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보혜사를 보내리니 (요한복음16장7절-15절)

남수연 2016. 3. 18. 13:52

지난주는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9단과의 세기의 대국에 많은 관심들이 쏠렸습니다.

이번 대국에서 여러 사람들이 소름이 돋았다는 말하더군요.

아마 공상과학 영화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게 연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도 머잖아 사람들의 많은 일자리를 로봇에게 뺏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의 높은 실업률의 원인 중에 이미 인공지능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문명이 도대체 어디로 치닫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불안한 먹구름 저 너머 어떤 인간의 미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듣는 제자들의 마음처럼 우리 마음에도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진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어떤 걱정거리를 안고 있든지 하나님 앞에 오셨으니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 돌려 감사하며 말씀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심으로 예배드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와 장래의 인도하심이 반드시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 주님의 고별설교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마친 예수님은 곧 체포되고 십자가형을 받으실 거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충격으로 거의 넋을 놓은 것 같은 분위기가 성경에서 느껴집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당할 충격을 충분히 가늠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 장에서 예수님은 장차 제자들에게 닥칠 상황을 사실대로 예고하십니다.

앞으로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유대사회에서 출교하고 죽이기도 할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불안한 제자들에게 꼭 이런 말씀을 하셔야 했을까요?

주님의 의도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뭐가 잘못된 게 아닌가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이 일어날 것이되 그래도 제자들을 통해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나라가 이뤄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잘 잘못과 상관없이 생애는 희로애락으로 채워집니다.

그러나 꼭 모든 일이 잘되야지만 우리가 제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일이 꼬이는 것 같은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얼마든지 영광스런 일들을 이루게 하십니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따르며 믿음을 발휘하여 오늘을 신실하게 산다면 아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난감했던 일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큰 이익이 되었던 반전을 다 경험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잡히시면 남겨진 제자들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질지 도무지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입니다.

왕이 잡혀서 죽게 되었는데 왕국이 어떻게 서겠냐는 것입니다.

안철수씨가 정치를 포기하면 국민의 당이 무슨 의미가 있냐 같은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복안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령님에 대한 중요한 계시를 주십니다.

계시받는다는 것은 내일 누구를 찾아가라는 음성을 듣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하나님이 깨우쳐 알게 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점점 더 많아지고 실제 삶에서 체험적으로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성령하나님에 대해서는 지식도 부족하고 잘 인식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들과 가장 실질적으로 긴밀하게 관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성령님에 대한 계시를 7절부터 살펴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보혜사는 신약성경의 언어인 헬라어 파라클레이토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대개 위로자, 상담자, 돕는 자 같은 여러 가지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자어로 번역된 보혜사는 보호하고 은혜를 주시는 스승이란 의미입니다.

대체적으로 성령님을 지칭하는 의미들이 이해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세 번째 위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보혜사라는 것으로써 성령님과 예수님이 다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뜻이고 그 지위가 동등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원에서 부흥사들이 장풍을 발사하듯이 성령 받아라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성령님은 인간의 마음대로 불러내어 사용하는 무슨 에너지나 신통한 힘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 것보다 성령께서 계신 것이 더 우리에게 낫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복되고 시급한 일은 성령님을 우리 인격으로 영접하고 매사에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멘토를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세상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개 위대한 스승을 멘토로 둔 사람입니다.

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만일 재력과 능력이 있고 나를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멘토를 만난다면 얼마나 큰 행운이겠습니까?

어려운 문제를 만나고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확실한 조언을 들을 수 있는 멘토만 있어도 얼마나 의지가 되겠습니까?

이런 좋은 스승과 멘토들을 많이 만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가장 완전하게 우리를 아시고, 가장 완전하게 사랑하시고, 가장 완전한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파라클레이토스이신 성령님을 영접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본문 7절에서는 성령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계시를 밝혀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셔야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하시죠?

성령께서 우리 곁에 오시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완성하고 다시 아버지 앞으로 올라가시는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현재 제자들에게는 성령께서 오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도 예수님을 이런 상태로 얼마든지 따를 수 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은 상태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중동 여러나라의 말로 복음을 전하는 능력이 나타나죠.

그 현장을 보고 놀란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도행전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오늘 예수님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셨죠.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고 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만 할까요?

사람이 하나님과 통하고 교제하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성령이 계셔야 했습니다.

창조 때에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살아있는 영이 되어 하나님과의 교류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고 죄가 세상에 범람하게 되었을 때 성령께서 인간을 떠나셨습니다.

창세기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체가 된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교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본래처럼 회복된 관계가 되기 위해선 다시 성령이 오셔야만 합니다.

광물질이 절대로 생명체가 될 수 없듯이 성령께서 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거듭나서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본질적인 죄를 십자가에서 속죄하고 제거하신 다음에 비로서 성령께서 다시 우리 안에 오셔서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 안에 다시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거주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론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할만한 엄청난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영적 실력은 그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런일인지 도무지 감도 잡지 못하는 정도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고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도 반드시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삼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전수하셨지만 현재의 결과는 주님의 구속을 이해도 못하고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자기의 야욕을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진실하신 인격에 끌렸고,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믿고 큰 희생을 감수하고 주님을 진지하게 따랐습니다.

지난 밤, ‘다 주를 버릴지언정 나는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의 말도 객기가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결박하고 주님의 죽음이 기정사실이라는 걸 깨닫자 속수무책으로 그 믿음과 결심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성령님이 오시는 게 우리에게 유익한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그대로 살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유 앞에서 인간은 맥없이 무너집니까?

오순절에 성령께서 세상에 강림하셨을 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 모습은 오늘 밤, 자기가 죽는 것도 아니고 주님이 죽으신다는 데 벌써 사색이 된 제자들의 혼이 나간 모습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라는 게 전혀 매치가 안될 정도입니다.

베드로는 대낮에 성전 안에서 대범하게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서슴없이 전파했습니다.

전도하다 붙잡혀 매를 맞고 나올 때 어떻게 말합니까?

자기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매를 맞게 된 것을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 역시 제자들처럼 순진하고 악의가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요동하지 않는 굳건한 심령을 주지 않으시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한 방 파도에 넘어갑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은 알파고처럼 우리의 모든 취약함과 성향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사탄의 계략과 그 술수를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이세돌기사처럼 불계패를 던지고 패배하게 되는 것이죠.

제자들은 성령이 오셨을 때 비로서 들은 것을 깨닫게 되었고 행할 능력까지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성령님을 모셔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들에게 다 성령님을 보내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약속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고 진심으로 성령님이 내게 오시길 구하면 분명히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다만 과연 진심으로 성령님을 내 삶에, 내 인격에 모시고 함께 동반하기를 원하느냐가 관건이죠.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거듭나 바로 세워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내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양도할 것인지 말것인지 계속 줄다리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 새롭게 태어나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오실 길을 열어 놓으신 보혜사 성령님을 믿고 영접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럼 성령이 오실 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8절에 말씀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오셨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책망을 받으셨습니까?

책망 받고 찔리는 것이 없는 설교라면 설교에 문제가 있거나 듣는 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성령께서는 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는 인간이 저지르는 악덕과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죄는 각자의 양심의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죄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성령님은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아버지에 대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속죄에 대해,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유대인들을 책망하십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선하고 옳은 일들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셨는데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경할만한 성인이라고 인정합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믿고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사는대로 적당히 세상과 죄와 버무려져서 사는 게 예수님께 소속되어 삶을 회개하고 바르게 사는 것보다 더 좋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것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오늘 예고하신 대로 성령께서 오셔서, 예고하신 일들을 그대로 행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기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직설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러자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고 죽으신 것에 대해 마땅히 생각했던 유대교인들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신성모독의 댓가로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유명한 랍비도 아니고, 아직 갈릴리 어부의 행색이 남아있는 베드로가 설교하는 말에 이들이 마음에 깊은 찔림과 각성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날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삼천명이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못합니다.

 

다음 성령님은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10절에서 부연 설명해 주십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의로운 분이시라는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의 죽음이 아닌 의로운 예수님의 죽음이기에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죽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바로 성령께서 지적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과 율법을 받은 것과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일들로 자신이 의로운 자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을 때, ‘아니 왜 우리가 못 들어 가?’ 그렇게 분노하고 어이없어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어이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방식으로 옳게 사는데 왜 신이 나를 심판하냐는 것이죠.

그렇게 살다 죽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면 평생 원수로 삼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의 자연적 성품 안에 어느 정도 옳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자신의 모든 도덕적인 의와 종교적인 의는 내면의 모든 죄를 대충 가려놓은 누더기 옷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인간 안에 어떤 의도 없다고 단정합니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분출되는 것은 그냥 각종 죄악과 교만과 위선입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워 줄 의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라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만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그동안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한순간에 직관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11절에 이 뜻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성령께서 오셔서 주님의 말씀을 입증하신 사건들을 그대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복음이 전파 되고 초대교회에 급속히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던 그때, 사도행전243절에서 이렇게 당시의 분위기를 진술합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또 사도행전513절에도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성령님의 충만한 영향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교회의 분위기 속에는 세상이 두려워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상이 교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무서움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갖고 칭송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성령과 주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사실을 입증하는 한 기이한 사건이 소개됩니다.

당시 성령을 받고 모인 성도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재산을 팔아 교회로 가져왔습니다.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자발적으로 도우려 했던 것이죠.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기의 땅을 팔아 베드로 앞에 가져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땅 판 돈을 다 가져온 게 아니라 일부는 감춰두고 일부만 가져 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령님의 직관을 통해 알게 된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게 땅 값의 전부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부부가 둘 다 땅 값 전부라고 대답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이렇게 책망할 때 이들이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습니다.

이런 사건에 잠시 우리는 당혹하게 됩니다.

헌금을 속였다고 이렇게 죽는다면 여기 살아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사건은 역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임금인 사탄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시는 증거의 차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탄에 동조해 성령을 속인 이들을 즉각 심판하신 것은 사탄이 심판을 받았다는 결정적 확증인 것이죠.

사탄이 집결해 의도적으로 초대교회에 악을 심으려 했지만 맥없이 심판을 당할 뿐인 것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교회와 성도들을 훼방한다지만 이미 끝난 게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로 사탄의 그 참소하는 입을 막아 버리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사탄과 그에 속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사람일지라도 그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놓여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는 동기가 되는 것이죠.

심판에 대해 두려움과 경각심이 없다면 그는 성령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한숨을 돌리십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제자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해서 이 모든 말씀을 깨닫기는커녕 어리둥절해 있었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듣는 데 이해가 되십니까, 어리둥절하십니까?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성령이 오셔야 이 모든 말씀들이 내게 어떻게 심각한 관련이 있는지를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갖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신다고 예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사도행전의 기적과 역사들이 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일어났고, 반대로 그 사실들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온갖 위험한 망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을 위장한 악한 영이 기적과 신비로 우리의 건전한 신앙을 넘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고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보혜사성령님을 영접해 거듭나고 평생에 지도받고 따르는 복된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믿고 기도하면 됩니다.

성령님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는 생각을 성령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소원, 가책, 이런 성령의 음성을 잘 분별하고 주의깊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은 삶이 항상 질서있고 올바르게 정렬되어 누가 봐도 견고하고 열매가 풍성한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다 이런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6년3월13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