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의 배경은 2천년 전, 수전절이라는 유대인의 명절날입니다.
수전절이란 성전을 수리한 날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에서는 하누카라고 부릅니다.
현재 이스라엘에선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다 국가 공휴일입니다.
하누카는 국가공휴일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지키고 있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이 수전절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절기가 아닙니다.
구약성경 시대가 끝나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에는 4백여년의 공백기가 있는 데 그때 생긴 명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시기에 기록 된 성경은 없지만 다니엘이 받은 예언으로 그때 세계정세와 이스라엘의 운명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예언했던 일들이 세계사에서 그대로 성취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정말 말문이 막힐 만큼 정확합니다.
그 사이에 일어난 대표적인 일이 알렉산더대왕의 제국 건설입니다.
주전 삼백여년 경 알렉산더대왕이 당시 문명국의 대부분을 정복해 엄청난 제국을 이루잖습니까?
이스라엘은 당연히 속주국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 다음 이 중간기에 일어난 중대한 일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광적인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일입니다.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가져다 제사를 지내게 하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제사장들은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이 내용이 다니엘서에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곳을 보거든’ 이라는 예언 부분의 일차적 성취입니다.
또 구약성경을 불태우며 안티오쿠스는 유대민족에게 과격한 헬라화 정책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유력한 마카비 가문의 형제들이 군사를 모아 안티오쿠스를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여 몇 년 간의 혈투 끝에 드디어 마카비 군대가 승리하고 예루살렘에서 정복군을 다 몰아냅니다.
정복군들이 더렵혔던 성전을 깨끗하게 해서 다시 하나님께 봉헌 드린 날을 기념한 절기가 바로 수전절, 하누카입니다.
이 수전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로 북적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께서 지금 거닐고 계신 것입니다.
마카비 가문이 예루살렘을 헬라제국의 정복자의 손에서 되찾은 이 수전절 명절에 몰려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런 날 관심사라면 뻔하겠죠.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가 언제 오셔서 지금 자기를 압제하는 로마제국을 심판하고 마카비혁명 때처럼 영광을 되찾을 것이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더 완벽한 다윗왕국의 번영과 부성함을 누릴 그리스도의 날이 언제 올 것이냐가 이들의 관심사고 대화의 주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시선은 당연히 메시야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예수님께 쏠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신 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몰려와 거칠게 질문공세를 퍼붓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라는 것입니다.
궁금했겠죠,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이신가 아닌가.
모든 인간에게 가장 궁금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가.
이것이 입증될 때 역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도 입증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이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답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분명하게 알고 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는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먼저 25절에서 예수님의 답변은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기 충분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증거로 하나님아버지의 이름으로 충분한 표적도 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은 그냥 아픈 사람 고쳐주고 배고픈 사람 먹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역은 모두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의 증표가 되는 사역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가 오면 맹인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될거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정확히 들어맞게 행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어린양을 품에 안으시고 젖먹이는 어미양을 온순하게 인도한다는 예언이 꼭 들어맞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 그런 인간 지도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사회에서 보여주신 수많은 이적들은 주님이 바로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해 온 그 그리스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통해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로 알아보도록 밑밥을 충분히 깔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앞에서도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본 사람들이 술렁이며 말합니다.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또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
또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이런 반응을 보면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감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계속 못 믿고 증거와 표적을 더 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계속 증거를 요구하다 결국 죄인으로 낙인찍어 십자가형으로 내 몰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이 원하던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영원한 다윗왕국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압제와 굴욕이 없는 강성한 부국을 이루고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선망하고 굴복하는 것이 메시야 왕국이라고 믿었습니다.
과연 저 젊은 선지자가 그 일을 해 내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들 앞에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을 척결하자고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척결하고자 하신 것은 위선 되고 형식화 된 유대인들의 종교였고, 탐욕스런 지도자들이었고, 부패한 개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세에 누릴 부귀와 영광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거룩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그렇게 살기 위해 오히려 고난을 당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되고 애통한 자가 복되다는 그런 설교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런 메시야는 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똑같은 마음입니다.
기독교가 자기에게 맡지 않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는 거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서 안믿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엔 관심도 없죠.
교회 안에서라고 다르겠습니까?
유대인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색한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별다른 죄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일예배 강단에 예수님이 서셔서 2천년전 같은 설교를 하신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저 분은 틀렸다며 다른 교회로 갈지 모릅니다.
사람들 마음이 다 뻔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오해하며 믿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교회 내의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내게 영원한 구원을 주실 것이기에 따릅니다.
힘든 세상에서 무언가 의지할 게 필요하고 잘 믿으면 복을 받지 않겠냐는 생각에서도 따릅니다.
물론 그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내세의 구원을 얻을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도 복을 주십니다.
이렇게만 믿으면 오늘 본문에서 보인 유대인들의 믿음과 뭐가 다릅니까?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었더니 구원에서 낙방된 것 아닙니까?
그들에게 빠졌던 게 무엇이었는지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죽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선민이고 하나님을 믿으니 당연히 그리스도의 왕국의 주인이라 믿었지 죽을 죄에 대해선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본문 바로 앞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런 말씀을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 말씀을 했더니 그들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20절에 보면 ‘그가 귀신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아니, 그리스도가 왜 죽어? 그리스도는 영원하댔잖아?’ 이랬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속죄를 위해서 온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그 참혹함과 고통 속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인간이 죄를 안 지을 수가 없고, 고상하게 하나님의 법도를 따를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걸 이스라엘백성들이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잖습니까?
인간의 이런 죄의 목록들을 가르치기 위해 율법을 주셨고 그 죄값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속죄의 동물제사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실 그리스도를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가르치셨건만 유대인들이 영적 소경으로 이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기 위해서 전제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내가 주님의 속죄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누가 추궁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치고 진짜 그 죄를 죄로 알고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뉘우칠만한 양심이 있으면 그런 짓 못합니다.
겉으론 뉘우치는 것 같지만 속으론 재수 없이 걸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날 내가 큰일 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저 십자가가 뭐냐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저기 달려서 죽으셨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 속함과 동시에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살펴볼 때 성령의 역사로 죄의 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양심에 좀 걸리는 게 있고, 남에게 손가락질 당할 부도덕한 죄가 좀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런 정도를 죄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렴 그런 정도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죽음으로 속죄해 주셔야 했겠습니까?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서 나타나셨다 해도 내가 순복하지 않는다는 영원한 반역성이 바로 죄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며 살겠다는 게 모든 인간의 본질입니다.
힘들 때 뭐 조금 도와주는 것 정도까지는 괜찮겠지만요.
이 사실을 매일 우리가 인정하고 예수님의 속죄를 되새기지 않으면 어느덧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복 받을 권리가 있는 자인 줄 압니다.
솔직히 우리가 뭐 그리 복받을만한 사람들입니까?
애견인들 사이에 하는 말이, 개가 지나치게 사람의 사랑을 받고 오래 같이 살다보면 자기가 사람인줄 알고 거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하다, 더 나가면 하나님은 내 소원을 이뤄주고 나를 수종들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좀 잘 안되면 원망하고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조금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나면 하나님이 내게 빚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겨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맞춰주셔야 한다는 계산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입은 가장 큰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주인을 거역하고 내 맘대로 살겠다는 것이 내 안의 근원적인 두려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을 믿으니 그리스도가 와서 구원해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눈 먼 것, 저는 것, 가치 없는 것으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돌아서서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과 똑같이 죄를 지으며 살면서요.
오늘날 많은 현대교회의 성도들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우리를 영접해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나를 용서하시고 아들을 대신 심판하신 댓가로 내게 부어진 헤아릴 수 없는 은혜라는 것을 앞세우고 나오셔야 합니다.
오늘 수전절을 맞이한 유대인들은 성전을 사수하기 위해 피흘려 싸운 선조들의 충성을 자랑하며 그리스도가 오셔서 복을 줘야 할 것을 당연시 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각성한 사람에게만이 진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풍족할 때나, 빈곤할 때나, 내게 주신 모든 것이 과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충직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에는 대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26절에 보면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 때는 한 블록을 걸어가면 교회에서 나와 전도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요즘에는 제가 가끔 전도하러 나가보면 전도자를 만나기 힘듭니다.
그런 극성스런 전도 덕에 집안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간에도 신앙문제로 종종 의견 대립이 되고 분란이 일어나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아니고 인류사적으로도 4대 성인이라고 할 만큼 존경받을 분이신데, 도대체 마음을 굳게 닫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닫혀 있는 사람의 마음만큼 철옹성이 없습니다.
그 빗장 열기가 놋성벽이 무너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저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판단해서 당당하게 믿지 않기로 결정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얼마나 측은한 일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만물이 창조주께서 부어주시는 은택과 영광의 빛을 기쁘게 받아들여 얼마나 아름답고 생명력이 충만하고 고귀하게 빛납니까?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반영하며 범접 못할 존재감을 드러내잖아요?
하나님의 그런 은혜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받지 못하고, 반영해내지 못하는 피조물은 추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으로 옷 입었어도 들의 백합화만 못하다니까요.
오늘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 그 은혜와 영광으로 살게 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양들만이 그 음성을 들을 때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고 은혜인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의 음성을 들으셨나요?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우리를 위해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오늘만 해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너희에게 밝히 말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굉장한 믿음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맹목적인 믿음이고 추상적인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눈여겨 보고,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심중에 외치게 됩니다.
이 분이 나의 목자시구나.
이 분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시구나.
그리고 그동안 따르고 신봉했던 것들이 다 가짜라는 것을 알고 방향성을 완전히 예수님께 트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서 성부하나님도 바르게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셨기에 이 자리에 오게 된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확신과 결정이 되기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계속 주님에 대해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자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라면 그 관계가 더욱 견고해지고 아름다워지도록 말씀과 기도와 순종의 삶을 계속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양떼들을 향해 말씀하시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영생을 주셨고 우리는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예수님이 괜히 추종자를 만들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또 주님의 양이 된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확고하게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약속인 반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성도들까지 뺏어보려고 넘보는 악한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자 마귀는 주님의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을 약탈하고 죽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있지 않으면 마귀가 와서 약탈해 갑니다.
마음의 평안도 뺏고, 건강도 뺏고, 재산도 가져가고, 가정도 무너뜨리고, 사람들과의 행복한 관계도 뺏어갑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벗어나면 마귀가 야금야금 우리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뺏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깨달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악하고 불행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부터 이미 준비하신 그리스도십니다.
내 영혼을 가장 귀하게 대하시고 내 삶을 풍성하게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목자로 믿고 따르시길 축복드립니다.
수전절 제사를 드리고 할 일을 다했다고 돌아가서 죄악 중에 살던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양떼들은 다릅니다.
목자를 따르는 양이라면 그 음성을 매순간 들으려 하고 그 음성대로 따라 갑니다.
저기로 가면 절벽이라 떨어지니 가면 안된다,
양떼에서 멀어지면 늑대가 잡아간다.
저 것은 독풀이니 먹지 말고 이 풀을 먹어라,
성경으로 이런 걸 다 지도해 주시지 않습니까?
미워하면 우리 마음에 독이 되니 용서라는 영양가 좋은 풀을 먹으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음성을 매일 들으며 부지런히 예수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양떼들은 들며 날며 맛있는 꼴을 먹고 영혼과 육체가 점점 건강해지고 삶이 윤택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이 영광스런 자리에서 뺏을 자가 없다는 것을 믿으시고 예수님을 매일 매일 잘 따라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6년5월29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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