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0장11절-18절 (양들의 선한 목자 )

남수연 2017. 9. 22. 14:57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고 예배드리러 온 많은 유대인들이 이 기적을 보고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들은 이걸 보고 안식일에 이런 의료행위는 명백한 죄라고 예수님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게 죄냐 아니냐로 갈라져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되죠.

눈을 뜬 맹인은 예수님이 옳다고 말했다가 결국 유대인사회에서 추방당하고 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착하고 좋은 일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동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옳은 일을 하셔도 자기 신념과 이득을 위해 진실을 이렇게 비뚤게 보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죠.

수많은 반대자와 지지자들의 설전 속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오늘 설교 제목에서 예상했던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니죠?

다윗의 시편23편에서 느껴지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과 전혀 거리가 먼 소동 속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삶이 이런 혼돈의 소리 속에 살아가기에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양의 목자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또 우리와 사랑하는 가족들이 영혼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로 나오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만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사람은 양에 비유할 만큼 나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양으로, 자신을 목자로 비유해 오셨습니다.

에스겔3431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34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

왜 하나님은 많은 동물 중에서 사람을 하필 양으로 비유했을까요?

우리는 목축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양에 대해서는 별 경험이 없습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동물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던 중 도로에 들어온 양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양이 차가 앞에 달려오는 데도 피할 생각을 안 하더라는 거예요.

개나 고양이는 차가 달려오면 피하는 데 양은 피할 줄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차가 양을 피해 옆으로 돌아서 지나갔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이 위기에 처한 것도 모를 만큼 아둔한 동물이 양입니다.

기본적으로 양은 공격할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닭도 얼마나 무섭게 쪼아댑니까?

공격을 못하면 방어라도 하고 빨리 도망칠 기능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양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양은 눈이 나빠 멀리까지 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풀을 다 뜯어 먹으면 다른 데로 이동을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초원지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풀을 찾아다니며 양을 기르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양떼를 이끌고 굶주려 죽지 않을 만한 시간 안에 다음 목초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양들은 그걸 못하기에 풀을 다 먹으면 그냥 주변을 맴돌다 굶어 죽거나 맹수의 먹잇감이 되는 것입니다.

양이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으며 생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외모도 그렇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스스로 매무새를 다듬으며 삽니다.

양은 그냥 두면 한없이 양털이 자라 털 무게에 눌려 생존이 어렵습니다.

몇 년 전 뉴질랜드에서 발견 된 슈렉이란 양 기억하실 것입니다.

슈렉은 봄철마다 돌아오는 양털깍기를 극도로 싫어하더니 결국 농장에서 도주해 6년 동안 동굴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 양털이 자라 산더미같이 된 슈렉은 제 발로 걸어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양털 때문에 비대해진 몸으로 도저히 살아가기가 힘들었던 것이죠.

결국 양털깎기 챔피언에게 털이 깎이게 되었는데 이 진기한 장면이 TV로 생중계 되었다고 합니다.

슈렉의 몸에서 나온 양털의 무게를 달아보니 무려 42.45킬로였습니다.

이 정도면 20명분의 옷을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털 때문에 슈렉이 앞을 보기도 힘들었고 배변도 힘들었을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있어야 생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목자가 있어야 생존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립해서 자신있게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죠.

아이들이 양말만 제 손으로 신을 줄 알아도 부모의 손을 뿌리칩니다.

사춘기가 되면 독립적 존재감을 미친 듯이 뿜어대잖아요?

그러나 사람은 결코 혼자 자신을 지키고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목자가 필요 없는 데 목자를 자처하셨다면 하나님의 넌센스잖아요?

선한 목자만이 양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반드시 선한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인생철학을 가르치고 삶의 지혜를 얻는 그런 목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닙니다.

20절 보면 반대파들은 오히려 이 말을 듣고 저 사람 정상 아니다. 귀신들렸다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스스로 선한 목자라는 말씀도 그렇겠지만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엔 기가 찼을 것입니다.

허풍이고 망상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선한 목자라 한들 누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양의 목숨과 사람의 목숨의 가치는 다르잖아요?

태풍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조하고 물살에 휩쓸려가 죽은 사람은 의사자라고 그 공훈을 인정해줍니다.

만일 떠내려가던 것이 돼지 새끼였다면 의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양떼를 지키려다 어쩌다 부상을 당하고 상처를 입는 목자는 간혹 있을 수 있겠지만 누가 양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겠습니까?

그러니 양을 위해 대 놓고 목숨을 버리겠다는 예수님 말씀에 혀를 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과 동물의 가치와는 비교도 안되는 하나님의 목숨을 사람을 위해서 내 놓으신다는 것이니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맹수가 나타나면 양들을 위해 싸우다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양들을 위해 완전히 목숨을 버릴 것이 결정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양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라는 단어는 대신하여라는 의미로 쓸 때가 더 많습니다.

목자의 죽음은 양들을 대신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사망선고를 받은 존재입니다.

현재 영적인 죽음과 이 땅의 생애가 끝나는 육체의 죽음과 이후의 영원한 형벌을 포함한 사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사망선고장을 받아들고 자신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대속하신 선한 목자 없이 죄인이 노력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천진난만한 생각입니다.

죄는 사람의 안과 밖을 회복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존 맥아더목사님은 평생을 미국의 그레이스처치에서 목회하며 성경대로 가르치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존경할만한 분입니다.

이 분의 말씀이 이제 자기도 천국을 더 가까이 느끼는 나이가 되었고 천국을 더 많이 묵상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뵙고 예수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천국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을지 너무 기대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가장 간절한 것은 천국에는 더 이상 죄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라고 합니다.

평생 죄와 싸워왔는데 이젠 지친다는 그 말씀이 참 진솔하게 들렸습니다.

죄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양처럼 연약하면서도 인간의 속은 깊이를 알 수 없이 악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만물의 이치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 알 수 없듯이 우리가 사람이래도 사람에 대한 지식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과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말하자면 신적존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신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우주의 중심은 자기입니다.

이렇게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진 인간이 타락했을 때, 반대로 얼마나 특별한 악과 파괴력을 가진 무서운 존재가 됐는지 사람은 정확히 모릅니다.

내면에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죄의 인격과 뒤틀어진 본성을 다 모르고 삽니다.

내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극단에 가서야 그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무서운 인간의 바탕이 드러난 사건들이 매일 뉴스에 보도 될 때, 사람들은 인간이 지닌 악의 밑바닥을 보고 끔찍해 합니다.

며칠 전에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40대 엄마가 초등학생인 두 자녀를 죽이고 자해를 시도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애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유서가 발견되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을 동반자살이라고 보지 않고 우울증 살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어떤 극단에 가면 자식을 죽일 수가 있는 게 인간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보는 극도의 이기심과 타락한 신 의식이 어떤 파멸을 가져올지 아직 역사의 뚜껑이 다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결국 지구를 말아 먹는 데까지 간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종말의 시나리오잖아요?

슈렉처럼 스스로 목자를 떠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이 땅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 피폐, 관계 속의 불행, 가시같은 환경, 전쟁과 재난 등등 다방면에서 인간은 고통을 당합니다.

점점 더 그 고통은 심각하게 가중되어 질 것입니다.

게다가 목자 없는 양을 노리는 이리같이 사탄의 세력들은 고통당하는 죄인들을 조롱하고 농락합니다.

눈이 어둔 양처럼 영적세계를 못 보는 사람들이 마수를 벗어 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근본적인 죄와 매일의 죄를 해결해 가지 않는 한 인간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과 목자가 없는 사람과의 차이는 양을 생각하면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눈이 나빠서 스스로 먹이를 찾지 못하는 양이 주변에 있는 풀을 다 뜯어 먹기까지 위기를 모르는 것 같이 목자 없는 삶이 그렇습니다.

지금 먹거리가 있고 좌우가 다 푸른 초장 같고, 항상 여기서 풍족하게 살 것 같지만 그런 날은 신속히 지나갑니다.

인간관계가 메마르고, 물질이 결핍되고, 건강이 쇠약해지고, 아무리 둘러 봐도 전날의 방초동산은 간데없고 광야에 홀로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헤매며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것이 진리구나, 이것이 내 목자의 음성이다라고 알아 듣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20절에서 볼 수 있죠.

한 쪽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하고 한쪽은 이건 귀신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증언이라고 믿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의의 길,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 땅의 삶에서도 앞서가시며 다음 먹거리를 준비해 주시고 사나운 악의 세력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한 과거보다 나쁜 삶은 절대로 없습니다.

때로 목자가 인도하는 삶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사방이 깜깜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되신 예수님이 더 풍성한 식물을 얻을 동산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이런 말씀을 받기엔 너무 과분하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을 목자로 따르는 성도들에 대한 완전한 보장에 대한 말씀일 뿐 아니라 상호간의 완벽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양은 목자가 어떤 길로 인도하든 목자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양이 되었다면 어떤 위기와 위협이 온다 해도 예수님의 선하신 인도를 확신하며 묵묵히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끝까지 따르는 양들만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이죠.

영원한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끝까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따르는 양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예수님께서는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찾으십니다.

16절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당시의 말씀으로는 이스라엘 성도들 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 중에 주님의 자녀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 맞는 해석은 이미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 뿐 아니라 복음을 받고 주님을 따르게 될 사람들이 더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우리처럼 부르셔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어떻게 부르셨던가요?

꿈에 나타나 우리 이름을 부르신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교회로 인도하고 예수님께로 데려와 그 음성을 듣게 한 것 아닙니까?

아직 주님께 나오지 못한 양들 역시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어떻게든 데려와 말씀을 듣게 하면 그것이 진리이고 믿을만한 말씀이라는 것을 분별합니다.

이것이 내 목자의 음성이라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곳은 세상에서 교회 밖에 없습니다.

어디서 오늘처럼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런 음성을 듣겠습니까?

아직 양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양들을 인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되고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또 아직 목자를 만나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은 위험하고 고독한 처지에 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새가족초청예배에 먼저 우리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초대합시다.

그리고 계속 기도해 오던 친구와 동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분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은 그동안 해보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웬만한 희생과 섬김, 그리고 착한 우리 행실을 인정받지 못하면 교회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한 철학자는 이런 말로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내게 당신의 구원된 삶을 보여주면 당신의 구원자를 한번 믿어 보겠소

우리의 착한 행실이 이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의 모습은 우리가 믿는 구원자가 실제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도가 잘 되지 않고 힘들다는 것을 우리가 다 경험했고 실패에 대한 상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다른 계명들을 지키려고 항상 힘쓰듯이 전도에 대한 명령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전도대상자를 정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이 분들의 영혼에 어떤 역사를 일으키시길 기도하며 또 우리의 섬김이 이 분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도록 믿고 기도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4)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논의에 대한 놀랍고 심오한 말씀입니다.

17절부터 18절까지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하나님 간의 심원한 논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성부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자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에 의한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 성부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의 우열을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고 동일하신 전능자십니다.

다만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대표자로 아버지 앞에 심판 받기 위해서 스스로 하나님께 종속 된 인간의 지위를 취하신 것입니다.

이런 심원한 구속계획에 대해 청교도신학자인 존 플라벨은 이 영원하고 복된 언약이 어떻게 맺어졌는지 이런 가설적 대화록을 만들었습니다.

내 아들아 여기 스스로 지극히 파멸하여 이제 내 공의 앞에 드러나 있는 가련하고 비참한 영혼들이 있다.

공의가 이들에게 보응할 것을 요구하니, 그대로 두면 이들을 영원히 멸망시킴으로써 공의가 스스로 보응할 것이라,

이 영혼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내 아버지여, 저들에 대한 저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저들이 영원히 멸망당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저들의 보증인으로서 저들을 담당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명세서를 다 가져오소서, 저들이 아버지께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제가 보겠나이다.

차후에 계산할 것이 남지 않도록, 이제 제 손에 다 요구하소서.

저들이 아버지의 진노를 겪게 하느니 차라리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아버지여 저에게 저들의 죄값을 물으소서

성부와 성자와의 이 가상의 대화는 죄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구주 예수님이 어떤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의 위엄과 생명을 내려놓고 속죄자가 되게 되셨는지 충분히 상상하도록 이끌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선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그 음성을 다 들으셨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양들이 되어 주님을 따르고 있는 줄 믿습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양이 목자를 따라가야만 살듯이 예수님의 인도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많은 말씀으로 주님이 이끄는 길을 하나 하나 세밀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로 깨어 있어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선한 열매를 맺어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라, 현실의 다급한 문제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목자를 따르는 길은 본능과 세속적 경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내 새생명이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성경의 좋은 양식을 먹고 기도와 실천의 영적 운동으로 영적 근력을 점점 강화시켜야 합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생명과 풍요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만 하나님나라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명과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찬 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일에 늘 마음을 두고 애쓰며 가장 축복 된 이 일에 동참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7년9월17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