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가족들을 모시고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들 드립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이 자리에 오신 가족과 이웃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환영합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은 큰 결심을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도 큰 은혜를 준비해 주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꼭 나누고 싶은 말씀은 요한복음3장16절입니다.
새가족분들께 맞춘 말씀이지만 우리 성도님들도 신앙의 중요한 원리를 다시한번 확인하시고 깊이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유대인 고위층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신앙에 대한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 놓을 때 하신 답변입니다.
이 짧은 말씀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요약해주신 것이죠. 이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고 믿어지게 된다면 금광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금맥을 발견한 것보다 더 귀중한 보화를 찾아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그걸 찾기를 원하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제 나이만 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느 정도 빤합니다.
그런데 뭔가 빤하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늘 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과연 계신가,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매일이 바쁜 삶에서 우선 덮어 놓고 있다해도 이것은 마치 옷에 달라붙은 도꼬마리 씨처럼 인간의 심연에 꼼짝 않고 달라붙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엔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죠?
그러나 세계인의 종교통계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는 전체의 3%밖에 되지 않습니다.
백 명 중에 세 명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신은 있는 것 같지만 믿고 싶지는 않다는 무종교자의 비율이 13%입니다.
이 둘을 합해봐야 전체의 16%에 불과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종교는 인간의 무지가 만들어낸 허구다, 이성이 발달하면 세상에서 종교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해왔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며 과학과 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하자 당연히 종교는 점점 쇠퇴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실제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그 반대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뒤에는 무신론자나 무종교인의 비율이 13%대로 낮아질 거라고 사회학자들은 전망합니다.
지금 세계인구의 84%인 59억명이 신의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무언가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확신하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감으로 볼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체험하는 자연세계 이상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 모든 자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창조하신 이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자연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스스로를 태어나게 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부모를 통해 태어났고, 우리의 부모들 또한 조부모를 통해 태어났습니다.
계속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해도 스스로 태어나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어느 시점부터 조상이 점점 원숭이를 닮아가다 원숭이가 된다는 것 역시 너무 허무맹랑한 일입니다.
이 땅의 어떤 인간도 스스로 존재하게 된 자존자가 아닐 뿐 아니라 원숭이가 진화 된 동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조상인 아담을 창조하셨고 그로부터 모든 자손을 태어나게 하셨다는 성경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인간에겐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실 분이신지를 중점적으로 알아보려고 합니다.
인류역사 상 가장 진실한 스승이신 오늘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서입니다.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사람, 곧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실까요?
만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확고하고 진실 된 사랑일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점심 반찬에 계란장조림이 나왔는데, 성빈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입니다.
그런데 주방에 들어간 오집사님이 얼른 그 계란 장조림 한 개를 들고 나와 성빈이의 작은 입을 벌리고 급하게 막 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옛날 우리 엄마들이 자식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던 딱 그 모습인 거예요.
요즘처럼 먹을 것이 지천인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자식 입에 좋아하는 음식하나 더 넣어주려는 부모 마음은 과거 못 먹던 시절 우리 어머니들하고 전혀 다르지가 않더군요.
제가 그 모습을 보며 왠지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저희 딸도 이제 다 커서 직장인인데 아침에 출근 준비하느라 바빠서 아침밥을 제대로 못 먹습니다.
그래서 참치나 장조림 같은 반찬을 이것저것 넣고 밥을 비벼서 방으로 갖다 줍니다.
나가고 난 뒤 싱크대에 갖다 놓은 그릇이 싹 비워져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흐뭇한거예요.
이게 부모에게 자식이란 존재잖아요?
이런 부모의 사랑을 인간 속에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만큼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토록 아끼는 독생자 자신을 내주셨다고 하십니다.
자식만큼 사랑하는 것과 자식을 내 줄만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다른 아이를 자식만큼 사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자식의 목숨을 그 아이를 위해 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전 그렇게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처럼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가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그러셨잖아요.
성경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비유가 꼭 맞진 않지만 아버지가 장남에게 동생들을 위해 네가 희생해라 그런 것을 떠올리면 좀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랑받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사랑하신 게 아니라 자식이라서 사랑한 것입니다.
인간은 악하고, 탐욕이 가득하고, 교만한 죄인이잖아요?그런데 다들 사는 걸 보면 그렇다고 욕심껏 잘 살지도 못합니다.
탕자의 비유처럼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 먼 곳으로 떠났다면 잘먹고 잘살기나 해야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우리를 청소하며 돼지 먹는 음식을 먹으며 산다는 것이죠.
하나님아버지께는 그게 미욱하기보다 더없이 불쌍한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불쌍하잖습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왜 그리 불쌍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고 병약하고 버림받은 사람만 불쌍한게 아니라 돈 좀 쥐었다고, 권력좀 있다고 허튼 짓하다 망신당하는 사람도 한편 불쌍하게 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빠들의 육아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 나와서 그렇게 애틋하게 딸을 돌보던 모 연예인이 성폭행범으로 고발당했다고 뉴스에 나왔죠.
알고 보니 성폭행은 아니고 마사지샵에서 성매매 의심이라고 하더군요.
그게 얼마나 더 나은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귀여운 딸도 알고, 그 아내도 다 알잖아요.
그런데 뉴스에 나온 그 연예인의 축져진 얼굴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참 불쌍하게 보이더군요.
저 사람 이제 어쩌나, 그 딸과 그 아내는 어쩌나.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도 없고, 더 나은 삶을 찾아낼 수도 없고 죄를 이길 힘도 없어 그저 질질 끌려다니는 미욱한 자식들이 측은하고 불쌍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하신 아들 하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이 말씀은 멸망과 영생의 삶이 내세에서 갈린다는 선언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분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지 천국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생애의 시작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믿으세요.
하나님이 이 모든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저 말없는 산천초목도 저렇게 영구히 사는 것 같고 사람보다 더 오래삽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장 완전하게 창조하신 인간의 수명이 백년이라는 건 말이 안되죠.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땅의 생애가 끝난다고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다음 생애를 결정할 유일한 길을 니고데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꼭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쉽게 납득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이해불가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절대자를 찾고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 본성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완벽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인의 84%가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을 찾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사인이 우리 양심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made in God'
‘내가 너의 주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어리둥절해 합니다.
독생자를 주신 이유를 알려면 오늘 말씀하신 ‘멸망’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멸망은 ‘심판’, ‘형벌’, ‘지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멸망에 대해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풀립니다.
성경은 인간의 멸망을 경고합니다.
사람들이 내세에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멸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평생에 지은 죄에 대해 받은 판결입니다.
세상에서 법을 어긴 죄도 반드시 처벌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발각되지 않은 죄를 짓고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념 없는 호텔재벌 2세가 강남 술집에서 유리문을 부수고 행패를 부렸다죠?
그 기가 찬 모습이 CCTV에 그대로 찍혀 뉴스에 나오더군요.
사람들은 이렇게 광란의 악을 저지르는 순간, 어딘가에 증거가 남고, 누군가에게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가 지나가면 끝인 줄 압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스바냐1장12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할 것이니라.
아무리 어둠 속에 숨어도 등불을 비춰서라도 찾아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폐부를 감찰하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한 터럭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왜 지금은 악을 두고 보시냐고 사람들은 반문합니다.
그렇게 다스리는 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잖아요?자유를 통해 가장 귀중한 책임과 사랑을 알도록 자유를 주신 것이잖아요?
그것이 반역을 가져올 수 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유 없는 존재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식 손에 무얼 맡기고 진득하게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과거 부모들은 먹고사는 것도 버거워서 자식들 진로에 일일이 참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들 밥벌이 하고, 오늘 같은 번영한 사회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전에 신문을 보니 요즘 청년세대의 상태를 한마디로 말하면 ‘누가 나 좀 관리해주세요’라고 합니다.
학창시절부터 모든 공부스케줄을 엄마가 다 짜주고, 입시설명회에도 엄마가 달려가고, 수강신청까지 관리해주다보니 자기 인생을 스스로 계획하고 관리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성공을 통해서보다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이 배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과 성품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만드셔서 책임지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그 원칙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도 몰아내고 타인도 몰아내고 자기 인생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바치게 된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 헌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게 죄입니다.
그게 죄인지 몰랐다고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못을 박습니다.
양심이 그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늘이 두렵고, 양심이 우리를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그런대로 다 선량한 사람들 같습니까?
조용히 양심에 물어보면 하나님 앞에서 계산되어야 할 죄의 값이 너무 많다고 가르쳐 줄 것입니다.
겉으로 교양 있게 보이든, 노골적으로 사람들과 싸우고 거칠게 살아가든, 하나님이 그 내면을 털면 누구든 그 판결은 영생이 아니라 영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한계적 상황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방법을 찾아내셨습니다.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고 영생으로 인도할 희생양을 보내주셨으니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장 완벽하게 성취하신 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걸 깨닫게 되면 놀라서 입이 딱 벌어집니다.
제물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다 압니다.
자신이 복을 받고 화를 면하게 해 줄 죄 없는 희생양을 말합니다.
공짜 면죄부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고 대신 형벌을 당하실 희생양으로 다름 아닌 독생 하신 하나님을 내려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왜 선량한 다른 인간을 보내지 않고 아들 하나님이 오셔야만 됩니까?
인간은 아무리 선량해 보여도 속을 뒤집어 털면 자기 죄 문제가 절박한 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우리는 자식의 죄를 속죄해 줄 수 없습니다.
자기 죄가 태산인데 어떻게 남의 죄를 속죄할 희생양의 자격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독생자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의 대속자가 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듣고 깨닫고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문은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문을 통해 먼저 영생의 유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일에 우리 가족들이 함께 하시길 어찌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좀 이해가 되시는 것 같습니까?
신앙은 느낌이나 감정보다 지식과 의지에 가깝습니다.
참된 사랑이 감정입니까, 의지입니까?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기에 결혼생활이 점점 어려운 것입니다.
가치 있고 오래 가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의지입니다.
자식사랑도, 가족사랑도 의지 없이는 안됩니다.
신앙은 뭔가 신비한 것이 내 인격에 충격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이게 맞다 생각되는 것을 의지적으로 쭉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하나님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이 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떤 광풍에도 나를 놓치지 않고 꽉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그래서 세상도, 죽음 다음도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요즘 건강을 생각해서 공원을 자주 갑니다.
어떤 날은 좀 풀이 죽어 공원을 갑니다.
저만 그런 건가요?
다들 마찬가지시잖아요?
삶이 얼마나 우리를 속입니까?
이제 좀 나아질 것 같았는데 갑자기 어디서 펀치가 훅 날라오고, 휘청거리다 겨우 정신을 수습했는 데 또 펀치가 날라오고.
며칠 전 좀 낙담한 마음으로 공원을 찾았는데, 장미공원 입구에서 무심코 바라본 장미꽃이 저를 향해 활짝 웃는 것입니다.
낙심한 마음에 장미를 보았으니 ‘가을장미가 참 처량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장미가 웃고 있는 것예요.
그러면서 힘내라, 힘내라, 그러는 것입니다.
저 바닥까지 내려앉았던 마음이 불끈 위로 솟아오르며 든든한 것이 뱃속을 받쳐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 앞에 서있는 나무를 바라보니 ‘이렇게 견고히 서라, 견고히 서라’ 그러는 거예요.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니 ‘이만큼 마음을 넓게 해라, 땅의 작은 일에 상심치 말고 관대해라’ 그러는 것입니다.
누가 그러셨겠어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으로만 아니라 주변 모든 것을 통해, 누군가의 말을 통해, 예기치 않은 환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삶이 좋은 이유 백 가지를 대라면 전 댈 수 있습니다.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은 이 신앙의 삶에 대해 알아보기로 의지적인 결심을 하고 지속적으로 교회에 나오시라는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이 심오하고 방대하기까지 한 신앙을 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데 다른 어느 것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헌금이라거나, 봉사라거나, 집에 있는 가족들이나, 이런 것 다 생각하지 말고 내 생각만 하세요.
내 영혼이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내가 갈 곳은 어디인가,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까.
이렇게 오직 내 영혼만 생각하시고 우리와 함께 행복하고 만족스런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 영생을 유업으로 받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6년10월16일 새가족초청주일예배 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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