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지난 주에 나누었던 참포도나무 비유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그 깊은 차원에서 다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 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쉬운 듯 하면서도 막상 의미를 파헤치다 보면 점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진리 앞에서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넓고 깊게 출렁이는 대양에서 물 한바가지를 떠내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말씀하셨기에 우리 수준에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대로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으려는 성도들이 정작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지시하시는지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시대의 기이한 일입니다.
한주간 동안, 어쩌면 먹고사는 문제로 다 소진되고 희미해졌을지 모르는 영적인 생명과 감각들을 다시 불러 일으켜 오늘 주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길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우리를 위한 내세와 현세의 모든 비밀과 비법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축복의 유업을 이을 자손이 되게 하신 것 안에는 이생에서 이루고 누리게 될 엄청난 보화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이 소망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렇게 살도록 도우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십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잘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몸체가 작용하는 대로 열매가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잘 붙어 있는 상태는 예수님께 배운 새로운 가치관과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지난 주에 나눴습니다.
열매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인격적인 변화와 은혜안의 삶과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들을 포괄적으로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핵심적 가치들이고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가지에 붙어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열매가 맺히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를 좀 하다 낙심해 본 성도들이라면 이런 말씀이 과연 진실일까 의구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영적인 복된 열매는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얻는 방법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칼빈은 ‘하늘 아버지 곁에 우리를 위하여 저장되어 있는 보물에 우리의 손이 닿으려면 기도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우리가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7절의 앞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주셨지만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기에 그냥 백지가 되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완벽하게 되어야만 기도응답을 받는다는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얼마나 진지하게 예수님 안에 살고자 하는지를 아십니다.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사실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다보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다보면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생각 속에 얼마나 채워지고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가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만일 오늘 말씀대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신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마음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 생각하신 것이 정말 이뤄졌을 때, 그 다음은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요즘 같은 불확실한 시대에 내가 원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정말 내게 이익일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직장에 들어가면 정말 안정되게 일할 수 있을까?
이 사람과 결혼하면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여기에 투자하면 손해 보지 않고 내 돈을 불릴 수 있을까?
그러다 보니 실제로 며칠 전 기사에 우리나라 직장인 열 명 중 여섯 명이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애써서 취직을 했는데 막상 그렇게 원했던 직장이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는 전제 조건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만 제대로 된 것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응답의 전제적인 조건은 빼먹고 무조건 기도하면 다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삶의 지혜를 얻지 못하면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모를 뿐 아니라 기도의 절박성도 실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능하시고 인색해서 안주시는 게 아니라, 떡을 구해야 하는 데 전갈을 구하고, 생선을 구해야 하는 데 뱀을 구하기 때문에 못 주십니다.
실제 성령이 조명해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놀랍도록 우리를 깨우쳐서 삶에 분별력과 지혜를 주십니다.
그런 가운데서 기도할 때 비로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닫고 끈기있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시작했던 기도가 그러면서 점점 분명해지게 되죠.
이젠 뱀이 아니라 내 몸에 이로운 생선을 구하게 되고, 전갈이 아니라 계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시간에 최대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시도록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매순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선악을 분별해 가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심사숙고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열매가 아니라 세상을 닮은 열매가 달립니다.
타락 이후 세상은 가시와 엉겅퀴를 줄 거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이 아니면 결코 행복한 열매가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돈은 벌어도 뭔가 빠진 것 같기에 자꾸 더 긁어 모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돈은 적어도 만족함이 있습니다.
세상에 기대서 사는 사람들은 주변에 별 일이 없어도 왠지 불안하기에 그렇게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사는 것입니다.
당장 우리가 부러워 하는 세상의 열매들과 영적인 열매들의 가치는 비교할게 못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세상 열매를 배설물과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보화를 약속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열매를 위해 경건하게 주님을 따르는게 단지 무거운 짐이고 모든 즐거움을 뺏을거라는 생각은 마귀의 기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짐으로 여기기 전에 앞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시는 엄청난 기대와 확신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온갖 아름다운 결실들을 우리를 통해 맺고 싶으시겠다는 간절한 주님의 기대가 오늘 말씀 속에서 절실히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저희 남편이 미국에서 돌아와 요즘 푹 빠져 있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뭐든지 딸하고 같이 하는 것입니다.
쇼파에 앉아 TV를 보는 것도, 식탁에 앉아 간식을 나눠 먹는 것도, 곁에서 함께 컴퓨터를 하는 것도, 지금 남편에겐 딸과 함께 하는 일이면 뭐든지 다 행복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오늘 예수님께서 ‘ 내 안에 있어라, 나와 같이 하자’ 그런 마음이 정말 실감납니다.
예수님께 바로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안에 연합되어 살아갈 때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는 단지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하나님의 애물단지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들이 어쨌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무렴 세상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에게는 영광인 것입니다.
지난 주 은혜자매가 어머니 생신에 성도님들과 같이 떡을 나누고 싶다고 찹쌀떡을 보냈습니다.
자식들이 그렇게 부모를 생각하는 모습이 부모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합니까?
정옥금집사님이 든든하게 영규형제를 데리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 거기서 부모로서의 영광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매달린 열매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사람들을 부르고 완전하게 하는 일에 우리를 끼워 넣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중요하고,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과 주어진 조건들에다 자신을 맞추고 평가합니다.
그런 나는 너무 초라하고, 도대체 뭘 이룰 수 있을지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하는 현재의 왜소하고 궁핍한 상황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그렇게 한정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굉장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자원들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 무한한 자원을 꺼내 쓸 수 없기에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이 풍성한 자원들을 사용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될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풍성해지고 우리의 존재의 가치는 더욱 빛납니다.
성도들의 믿음은 절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죽음을 불사할만한 능력과 확신이 성도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함께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를 마무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속박과 사탄의 억압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구원의 빛 가운데로 나오도록 영적인 개혁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회를 뜯어 고치고 개혁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이미 간교하고 치밀한 사탄의 지배구조 안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일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적으로 개혁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질 때 견고한 사탄의 진지는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면 우리 주변을 에워쌌던 견고한 사탄의 진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생애를 이런 영예스러운 일에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키며 기도하며 연합해서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훈련받기를 싫어하기에 이런 말씀 듣기를 꺼려합니다.
그저 만담 같은 설교나 경을 읽는 것 같은 종교적인 설교를 더 편하게 생각합니다.
말씀을 통해 내면을 까뒤집는 것 같은 설교는 불편해 합니다.
게다가 신앙의 훈련까지 강조한다면 요즘 스타일로 교회가 부흥되는 건 포기해야 할지 모릅니다.
본성대로 사는 게 당장은 편한 것 같아도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복된 삶을 위해서 불편해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 안하고 빨리 이불 위에 몸을 눕히고 싶어도 기도하는 게 내일의 피곤한 일을 덜어주고 오늘 해놓은 일이 좋은 결과를 낳게 합니다.
세상 음악은 내 귀를 즐겁게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내 심령이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경건을 선택하는 작은 행동들이 점점 더 하나님과 연합 된 복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된 삶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도 만족스런 느낌으로 살아간다면 그건 진통제거나 아니면 마약입니다.
진짜 만족과 평안을 모르기에 그런 걸로 만족하며 달래가며 자신을 마비시키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달래서는 듣지 않는 인생의 지독한 통증을 만날 때 비로서 믿었던 세상이 요람이 아니라 가시와 엉컹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간곡히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고별설교를 하시겠습니까?
우리 죄의 본성과 악의 세력이 범람하는 세상이 그만큼 무섭고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복잡하고 위험한 곳에 갈 때는 어린 자녀들 손을 더 꼭 붙잡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하나님아버지께로만 진짜 좋은 선물과 은사들이 내려옵니다.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거하며 영생을 위한 가장 값진 것들을 구해서 천국의 보고에 풍성히 쌓는 삶이 되시길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얻고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의 내면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주님의 나라의 중심에서 가장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은 천상의 커튼을 거두고 어마어마한 비밀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서로의 사랑 안에 거하고 하나가 되시는 것 같이 우리를 그 사랑 안에 붙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믿음을 가진 제자들이 듣기에는 우리가 이러다 신성모독을 범하는 게 아닌가 두려워 떨만한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장 완벽한 사랑의 연합을 이루고 계신 그 지위에 우리를 포함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너희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에 생명과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함께 천국을 위해 일하고, 영원히 천국에서 동반자가 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내 자신 이상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모든 것은 다 내 자신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죠.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본능적으로는 이 원칙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죽겠으면 자식도 슬그머니 품에서 내려놓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본질이신 사랑을 인간의 본질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면 인간은 불행한 것입니다.
돈이 문제고, 건강이 문제고, 직면한 여러 가지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본질인 사랑이 있다면 다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고개를 돌리고 돌아섰을 때 존재의 진정한 가치인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진짜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해도, 사랑받아도 목이 마릅니다.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되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로 산다는 것은 단지 성경을 읽고 지키며 기도하며 사는 외형적인 삶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참신앙과 형식적인 종교를 분명하게 분리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기도를 아무리 잘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종교입니다.
종교는 나 자신을 영적으로 남보다 우월하게 꾸미려는 행위입니다.
봉사를 아무리 많이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종교입니다.
종교는 나를 만족시키고 내 자애심이 남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도들의 신앙행위의 진검 승부는 사랑하냐 안하냐에 있다고 분명히 못을 박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나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인 사랑을 벗어난 사람은 죄 중에 있고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심판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목숨을 주신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상대를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죄인과 채무자입니다.
빚진 사람은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빚쟁이의 심정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을 때 빚쟁이와 같이 쪼들리고 심령에 좋은 것들이 점점 고갈되어 바닥이 납니다.
세상에서도 마땅히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패륜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가족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묘하게 빚진 자와 같은 채무감을 상대에게 지게 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바닥난 저수지와 같이 거칠고 메마르고 행복과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의 의무를 다할 때 다 퍼주는 것 같은 데 신기하게 점점 더 채워지는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잖습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우리의 고민은 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마음먹어도 상대에게 그런 혜택을 베풀고 싶은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좋은 열매로 풍성한 생애를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먼저 예수님은 사랑의 감정을 주시는 게 아니라 계명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진실을 말하고, 세속을 멀리하고, 주일을 지키는 것처럼, 사랑을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실패했을 때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지 못한 것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저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계명을 온전히 따를 수 없기에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화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더 풍성해 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계명들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처럼 반드시 그 모든 계명의 기초로 깔려있는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보시고 점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을 하다 냉냉한 상대의 마음에 우리 마음도 돌처럼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다 우리처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병든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서 애초에 그들에겐 불가능한 사랑을 구하거나, 사랑의 화답을 구하다 실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남이 내 사랑을 몰라주고, 내 사랑에 호응하지 않을 때 오히려 우리는 단 한시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거두신 적이 없는 하나님께 마음을 돌려 위로를 받고 메마르지 않는 참사랑으로 채움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 모든 아름다운 결실로 충만한 삶은 어떻게 이뤄집니까?
말씀과 기도와 그 내면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고 이 모든 영적 축복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큰 사랑을 주셨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기에 마음먹고 주님을 의지하면 반드시 이런 복된 삶을 모두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가 힘써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심령이 봄 같이 활짝 피어나고 화창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냉대하는 상대에게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내게 열매가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든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더 성숙하고 행복한 성도가 되어 주님을 따르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2016년3월6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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