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다시 살아나시다 (요한복음20장15절-23절)

남수연 2016. 3. 30. 15:11

 

지난 주 고난주간을 경건하게 보내고 기쁘고 화창한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 부활절은 축제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줄 믿습니다.

생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영원히 산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불멸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영생을 믿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도 사실 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생을 마쳤을 때,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뉜다고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를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말것인지 둘 중 하나를 사람들이 선택해야 되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십니까?

교회 내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에게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설명해보면 그게 얼마나 믿기 힘든 얘기인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흘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아십니까?

우리가 밥을 먹었을 때 음식물을 분해하던 효소가 즉시 우리 신체를 먹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가족들의 임종을 목격한 분들은 다 아실거예요.

숨이 채 멎기 전에 이미 신체는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부패가 진행됩니다.

이미 그렇게 된 몸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절대로 이 자연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부활을 안 믿는게 당연합니다.

바울사도가 아테네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말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다고 합니까?

비웃고 조롱했다고 합니다.

부활이 믿어진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기반이 없으면 세상에서 당당하게 부활신앙을 옹호하고 전할 수 없습니다.

초기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절을 지킨다고 목숨을 내놓으라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 역시 그만한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고 난 뒤에는 부활에 대한 성경의 심오한 진리들을 꼭 깨닫고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부활이 더 확실히 믿어지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해 줄 역사적 사료는 성경 한 권 뿐입니다.

하나님이 기록하신 성경을 보완할 자료는 필요치 않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성경 속의 부활을 면밀히 살펴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믿음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동안의 부활절 설교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되다는 증거들을 이미 살펴보았고 확신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진실성이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분명히 봤다며 증인을 자처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둘 중 하나겠죠.

부활이 사실이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꾸면 낸 이야기거나.

제자들은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자이고 증인일까요?

그 진위를 밝히는 것은 묘하게도 역설적인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제자들 자신이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절에 제일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와 그 이후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보면 이날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달라마리아가 무덤에 간 것도 단지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날 아침 부활을 기대하며 무덤에 간 제자들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가장 놀란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은 주님이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 마음에 걸려 군인들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했었죠.

예수님이 여러 번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제자들이 그렇게 주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을지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한사도는 앞 9절에서 제자들이 구약성경에 미리 예언 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의 예언도 모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아마도 예수님이 삼일 뒤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숫자의 상징성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삼은 완전히 다 채워진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삼일을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종국의 부활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도 예수님이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었죠.

오늘 본문을 보면 심지어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는데도 마리아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묘지 지키는 사람으로 알았다고 하죠.

그렇잖아도 사람들이 믿기 힘든 부활을 믿게 할 의도로 부활기사를 기록했다면 굳이 제자들의 불신을 그대로 쓸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제자들이 부활을 조작할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의심을 증폭시킬 내용을 기록할 이유가 없었겠죠.

그런데 부활이후의 기록을 보면 십자가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하고 부활조차 의심했던 그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전도하다 돌에 맞아 죽고, 목베어 죽고, 창에 찔려 다 죽음을 당했습니다.

부활이 스스로가 날조한 사기극이라면 이런 개죽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그들은 분명 죽음을 능가할만한 엄청난 사건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 이상 부활에 대한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죽음으로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면 그 이상은 필요 없는 것이죠.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사건을 눈여겨보면 구석구석에 부활이 진실일 수밖에 없는 신빙성 있는 증거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보지 못했지만 주님의 말씀과 제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이날 저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달라마리아가 분명히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주님은 왜 저녁때가 돼서야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일까요?

부활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증인들의 말을 통해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제고 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믿음이 없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부활기사에 있어서 가장 미스테리한 사실은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을 계속 바꿔서 나타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시대에도 성자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천사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군인으로, 삼손의 부모에게는 나그네처럼, 야곱에게는 씨름하는 사람으로 나타나셨듯이 부활 이후에 제자들 앞에 다양하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만날 때 그들이 당장 알아볼 수 있는 이전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은 것은 제자들 또한 믿음으로 부활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증거를 보고 생기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구약성경을 통해 기록하셨고 주님이 부활하겠다고 말씀하셨다면 눈 앞에 증거가 없어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죠.

제자들 역시 마리아의 증언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통해 부활을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을 본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책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보내시고 저녁이 돼서야 제자들을 찾아가신 이유입니다.

그 사이에 그들은 각자의 믿음을 시험 받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소식을 전해 듣고도 믿어지지 않아서 그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입니다.

이들은 마리아가 분명히 살아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못 믿고 채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고 집으로 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길손처럼 다가오셔서 넌지시 메시야의 부활에 대한 구약성경의 말씀을 풀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제사 이들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실거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깨닫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의 눈을 열어서 자신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부활을 믿습니다.

그 다음 주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매일 삶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다음에 보면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날 저녁 예수님이 오셨을 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도마가 이미 주님을 만난 다른 제자들의 말을 못 믿잖아요?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주님의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고 믿는자가 되라고 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지만 믿는 우리가 그래서 다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선물을 제자들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이 너무 광대하고 보배로워서 오히려 우리는 실감이 안날 것입니다.

우리는 수준에 맞게 그저 조그만 선물, 한 백만원 정도 주시면 엄청 큰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겠죠.

먼저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우리를 형제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참 하나님, 영의 아버지를 돌려 주신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인간은 죄로 인해 영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대치 상태에서 살아가는 게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입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혹시 신을 섬기더라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를 위해서 초월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섬깁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지 못하거나, 더 좋은 신이 있거나,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어지면 아무리 신이라도 가차 없이 토사구팽하는 게 인간입니다.

토끼를 잡았으니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고사성어죠.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족하게 살게 되자 하나님을 버렸지 않습니까?

요즘 총선을 앞두고 서로 상대가 토사구팽했다고 설전을 벌이더군요.

토사구팽이 인간성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교회 내에서도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성취와 영광을 구하는 죄인의 본성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가 사해지고 성령께서 믿는 자들 안에 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주신 새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하던 우리 인격을 하나님을 선호하는 인격성으로 뒤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자녀로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선호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하나님만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도 이제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주님이 내 형제가 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젠 누가 하나님을 비방하면 마음이 상하고 예수님을 두둔하는 입장으로 바뀌는 것이죠.

누가 부모님 욕하고, 자기 가족을 무시하면 평소 애틋한 관계가 아닌 사람도 역정을 내지 않습니까?

그게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웬수 같아도 그래도 우리에게 가족 그 이상 소중한 건 없습니다.

위기가 오면 가족과 남이 그래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이번에 심집사님이 심재욱성도님 투병하시는 동안 마음 쓰시는 걸 보니 그게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족이 아니면 누가 마음 아파하며 그렇게 실제적으로 돌보겠습니까?

또 심재욱성도님 아내 분은 불교신자라 거부감이 심해서 제가 방문 한번 못갔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의료진에 기댈 수 없게 되니 하나님께 기도해달라며 기도 중에 그 입에서 아멘소리가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더군요.

남편만 살 수 있으면 뭣인들 못하겠냐며 울며 병상세례를 받아들이는 걸 보니 이게 가족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아들이 영업직 사원인데 매일 늦게 들어오는게 뻔한데도 언제 일찍 들어와 밥을 찾을지 몰라 혹시나 하고 음식을 챙겨 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반찬이 남아서 성가시다고 하더군요.

이게 가족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께 그런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일은 아버지의 일이 되고, 우리의 근심에 아버지의 마음이 움직이십니다.

우리는 완전한 보호자의 보호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속죄물은 흠이 없고 완전했다. 나의 공의는 속죄물 위에 쏟아 부어졌고, 이제 구원의 분은 활짝 열렸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주님의 속죄가 완전하셨다는 확증인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사망의 시초는 죄로 인해 들어왔고 죄에 대해서만 그 권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기에 죽음의 권세는 주님에 대해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증거이고, 그렇기에 남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죽음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완전한 속죄를 위한 한 짝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죄가 깨끗이 청산 된 우리에게도 사망이 군림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죽음은 이 땅에서 육체의 유효기간이 끝난 것일 뿐이고 영생하는 몸으로 부활하기 위해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유업의 상속자요 맏아들이신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2. 다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평강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평강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이 샬롬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나타냅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이 하나님의 은혜로 미디안사람들을 물리친 뒤 제단을 쌓고 여호와살롬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기드온 당시는 미디안사람들이 쳐들어와 농사지은 모든 것을 털어가고 배를 곯던 시절입니다.

기드온이 오죽하면 숨어서 탈곡을 하는데, 한 밤중에 포도주 틀 속에 들어가서 곡식을 털었다고 합니다.

이런 게 하나님을 떠난 민족,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고달픈 삶이라는 것입니다.

겨우 일이 좀 되나 싶으면 엉뚱한 일이 터져서 다시 주저앉고, 집에 웃음꽃이 좀 피는가 싶으면 또 눈물 쏟을 일이 생기고,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데 돈이 모이기는커녕 뭉텅 빠져나갈 일만 생기고.

별 탈 없이 살아가도 항상 앞에 있는 위기를 직감하기에 인간의 생에 평강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더니 평강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렇게 완전한 여호와살롬의 나라가 이뤄질 것을 고대하며 샬롬이라고 서로 위로하며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샬롬에서 파생한 동사 실람이라는 단어가 지불하다, 빚을 청산하다 라는 뜻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빚을 청산하고 값을 지불하는 것이 곧 샬롬이라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시는 것은 주님의 완전한 속죄로 죄값이 청산되었다는 것을 뜻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예언은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96절에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는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바로 언약했던 샬롬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때 주님의 평강이 우리 인격과 삶에 주님의 평강이 에워쌉니다.

그렇기에 교회에 나오면 어느덧 그늘졌던 얼굴이 점점 밝아지고 불안정했던 마음에 왠지 모를 평안이 점점 찾아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져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수록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 와도 그렇게 절망적이고 쫒기고 다급해지지 않습니다.

돈이 좀 없어도 그게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질 않으니 신기한 일이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고 하나님이 주재하고 계시다는 확신 안에서 우리를 안심하게 합니다.

성도님들, 평강이 있으십니까?

평강의 주님을 영접하시기 축원드립니다.

주님을 따른 우리에게도 마음에 평강이 사라졌다면 부활의 주님에게서 우리의 시선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3. 또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사명입니다.

세상에서도 할 일, 일거리가 얼마나 축복입니까?

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송구하게도 예수님이 하신 일과 우리가 할 일을 동일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십자가와 부활의 속죄로 만민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사하라는 말입니까, 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죄도 용서받도록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죠.

이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복음을 받고 먼저 구원받은 사람들의 사명이 막중하고 긴박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어보자고 권하지 않았다면 아마 여기 스스로 나오실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예수님은 다시 우리를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파송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성공을 위해 달려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공의 맛은 마약의 맛과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나면 거기서 오는 희열이 얼마나 큰지 계속해서 그런 기분을 맛보려고 집착하는 게 마치 계속 마약을 찾는 것과 같은 증상이라고 합니다.

권력을 쥐어보면 더 큰 권력을 찾게 되고, 그것을 잃을 땐 금단현상까지 나타난다지 않습니까?

요즘 뉴스에 보면 쥐고 있던 권력을 놓칠까봐 집착하며 치부까지 드러내는 안쓰러운 사람들 많이 보입니다.

이생에서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목적이 되면 그 인생은 불행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 그 목적이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성공한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령이십니다.

오늘 주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령하나님은 성부와 성자께만 계십니다.

아무리 뛰어난 피조물인 보좌 앞의 네 천사에게도 성령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께만 있던 성령하나님을 이제 우리에게도 주신다는 것이니 이게 상상이나 되는 영광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광대한 진리라 우리가 그 맛을 혀 끝으로나마 살짝 맛보기조차 힘든지 모릅니다.

아버지께 가는 길이 예수님 밖에 없듯이 성령 외에는 우리 삶에 다른 인도자나 지도자가 없습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도 능력도 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은혜 안에 굳게 세우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은혜는 그 자체가 성령의 능력이고 활동이시라고 칼빈은 말했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인 성령을 받으시길 기도하고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객관적인 증거들을 잘 기억하시고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우리가 본래의 영광의 자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형제로 인정받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축하드립니다.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보혜사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따라가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6년3월27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