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교회 예배에 초청을 받고 와주신 가족들께 감사드립니다.
보시다시피 별로 내 세울 것도 없고, 평범하고 작은 교회입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의 좋은 점도 있지만 소박한 우리 삶과 어울리는 아담한 교회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귀하신 새가족들을 초대해서 좋은 시간을 갖기 위해 성도님들이 오래 동안 마음에 품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새가족분들이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실 말씀을 좀 나누려고 합니다.
이 자리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닫는 축복을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7080세대가 좋아했던 가수 중에 최백호씨라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군요.
그 분의 노래 중에서 ‘길 위에서’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족끼리 왜 이래 라는 주말 연속극에서 자주 나오던 곡인데요.
평생을 자식을 위해 살다 암에 걸려 삶을 마감하던 두부장수 아버지 유동근씨가 이 노래를 부를 때 폭풍 눈물을 자아내게 했었죠.
긴 꿈이었던가, 저 아득한 세월이.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 걸었네,
이 노래가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린 건 ‘인생의 길’ 이라는 말이 가진 고단하고 서글픈 실체를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인생의 허무함이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그런 노래를 어떻게 만들었나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도 사람들이 느끼는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지혜자 솔로몬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연구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왜 인생의 길을 떠올리면 이렇듯 허무감이 휑하니 지나가는 것일까요?
어떤 유전학교수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단세포에서 진화 된 동물이라는 강의를 하고 나면 교수실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묻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삶이 진짜 그렇게 허무한 것입니까?’
아니요. 인간은 본래 이렇게 근본도 없는 허무한 존재가 아닙니다.
삶이 그렇게 허무한 것은 길을 잘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 자라는 동안 생명과 행복으로 가는 길을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 길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길 위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돌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그냥 멋진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 있는 엄청난 위력을 선언하는 것이고, 엄청난 결과를 예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떨쳐버릴 수 없는 끈질긴 질문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잠시 잊을 때, 달려가던 길을 잠시 멈추었을 때, 우리 내면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죠.
‘나는 왜 태어나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이 땅의 생명이 끝나면 나란 존재는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신은 존재하는가?’
이 해답을 발견하지 못한 이상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즐길지라도 한번씩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허무와 본질적인 불만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꼭 해답을 발견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먼저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자신을 하나님께로 오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은 과연 믿을만하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역사에 기록되기로는 2015년 전에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가장 믿을만한 4명의 성인 중 한 분이십니다.
만일 이렇게 세상이 존경하는 인물, 예를 들면 최근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프란체스코교황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나를 통하여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했다면 어떨까요?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교황이 사이비 교주가 됐구나 생각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어떤 인간도 양심적으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자신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둘 중 하나겠네요.
예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진실을 말씀하고 있고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은 망상에 빠진 교주이고 일고의 가치가 없는 말이다.
그런데 역사가 평가한 예수님은 그런 분은 아니시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이라는 쪽을 선택하고 진지하게 탐구해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냥 앞 서 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갑니다.
앞 서 가는 사람들의 방식을 배우고 그들과 보조를 맞춰 걸어갑니다.
그리고 앞선 사람들이 이생의 삶을 마쳤을 때, 조문을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곳으로 가셨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정말 그들은 좋은 곳으로 갔을까요?
그들은 정말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정말 좋은 곳으로 가게 될까요?
이 땅의 생애 너머에 있는 내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는 사색의 산물이고 상상의 장소들입니다.
아무도 그곳에 가본 사람이 없고 그 말대로 죽어서 거기에 갔다 돌아와 사실을 증명해 준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 너머의 삶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역사가 성인으로 인정하는 인간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가장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하신 것에서 왔습니다.
보기에 이렇게 우리처럼 똑같은 인간이신 데 자꾸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니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의 하나님 논쟁에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 말은 제가 세종대왕 이전부터 살고 있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에 격분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실일까요?
이런 내용들이 다 뭔가 진실을 말하는 것 같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정신이 온전히 박혔다면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확신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유일하게 거짓이 없이 진실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해 알아갈수록 수많은 이적과 죽음에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신적 능력으로만이 아니라 그 진실하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분의 말씀대로 영원부터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영원한 세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만 아버지께 나갈 유일한 길이 되신다고 할까요?
거기에는 인간에게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죄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의 본성을 갖고 태어나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평생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은 아마 없으시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가장 깊은 자리에 심어놓은 양심은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거합니다.
창조주를 경외하고 창조하신 모든 것에 해를 끼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줄기차게 들려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양심 속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길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창조하신 만물과 이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애착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자식을 나 자신보다 사랑할 것 같지만 벼랑 끝에선 사람들은 자식도 버리잖습니까?
가족사진 찍으면 금쪽같은 자식 얼굴부터 봅니까, 내 얼굴부터 봅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우리 청년들, SNS에 올릴 때 내 얼굴 잘나온 사진 올립니까, 애인 얼굴 잘 나온 사진 올립니까?
인간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 영광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법을 따라 완전하게 살아갈 인간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확정적으로 말씀합니다.
이렇게 평생 죄에 이끌려 수많은 죄를 쌓아 놓은 인간이 생애를 마쳤을 때, 예수님은 그 결과가 어떤지를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행위의 선악간의 모든 것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판결은 하나님나라의 축복에서 영원히 떨어져 그 죄의 값을 스스로가 영원히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고행하며 옷 한 벌로 수행했던 성철스님이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겠습니까?
그런데 죽기 전에 한 말은 내 죄가 수미산보다 더 높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분은 양심적인 고백을 한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평생에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의 무게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우리 평생에 지은 죄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렴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일평생 지은 죄를 영원히 갚게 하시겠습니까?
문제는 ‘나’라는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도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죽는다고 딴 사람 되지 않습니다.
전에 윤일병을 폭행해서 죽였던 이병장 기억하시죠?
수감생활 중에 이번에 또 한 군인에게 똑같은 가혹행위를 했다는군요.
벌을 받아도 그 짐승 같은 악랄한 성격이 그대로라는 거예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우리도 어느 순간 잔인한 면이 불쑥 나오고, 말로 막 사람을 찔러 죽이잖아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싫어하고 나만 위하는 죄의 본성이 영원까지 간다는 게 인간의 가장 큰 절망이고 재앙입니다.
그 잔인하고 포악하고 교활한 죄의 본성을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영원히 다스리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인간의 운명은 창조주 하나님께도 너무나 큰 시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축복 안에 다시 끌어안으시기 위해 죄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스스로 마련하셨습니다.
벌을 대신 받을 제물, 대속자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에 따른 형벌을 성자하나님이 스스로 대신 치르시고 그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께 갈 수가 없고, 다른 죄인의 죄를 속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사람에게 아무 죄가 없으시고 순종과 사랑의 삶을 완전하게 사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인간이 있다면 완전히 주제파악이 안된 인간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실이 지금까지 드러나지도 않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느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일은 절대로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일들이고 성경에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성경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관심이 없었고, 들었어도 믿기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결정이 남았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내미시는 손을 잡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그동안 살아왔던 길에서 돌이켜 아버지께로 갈 길을 선택하시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싫어하던 본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달게 들을 수 있는 자녀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먼저 체험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먼저 걷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길에는 저 멀리 죽음너머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뭐가 얹힌 듯이 마음에 걸려있는 우리의 존재와 죽음 너머에 대한 의문이 풀리고 가슴이 확 뚫린 기쁨을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인도해 주시는 은밀하고도 놀라운 보살핌이 매일 삶 속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 같은데도 결과를 보면 신기하게 점점 더 나아지고 좋아지는 것을 분명하게 주변사람들이 다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가장 보배롭고 가장 복된 이 소식을 전할 때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세로 전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새가족들을 이 곳에 모셔오기 위해서 가족들이 얼마나 애걸복걸하고 눈치를 보고 정말 간청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높은 상관이라도 부하 직원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려고 무릎을 꿇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만 구원의 결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유겠습니까?
우리가 낮은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선택하라는 태도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영혼을 아들의 목숨과 바꾼 것 만큼 아끼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다 낮은 마음으로 여러 가족 분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했고 이 자리에 모신 것을 꼭 생각해 주시고 이 복음을 귀하게 받아들이시길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언젠가 제가 기독교방송에서 아마존정글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 선교사님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일찍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던 선교사님은 인생의 후반부를 하나님만을 위해 살기로 하고 십이년 전에 아마존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아마존 정글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고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가난한 부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삽니다.
그래서 주로 뗏목을 타고 부족들을 찾아다니며 침술 치료를 해주며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뜨거운 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낡은 남방차림을 한 선교사님은 한눈에 봐도 큰 고생을 한 듯 보였습니다.
집에다는 부모 없는 청소년들을 십여명 데려다 키우며 신앙교육과 직업교육을 시키며 돌보고 있더군요.
화장기 하나 없이 되는대로 입으신 좀 촌스러운 사모님은 아이들에게 하모니카를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치며 열심히 함께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TV화면에 미국에 있을 때 두 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잠깐 나오는 데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양복을 입은 선교사님은 너무나 점잖은 신사였고, 그 촌스러운 사모님은 그렇게 세련되고 멋질 수가 없었습니다.
명문대생처럼 총명하게 생긴 두 자녀와 함께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을 보는 순간 제가 울컥했습니다.
저렇게 아름답고 단란한 가정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곳을 버리고 저 궁색하고 위험한 아마존을 택하다니.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헌신이었지만 한편 마음이 애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을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약 몇 알주고, 침술로 다리 좀 치료해 주려고 그 고생을 자처하겠습니까?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에 관련된 절박한 일이 아니었다면 누가 자신의 삶을 헛되게 희생하겠습니까?
다 편하게 살고 싶은 게 인간인데.
올 2월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께서 힘드신 중에도 친구 어르신들을 전도하시려고 무척 애를 쓰셨습니다.
오늘 그 우정을 생각해서 어르신들께서 예배에 함께 참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하나님이 일상을 인도하며 주시는 축복이 너무나 크기에 가난하든 부하든 건강하든 아프든 각자의 삶에서 이 귀중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솔직히 내가 곧 죽을 건데, 다른 사람이 교회 나가는 게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면 이것이 과연 진리인지, 나를 위해 정말 유리한 길인지, 지혜롭게 선택하게 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 사실이 믿어지기 까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겪어 봐야 알지 않습니까?
그래야 그가 진실된지, 위선적인지, 그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고 어느 정도 까지만 믿을지를 결정하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정하시고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오셔서 차근차근 말씀을 듣고 배우시면 점점 성경이 깨달아지고 모든 것이 믿을만한 진리라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댁으로 돌아가실 때, 뒹구는 가을 낙엽에서 스산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5년10월18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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