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생명의 떡 (요한복음6장47절-59절)

남수연 2017. 10. 6. 14:41

직업활동을 일컬어 사람들이 밥벌이라고 합니다.

밥먹고 사는 문제, 빵문제가 인생에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입니다.

노후에도 지금처럼 먹고 살 수 있을지, 자식들은 또 뭘 해서 먹고 살 것인지가 늘 우리의 걱정이자 관심사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지인들을 만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더 늙으면 시골에 내려가 텃밭이나 가꾸며 먹고 살아야겠다는 말입니다.

제 주변의 중산층이라는 사람들도 재산이라 봤자 아파트 한 채에 금융저축 약간입니다.

아들 딸 신혼집 구하는 데 보태려면 그 집을 파는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결국 서울에서 밀려나 작은 집을 얻을 수밖에요.

그러니 텃밭이나 가꿔 상추나 따먹으며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겨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을 생각해보면 죽을 때까지 이게 해결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도 하루 세끼 먹고 사는 게 전쟁인 나라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예수님시대에 이스라엘사람들은 더 심각했겠죠.

생산량도 적은 데다 로마정부에 갖다 바치고 나면 굶지 않고 사는 게 기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이 땅의 빵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했을 때 군중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나 웅성거렸다고 합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걸 해결해 줄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그게 아니라니 실망감에 화가 치밀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돈과 건강과 명예와 행복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과 그런 것은 없고 천국에서 모든 영화를 주시는 하나님 중 한 분을 선택하라면 누굴 선택할까요?

하나님의 고민은 사람들이 현실을 취하고 영원한 것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은 현세의 떡을 주시는 하나님을 요구하며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사는 게 급해서 교회 못가고, 아직은 애가 어리고, 불교를 믿는 시어른들과 갈등을 일으키기 싫어서.

실제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신앙을 미루는 사람들이 결국 생명의 떡을 버리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의 바램은 현실의 떡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당시 군중들을 화나게 했던 예수님의 말씀인 나는 생명의 떡이라’.

그 말에 거세게 항거하는 사람들 앞에서 진땀나게 이 진실을 역설하셨던 예수님은 진짜 값지고 영원한 것을 주시려던 것입니다.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창업자인 헤프너의 사망 전 뒷모습이 인터넷에 나온 걸 보았습니다.

환자복을 입고 보행기에 의지해서 겨우 걸음을 떼는 헤프너의 늙은 뒷모습이, 열광했던 세상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건지를 말해주더군요.

여전히 땅의 양식에 급급해서 살다 이 자리에 오셨다 할지라도 더 시급한 생명의 떡을 깊이 깨닫고 행복한 수혜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먼저 이 생명의 떡설교는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2천년 전 이스라엘사람들 앞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역사와 신앙을 전제로 하셨다는 것이죠.

아마 우리 앞에서 말씀하셨다면 좀 다르게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의도와 의미를 잘 이해하려면 해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모르고 본문 말씀을 그냥 읽으면 남의 나라 이야기에다 시대마저 다른 우리에겐 상당히 모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으라는 것이지?’

뭔가 피부에 착 감기며 와 닿는 느낌이 안 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가며 구원의 지식들을 잘 배워 예수님을 사실적으로 믿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죄용서와 구원을 계획하셨잖아요?

예수님의 구원을 잘 이해하도록 완벽하게 계획 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신비는 그들의 역사와 삶을 통해 예수님의 구원을 잉태한 모판이자 구원의 모형이라는 데 있습니다.

성경의 무수한 인물들과 사건들이 분명 자연적 상황에서 자기 의지대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절묘하게 예수님의 상징들을 일치시켜 놓으신 하나님의 지혜는 정말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 50인데 100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신앙을 뻥튀기 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진리에 대한 이해와 순종을 기반으로 삼습니다.

그래야 신앙이 사람의 인격과 괴리되거나 부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미리 박아 놓으신 그리스도의 예표들을 하나하나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확고히 아는 굉장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도 구약성경 속에 있는 예표들을 꺼내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걸 입증해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떡에 대해 알려면 세트로 보아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구약 모세시대의 만나기적과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생명의 떡 설교의 앞 부분에는 바로 오병이어기적 사건이 있습니다.

구약의 만나는 이스라엘조상들이 출애굽 뒤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까지 광야에서 먹고 살았던 하늘의 양식입니다.

농사도 못 짓고 달리 양식을 구할 수 없던 광야에서 생존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려주신 하늘의 곡식이죠.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였을 때, 사람들은 즉시 모세 때의 이 만나 기적을 연상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된 것이죠.

그래서 오병이어 기적 뒤에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구원자로 인정하는 분위가 급속히 확산됩니다.

다만 이들이 상상한 것은 모세와 같이 육체의 양식을 주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강제로 예수님을 추대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앞에서 기록합니다.

이 일 이후 예수님께 몰려드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고 기대감은 고조되었습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나와 의사타진을 합니다.

31절에 보면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조상들에게 공급했는데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구원자라면 우리에게 무엇을 주겠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그 떡을 먹은 사람들도 다 죽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주시는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참 떡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호기심에 바짝 다가서며 말합니다.

주여, 바로 그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옵소서

모세가 준 만나보다 더 좋은 떡을 주신다니 그게 뭔지 좀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더 진기한 기적의 떡이 나오려나보다 기대했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

이 말씀에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화가 나서 서로 투덜대다 설전을 벌이고 싸움이 일어날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생명의 떡 강론이 끝나자 제자들조차 뭐라고 합니까?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그리고 그나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다 떠나고 열두제자만 남게 됩니다.

우리도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징이 담긴 만나를 통해 생명의 떡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나 기적을 통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셨냐는 것이죠.

1. 우선 만나를 내리신 이유는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기 위해 오신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왜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사십년을 살았고, 먹을 것이 없어 만나를 먹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된 삶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을 상징하는 가나안땅으로 옮기시는 여정 중에 광야가 있었죠.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이 광야 사십년을 계획한 게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의심과 하나님의 인도를 불신하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죄 때문에 광야 사십년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만나는 그 죄악에 대한 광야 심판 중에 생존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의 상징인 것입니다.

만나에는 죄에 대한 심판과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이 담겨있는 것이죠.

6장 전체를 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이 죄 문제를 놓치고 하늘 양식 만나를 얻어 먹은 것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만 갖고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인생의 광야가 왜 찾아옵니까?

죄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죠.

오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으라고 강조하시는 말씀 앞에,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 줄 수밖에 없었던 원인, 우리의 죄를 먼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고 영광이기 전에 우리 심령에는 예리한 성령의 칼이 새겨놓은 주홍글씨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잊혀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내가 죄인이라는 낙인입니다.

그 주홍글씨를 영원히 덮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살과 피를 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믿는 사람이 바로 생명의 떡을 먹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로 인한 심판의 상태임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오늘 이스라엘사람들이 예수님께 실망했다고 난리인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죄의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속죄받았는지 아는 사람은 절대 예수님께 실망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하지만 끊임없이 내면의 죄가 꿈틀거리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알기에 설령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셔도 실망이란게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이 사실을 되새겨 주시고 예수님의 사랑이 그 위에 넘치게 덮이게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다음은 이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땅의 양식으로 광야에서 생존한 게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온 양식이라는 데 예수님의 모형으로써의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들을 먹이실 때 사막에서인들 곡식이 나게 못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새벽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식량 만나를 내려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생존양식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50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광야에서 생존양식이었던 만나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은 반드시 하늘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자가 땅의 혈통으로 태어날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있었지만 만나 기적에서 이미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분이 구원자임을 예표 해 놓은 것입니다.

이 땅에선 구원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남을 구원할 만큼 의롭겠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생존양식이었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만이 영생을 얻기 위한 유일한 생명의 떡입니다.

본문성경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우리에겐 영생할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진실 된 말씀을 믿고 모두가 생명을 얻으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인자의 살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냥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게 더 쉽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몸을 상징했던 만나에 비추어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죠.

우선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 몸을 찢고 피를 흘리는 고난을 통해서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절구에 찧고 불에 굽고 떡을 만들어 섭취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육체가 찢기고 짓이겨져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게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찬예식이 그렇게 찢기고 조각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먹고 마시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의 이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막연하고 모호한게 아니라 만나를 조리해서 섭취하듯이 경험적이고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요리해서 아침 저녁 먹으면 몸에 영양분이 되어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힘이 생겨 일하고 활동합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고 섭취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먹으면 실제로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단지 ,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죄를 속죄하고 구원을 얻게 해주시기 위한 것이구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음식프로 보다 짜장면 시키고 치킨 시킨 경험들 있으실 것입니다.

보는 것과 실제 먹는 것은 완전히 다르잖아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은 믿음이 그렇습니다.

그만큼 분명한 인식과 변화가 영혼과 인격에 실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몸을 보고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살을 먹으라는 체험적인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걸 위해 먼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빵을 씹게 했던 것이죠.

먹은 사람은 배고프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속이 늘 허전하지?’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를 진심으로 믿고 예수님을 내 삶에 받아들일 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실제로 연합하십니다.

만나가 사람 몸에 생명을 주고 여러 기관에 작용하듯이 예수님이 그렇게 생명을 주시고 그렇게 나와 연합되어 삶의 실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신자들과 불신자들은 별다를 것 없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지난 주에도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일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 같이 새로운 뉴스거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삶 전체가 다 신앙행위로 채워질 수는 없습니다.

자연적인 몸을 가진 현재의 우리는 이 땅의 일로 대부분의 삶을 채워갑니다.

신앙 안의 기쁨이 있지만 하나님은 자연적 삶의 터전에서도 많은 즐거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세상 안에서 우리가 맛보고 누릴만한 유익한 것을 잘 선별해서 취하며 삶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성도들의 삶이 세상사람들의 삶과 유별나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다릅니다.

우리의 저변엔 세상에는 없는 예수님의 생명이 깔려있는데 그 저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겉으로 비슷해 보이는 데, 하늘의 생명이 있냐 없냐,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오는 담력과 용기가 있냐 없냐, 내 존재에 대한 자존감이 있냐 없냐.

그 차이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입니다.

제가 전도대상자인 분을 지난 주에 미리 만났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생각은 있는데 아직 결심을 못하시는 게 문제입니다.

이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현역에서 은퇴를 하고 지금 NGO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데, 필리핀 같은데서 봉사활동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선교사들과 연결이 된다는 거예요.

똑같이 봉사를 위해 그곳에 있는데 자기와 다른 무언가가 그 분들에게 있다는 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다른지를 유심히 지켜보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자들의 내면에 있는 신앙의 생명이고 저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직장인이고, 주부이고, 학생이고, 동네주민인 것 같지만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고 그 능력은 언제고 발휘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무슨 대단한 믿음이 있냐 싶을 때도 있지만 어떤 순간이 오면 우리도 놀랄만한 믿음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그 믿음의 능력이 모든 위기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7절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우리 안에 결코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이미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영으로부터 계속해서 영생이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 스가랴서의 환상입니다.

거기보면 스가랴가 신비한 환상을 보는데, 지성소 앞에 등대를 봅니다.

이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사장들은 항시 기름을 공급해야 합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보니 놀랍게도 기름을 짜내는 감람나무에서 직접 관이 등잔에 연결되어 계속해서 금기름이 자동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성령을 통해 영원히 공급되고 그 구원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명료한 그림인 것이죠.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셨잖아요?

또한 생명의 떡을 먹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성도들에게 육체의 떡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는 더 풍성한 육체의 떡도 예수님이 주시는게 사실이잖아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통해 영과 육의 모든 좋은 것들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셨다면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먹고 그 피를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함인 것을 믿고 삶을 돌이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삶과 인격을 놀랍고 멋지게 변화되도록 주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점점 그렇게 멋있어져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단 하나님의 인도와 말씀대로 순종할수록 삶은 더 조화롭고, 더 강인하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의 생명은 우리를 영화롭게 부활시켜 영생에 들어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영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몸, 고난을 받은 그 몸을 떼어 자녀들의 입에 넣어주려는, 오늘 본문에서도 드러난 주님의 사랑과 열정을 다시한번 깨닫고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2017년10월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