세상을 살아보니 과거엔 영적인 생명이 죽어있었다는 것이 확실히 분별이 됩니다.
그리고 이 축복과 풍성한 은혜의 삶을 어떻게 과거의 삶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돌아갈 수 없기에 별 것을 다 희생하면서라도 믿음 하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거듭난 인생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좋은 하나님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하려는 사람에게 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사람들이 거부할 때 자존심이 좀 상하고 마음에 상처가 좀 될 때도 있습니다.
45절에서 빌립은 그가 만난 나사렛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확신을 갖고 나다나엘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반응이 차갑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유대인들 사이에 주님이 메시야냐 아니냐 쟁론이 일 때 그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7장41절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님이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 마굿간이지만 나사렛지방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나사렛사람 예수라고 불리웠던 것이죠.
나다나엘이 나사렛의 메시야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 빌립은 물러서지 않고 나다나엘에게 일단 예수님을 만나보라고 권합니다.
전도가 우리의 설득으로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고 복음을 잘 설명한다고 사람들을 믿게 만들 수 없습니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과 관심을 끝까지 보여주고 어떻게든 교회로 인도해서 예배와 말씀과 교제를 통해 점차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인도되면 퐁당 퐁당 교회에 나오다 점점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다 한번에 예수님 믿은 것 아닙니다.
전도에 순종할 때 아버지께서 정말 기뻐하시고 우리가 기도하는 영혼들을 권고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올 한해 우리가 태신자를 정하고 기도하며 애쓴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수고했지만 주님 앞에 데려오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내년에도 함께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 영혼을 긍휼히 여겨주실 줄 믿습니다.
며칠 전 기독교방송에서 연0과기대 부총장인 이승0장로의 간증을 보았습니다.
38년간 가족들의 전도를 받았는 데도 어머니와 4형제가 예수님을 믿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 그 어머니께서 패혈증에 걸려 중환자실에 입원했는데 형제들을 다 불러 모으시더니 꼭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내가 선포한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다 교회 나가라.’
그래서 38년 기도 만에 온 가족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씨를 뿌리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결실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세례요한에게 전도 된 안드레와 요한이 베드로를 전도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또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영혼들을 불러오고 십자가의 구원을 베푸실 때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1장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 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우리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주님의 명령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전도자의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귀히 보실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제자들은 말씀과 체험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스승인 세례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믿고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성경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속죄하신 것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간에 하나님 앞에서 이 땅에서 우리의 일생을 계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창조 된 피조물의 도리를 벗어난 죄목들과 양심의 법을 위반한 행동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아버지 앞에 설 때 이미 지불완료 도장이 찍힌 죄의 목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선행을 베푼 냉수 한 그릇까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 속죄의 원리를 확실히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빌립도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다고 말하고 있죠?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지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말씀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말씀을 깨달으면 신기하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확고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조우를 통해 나를 알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사실 제자다운 삶을 살기는 어렵습니다.
겨우 믿음을 붙들고 가기도 힘이 듭니다.
47절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빌립의 인도를 받아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바라보며 얼마나 사랑스럽게 그를 반기며 말씀하십니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게 없구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한 나다나엘을 기뻐하며 맞아주십니다.
나다나엘은 그 자신의 은밀한 기도처인 무화과 나무 아래의 기도를 다 들으셨고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인생의 무릎을 꺾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우리에게도 주님과의 깊은 영적 만남의 체험이 주어지고 무릎을 꿇고 이런 고백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이승0장로님은 아내와 세 자녀가 먼저 믿음을 갖고 기도했지만 25년이나 완강히 거부하고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겨울방학에 아들이 올해는 스키장을 가지 말고 기도원을 가면 어떻겠냐고 말하는 데 이상하게 그러자는 대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우셨는 데 기도원에 까지 이걸 들고 가는 건 좀 예의가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논둑길에 담배갑과 라이터를 던지고 기도원에 올라갔는 데 그 이후 담배와는 영원한 이별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후로 정말 신기하게도 단 한번도 담배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 날 기도원에서 말씀을 읽는 데 예수님이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 낫게 해주신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그려지며 눈을 뜬 그 소경이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는 그 감격과 기쁨이 갑자기 뭉클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심령의 저 깊은 곳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고 그 날 자신도 눈을 떠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더욱 제자의 확신을 갖고 살 수 있도록 이런 감격적인 만남의 체험을 모두에게도 꼭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크던 작던 상관치 않으시고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이고 사랑입니다.
제자의 삶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능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가장 가치 있고 영광스런 삶인 줄 믿습니다.
제자의 삶을 살며 잠시 고난당하고 힘들 때 믿음을 강하게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역대하 15장 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2012년12월23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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