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9장14절-22절 (고난주간 설교)

남수연 2016. 3. 23. 13:08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이번 주는 종려주일이고 이어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지난 주에 이어 요한사도의 진술을 토대로 2천년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기록은 풍문을 듣고 쓴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현장을 지켜보았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목격한 사실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주님을 따랐던 요한사도가 기록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하고 객관적입니다.

이천년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 우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솔직히 고난주간을 맞는 진솔한 성도들의 고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애절하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더 깊이 감사하고 싶지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영상에 흠칫 놀라고, 시선을 회피하고 싶을 때 자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이성과 감정으로 이해되는 차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령께서 계시해주시는 차원에서만이 바르게 깨달아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떠올리며 감정을 짜내서라도 그 고통에 동참하며 함께 울고 싶지만 그런 식이라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은혜가 아니라 부담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아돌로로사라고 불리우는 예루살렘 성벽 밖의 길을 피투성이가 된 채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올라가실 때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에 대한 인간적인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끔찍한 주님의 고난에 놀라고 슬퍼했지만 주님은 십가가를 인간의 감정보다 본질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사도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견고한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길 바라고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억제하고 담담하게 사실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총인 구원은 진리가 먼저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령께서 은혜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2천년 전 저 멀리 중동 땅 예루살렘에서 실제 일어났던 십자가의 사건을 담담하게 나눠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했다는 것을 믿는 성도들로서 마땅한 일은 주님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게 되셨는지 당시의 역사를 자세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객관적 사실조차 뭔지 모른다면 성도로써 오명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맞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의 전 과정을 꼭 읽어보길 원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맨 뒤 두 세장 정도가 주님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령께서 십자가를 밝게 비춰주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죄를 속죄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고 깨닫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오직 주님의 고난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는 성령께서 오늘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 들을 때 우리 심령에 깊은 확신과 은혜를 부어주시길 또한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앞서 지금까지 있었던 내용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고별설교를 마치신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겟세마네동산으로 이동하십니다.

거기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땀에 피가 묻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 겟세마네기도의 의미에 대해선 지난번에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과 장로들, 공회원들은 각자의 야망들이 맞아 떨어지자 메시야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공개적으로 잡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유대인의 대명절인 유월절이 시작되었기에 일단 명절 이후로 음모를 보류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찾아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제보하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뜻밖으로 일이 잘 풀리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날 밤 즉시 유다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군인들을 데리고 가 예수님은 체포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대제사장과 헤롯왕 앞에 끌려가 모욕적인 추궁을 받고 로마총독 관저로 끌려와 심문을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형 판결을 받고 형이 집행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이미 악명 높은 로마군대의 채찍질 형을 당하고 최후의 판결을 받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오랜 인간구원의 계획이 성취되는 이 순간, 이 짧은 기록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들이 밀집되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둘러싼 사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구약시대의 예표들이 하나하나 짜맞춰지며 구원의 그림이 완성되는 가장 놀랍고 진기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재판의 심문과정에서 드러나는 불법과 부당한 판결들조차 역설적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에 대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 어떤 반응과 선택을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지금도 세상의 중심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리를 듣고 각자의 소견대로 선택하며 삽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이 죽으신 바로 그날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들을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십자가의 의미를 기억에 담고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더욱 확신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에도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예수님의 대한 진리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예언되었던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시라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의 심문과정과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계속해서 흘러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왕의 자리를 넘본 반역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란 말은 구약성경 시대로부터 약속받고 고대하던 그리스도,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4절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 세우며 보라 너희 왕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죄목을 기록한 명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말은 바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어입니다.

원하던 원치 않던 그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계속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가장 큰 관심과 의혹은 주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아니냐였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동네에서 몇몇 사람들을 상대하다 무고한 오해를 받고 십자가를 지신게 아닙니다.

당시 나라 전체가 예수님 신드롬으로 들썩였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이미지들이 구약성경이 가리켜 온 메시야와 맞았기 때문입니다.

터무니없는 사기극에 온 나라와 국민이 술렁인게 아닙니다.

주님을 간단히 제거할 수 없었기에 국가의 지도자급이 다 한 통속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동맹으로도 주님을 죽일 수 없어 로마당국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 였던 것입니다.

열두제자들이 누구입니까?

가장 먼저 주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직감하고 새나라 역사에 뛰어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삼년동안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스승을 쫓은 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 무식한 어부들이 아닙니다.

그들 중엔 이미 메시야의 나라를 기다리며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요한과 야고보 같은 제자가 있었고 의심이 가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던 도마와 시몬처럼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열성당원들도 있었고 시대를 빠삭하게 읽을 줄 아는 마태 같은 세무사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주님만큼 완벽하게 메시야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 본 다음 형 베드로에게 달려가 했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이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 주장 앞에 당대 사람들의 입장은 분명하게 갈렸습니다.

지금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선 모든 사람들은 둘 중 하나로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끊임없이 예언했던 그 메시야인가, 아니면 희대의 사기꾼이자 망상가인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법정에 넘겼고 십자가형을 판결한 유대지도자들과 빌라도가 최악의 선택을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은 자신을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 신성모독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본디오빌라도는 교활하고 영리한 로마총독입니다.

예수님을 몇 마디 말로 심문했을 때 이미 주님께는 죄가 없다는 걸 뻔히 알았던 사람입니다.

이 고발사건이 음흉한 유대지도자들의 모함이란 것을 눈치 채고 나름대로 무죄석방을 하려고 노력했었다고 요한사도는 기록합니다.

그는 종교적인 문제는 너희들끼리 해결하라며 이 재판에서 발을 빼려고 했습니다.

요즘도 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해서 법적으로 구속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정적으로 고발자들이 걸고 넘어진 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를 풀어준다면 로마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에 빌라도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은 무고하게 죽게 된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 자기를 돌볼 때라는 현실로 돌아온 것이죠.

성경의 인물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 인물들이 충분히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개성은 다르지만 그 죄의 본성은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그의 현실주의적인 속성들이 다 있지않습니까?

신앙과 현실의 경계선을 그어 놓고 사는 것이죠.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그어 놓은 경계선을 넘어 서둘러 현실 속으로 뛰어 드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현실 절대주의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현실과 신앙을 분리한 적이 없습니다.

신앙이 현실이고 현실이 신앙입니다.

십자가를 기웃대던 사람들 중에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바짝 조여올 때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라며 황급히 현실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다가왔다가 사탄이 던진 미끼에 속아 떠나간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꼈고 자신의 인생에 뭔가 중요한 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큰 두려움과 경각심을 갖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뇨.

그러나 진리에 그렇게 가까이 있었음에도 결국 인간의 현실 절대주의가 이기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계산을 끝낸 빌라도는 고소인들의 요구대로 주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의 정치생명을 위해 무고한 주님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 결과 빌라도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진실을 알면서도 이익을 위해 양심을 버린 자, 그의 인생에 다가온 가장 소중한 구원의 기회를 잃은 가장 어리석은 자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빌라도가 그토록 부여잡고자 했던 정치적인 생명은 얼마나 갔을까요?

겨우 2년 만에 총독직에서 해임되고 갑작스런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로마역사는 기록합니다.

살기 위해 붙잡은 것이 우리가 생각한 대로 우리를 살려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설령 메시야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주님을 죽인 유대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유대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부와 권력이 위태해질까봐 주님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자기의 아성을 위협하는 상대는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죠.

설령 진짜 메시야라 해도 자기의 권리를 뒤흔들고 자기 인생에 끼어들게 할 순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합니다.

이 땅에서 안정되게 세팅해 놓은 내 삶을 뒤흔들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죠.

15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라며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한 이들의 입에서 진짜 자기 왕이 누군지 얼떨결에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법이 통치하는 메시야의 왕국이 아니라 현재 자기들에게 돈과 권력을 안겨 줄 로마황제의 나라였던 것이죠.

그들이 선택한 로마황제는 과연 이들에게 행복을 주었습니까?

이로부터 사십년 뒤 로마는 그들이 자랑했던 화려한 성전을 무너뜨리고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바로 그 제사장들을 모조리 살해했습니다.

현세의 영광을 위해 진리를 묻어버린 이들은 그들이 집착했던 화려한 성전의 돌무더기 밑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누구를 왕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선택한 왕은 자신의 목숨을 내주고 우리가 파묻혔던 사망의 그늘에서 끄집어 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날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세상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서있었습니다.

형을 집행했던 군인들과 십자가 밑에서 무심히 명패를 읽는 사람들, 주님의 좌우편십자가에 달려 그날 생과 사를 넘어간 두 강도도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예수님을 판단하고 선택했고 엇갈린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수많은 예배당에 주님의 십자가는 높이 올려져 모든 사람들이 그 아래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천년전 그들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오늘 성경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로 선택한 복된 자들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오늘 주님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빛나는 또 하나의 진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먼저14절에 유월절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과 일치 된 유월절이 어떤 절기인지 다들 아실 것입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사람들이 자유의 몸이 되어 탈출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기적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을 억류하고 풀어주지 않는 이집트 사람들을 하나님이 죽음으로 응징하신 뒤에야 이스라엘이 탈출할 수가 있었죠.

그날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유대인들의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넘어 갔던 실제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을 기념하며 어린양을 잡는 바로 그날 유월절 양이 상징했던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죄없이 죽은 유월절 양이 그들을 살렸듯이 주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것입니다.

15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릅니다.

유대인들이 꼭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의 율법을 계산에 둔 것입니다.

신명기21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 그것은 신성모독으로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범죄를 합리화 시키려고 했던 것이죠.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이 몰랐던 놀랍고 신비한 영적 교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주를 받아 죽으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는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였다는 것입니다.

본문21절에 빌라도가 주님의 십자가 위에 죄목을 기록한 명패를 붙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씌어진 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씨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찾아가 그 앞에 자칭 이라는 글자를 써달라고 했을 때 빌라도는 단칼에 거절하며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유대인의 왕을 사칭하고 다녀서가 아니라 진짜 유대인의 왕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세상체제에 대해서도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빌라도의 입을 통해 입증하셨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주님의 십자가형벌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벌이 아니듯이 세상법에 저촉되어 당한 벌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사복음서에서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단 한번도 인간적으로도 죄를 짓지 않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음과 같은 고통을 당하면 저절로 입에서 욕이 나오고 원망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모든 순간에도 단 한번도 인간적인 죄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법에 저촉된 것도 아니고, 세상법을 범한 것도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죄를 지은 것도 아닌, 오직 순수하게 무죄한 자로서 우리들이 받을 저주를 대신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죄로 똘똘 뭉친 나의 본성과 비참함이 기가 막혀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죄 문제를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덮어 주신 그 사랑을 성령께서 알게 하실 때 우리 가슴이 어느덧 눈물로 적셔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천년 역사적인 십자가는 바로 오늘 나를 위한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2천년전 예루살렘 밖 골고다 언덕에 분명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들에겐 모든 죄를 덮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이 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변혁이 일어납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죄악이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죄를 멀리하고 세속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것은 우리 야망과 탐욕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탐욕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불러온다고 성경은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순종하신 것처럼 묵묵히 주님을 따릅니다.

어떤 환경이든, 어떤 힘든 문제와 어떤 어려운 상대를 만나든, 그 모든 것 안에서 앞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느덧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맡으시고 우리 마음은 문제 위를 새 털 같이 가볍게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처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오늘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의지를 다해 따르기를 결단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쏟아 부으신 보혈과 찢겨진 육체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에 진정한 마음으로 참여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6년3월20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