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2장12절-19절 (나귀를 타신 예수님)

남수연 2018. 3. 16. 16:14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앞두고 예수님에 대해 잘 알아가고 계십니까?

처음 교회에 나오면 모든 문화가 낯설죠.

그러다 점점 교회생활을 배우고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예수님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될까요?

그것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알아간다는 것은 자주 보고,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만날 수가 없잖아요?

본적도 없는 사람과 가까워지고 신뢰감이 생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만나보지 않고도 점점 알아가고 가까워진다는 것은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믿음이 생기기가 어렵다는 뜻이죠.

믿음은 근거도 없이 훅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검증된 것만 믿는 것이지 애매모호한 일은 안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을 맞으며 어떤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시렵니까?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는 영화 속의 예수님을 떠올리기 보다 제자들이 그 때를 어떻게 전해주고 있는지 성경을 통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신앙에는 은혜로운 감정이 있지만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제자 요한이 들려주는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2천년전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여정을 함께 따라 가 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셨는지를 살펴보며 예수님을 좀 더 알고, 또 구원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본문 내용은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마지막 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를 이해하려 할 때, 직접적인 설명도 좋지만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행동은 많은 것을 말해주잖아요?

jtbc방송에 의하면 지난 해 촛불집회에 연인원 1657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하게 된 배경엔 부패한 정권에 대한 개혁이라는 국민적 염원이 있었죠.

본문에서 예루살렘에 일어난 큰 소동도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때는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입니다.

구약시대의 조상들이 애굽의 노예로 살다 해방 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순히 놓아 보내지 않던 애굽을 심판하기 위해 죽음의 사자가 내려 왔었죠.

그날 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른 이스라엘 집은 죽음의 사자가 건너가고 애굽의 장자들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애굽왕이 이스라엘을 풀어 준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신 분이라면 즉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여주는 모형적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이 절기가 되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유일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집결합니다.

현재 예루살렘 크기는 강남3구를 합친 정도입니다.

본문 당시 구예루살렘은 훨씬 작았습니다.

거기에 국가의 전체 성인 남자들이 다 모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끊임없이 밀려오는 행렬로 도시 전체가 인구와 열기로 폭발직전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운집하면 거기서 생기는 에너지가 크잖아요?

이 유월절은 조상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풀려난 광복절 같은 날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현재 그들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때 첫 유월절 날처럼 민족을 해방시켜 줄 모세 같은 구원자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거듭 약속하셨거든요.

그 구원자가 애굽에서 자유를 찾았던 이 유월절에 오셔서 로마로부터 자유를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뤄질 가능성이 최고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구원의 메시야일거라는 소문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군중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집니다.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이스라엘의 왕인 구세주를 고대하며 지은 시편을 합창하며 예수님을 향해 열광한 것입니다.

그런 환영의 배경에는 지난 삼년동안 전국에 퍼진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7절을 보면 이 확신에 못을 박는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2킬로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입니다.

그 때 조문 왔던 사람들이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았고 그 소문을 예루살렘에 퍼뜨렸던 것이죠.

사람들은 이런 전무후무한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와 나라의 상징이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광하는 것이죠.

독립이 코앞에 닥쳤으니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촛불집회의 열기는 저리가라죠.

이젠 고대하던 메시야가 로마를 진압하고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 가룟 유다의 밀고로 힘없이 체포되신 예수님을 보고 이들은 성난 폭도가 되어 차라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왜 순식간에 믿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바뀐 것일까요?

물론 사람이 실망하면 호의가 적대감으로 바뀌죠.

그러나 요한사도는 사람들이 애초에 예수님을 그렇게 열광적으로 맞았던 이유는 단지 표적 행함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기적도 믿음이 아니고, 열정도 믿음이 아니고, 감정도 믿음이 아닙니다.

메시야에 대한 확신은 구약성경에 예언 된 지식에서 생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메시야가 죄인을 대신해서 나무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들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니 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것이죠.

지금 군중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왕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현실적인 열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엔 오실 메시야에 대해 여러 선지자들이 치밀하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다윗의 시편과 이사야서를 보면 메시야가 고난받고 속죄의 죽음을 당한다고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다 조합해서 맞추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죄와 사망에 종이 된,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다는 분명한 그림이 나옵니다.

이 그림을 얼마나 완성해 갖고 계십니까?

결론만 들어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든 불완전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준비되신 메시야라는 것을 성경의 지식을 통해 깊고, 분명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누구든 배신한 군중들처럼 위험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설교시간만으로 성경 전체를 알기엔 역부족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경에서 구원을 얻을 것을 아시고 성경 알기에 더욱 힘쓰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오신 것일까요?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본래 이 나귀는 예수님이 타고 다니셨던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내용이 기록된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일부러 어린 나귀를 데려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어린 나귀를 타셔야 할 이유가 있으셨다는 것이죠.

16절에 보면 요한과 제자들도 왜 그러셨는지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야 이것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죠.

15절이 그 말씀입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알고 보니 이것은 스라랴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죠.

스가랴서99절 전체 말씀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장차 구원을 베푸실 공의로우신 한 왕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예언이죠.

예수님께서 이 예언대로 오늘 예루살렘성에 임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과 예언 안에서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진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예언이 가리키듯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 온 민족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된 누가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외치자 못마땅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저런 소리를 듣고 있냐 자제시키라고 불평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거라고 하셨죠.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신 것입니다.

또 이 예언과 예수님의 나귀를 타신 입성은 예수님이 백성들을 구원하실 방법에 대한 암시입니다.

그 메시야왕은 백마를 타고 군대를 거느린 정치적 왕으로 구원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이 짐을 실어 나르는 볼품없는 짐승인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당나귀는 다리가 짧아 말처럼 위풍당당하지 않습니다.

동네에서 일보러 다닐 때나 편하게 타고 다니는 용도지 왕의 등장에는 전혀 어울리는 동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나귀 중에서도 작고 왜소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백성을 구원하려고 들어오는 왕이 이런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을 예언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적을 이기고 백성을 구원해 냅니까?

하나님이 온 민족을 구원하실 방법은 사람이 생각해 왔던 것과 이렇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왕이 왜 이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죠?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그것은 구원하러 오시는 왕이 겸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힘과 권력이 있지만 그걸 쓰지 않으신다는 것이죠.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메시야의 기이한 겸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왕이 그 힘을 제한하여 겸손하게 오십니다.

그가 구원하는 방법은 무력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신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오실 메시야가 인간 본성을 가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렇게 겸손한 지배자는 없습니다.

그런 겸손으로 압제 된 인간을 빼낼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이 예언이 가리키는 것은 정확히 예수님 한 분이신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어린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것은 예언대로 흉내내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시되 겸손으로 그것을 이루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이 모습을 스가랴가 먼저 성령으로 본 것입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먼저인 것이죠.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폭동 같은 열광 속에 느릿느릿 지나가시는 모습은 주님의 권능과 겸손의 절묘한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 중에도 겸손으로 칭송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재인대통령의 경우도 겸손이 몸에 배인 것이 높은 지지율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시진핑주석을 만났을 때, 뒤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머리 숙여 인사하는 사진이 화제가 되었었죠.

사람들의 겸손은 다져진 개인기 같은 것입니다.

겸손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대인관계에서 원색적인 교만과 무례함이 드러납니다.

좀 노력해서 겸손이 개인기가 되고 세련되게 행동한다고 본성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속에는 다 인간의 죄악의 근원인 치명적인 교만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갈고 닦은 개인기가 아닙니다.

겸손은 예수님께 우러나오는 고유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죠.

신이신 예수님께는 월등하심과 겸손하심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처럼 월등하다고 과시하거나 우월감에 빠지지 못하시는 것이죠.

오히려 그 겸손함은 자신보다 못한 자, 낮은 자, 고통 받는 자의 처지까지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약자들이 억압당하고 괴로움을 당할 때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미투하는 여성에겐 당할 만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하나님의 겸손은 비천하고 나약한 피조물의 마음까지 낮아지셔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고민과 힘든 상황들을 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처지까지 낮아지실 수 있기 때문에 공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공감한다는 것은 말 뿐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부자가 어떻게 끼니를 걱정하는 가난한 자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아무도 남의 불행한 처지를 똑같이 아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그렇게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시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월등하신 하나님은 해결해 주실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만이 해주실 수 있는 인간의 숙명적인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속죄 받은 우리들의 문제를 긍휼히 여기시고 연약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의 왕되심과 기이한 겸손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왕의 자녀다움과 예수님의 겸손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도 똑같으십니다.

하나님의 권한으로 우리 의지를 무자비하게 복종시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시잖아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당사자가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한 뒤에도 똑같으십니다.

지난 한주 우리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결재도 안 받고 마음껏 살다 왔잖아요?

예수님께서 주님의 권위로 우리 마음과 의지를 조종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게 좋다지만 우격다짐으로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몸에 배인 죄의 습관이 있고 세상을 사랑하는 본성이 있기에 바꾸는 데 오래 걸린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자식들 키울 때 옳다 생각하는 게 있으면 당장, 강제적으로라도 시키려고 들죠.

아무리 목적이 좋다 해도 그렇게 자란 자식들 마음엔 상처가 남습니다.

부모들은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하기에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자식들은 의외로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더디고 상처받기 쉬운 체질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한 단계씩 우리 마음을 움직이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죠.

우리 중 누가 강압에 못 이겨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주님의 가르침대로 믿고 따르는 게 더 행복하다는 것을 많이 깨달을수록 더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환호하는 군중들은 그 유월절에 절대적 힘으로 제2의 출애굽을 가져다 줄 모세와 같은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주기 위해 희생되었던 그 유월절 양으로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죄의 속죄 없이는 누구도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만이 그것을 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인간의 몸으로 제한하신 것이 얼마나 자신을 낮추신 겸손입니까?
가난한 식민지 국민으로 삼십삼년을 이 땅에서 사셨고 매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벌거벗겨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을 떠올려보면 자식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그 죽음을 대신할 수 있을까 자신하기가 힘듭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지은 죄와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는 악한 본성의 굴레를 벗겨주시기 위한 긍휼 때문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신 것입니다.

이번에 조민0 씨의 결말을 보며 정말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욕망을 따라 사는 인간의 비참함과 허망함 아닙니까?

감춰졌던 모든 것이 공개되는 순간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사는 게 죽는 것 보다 더 끔찍했겠죠.

앞으로 당해야 할 시간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속죄해 주신 것은 우리의 죄와 악한 본성이 육체의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 죽으라고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잘못되었지만 다시 돌이키고 회복 될 길을 열어주셨잖아요?

예수님이 자신을 가장 겸손하게 낮추셨기에 우리는 죽음 같은 인생에서 찬란한 빛과 영원한 행복의 삶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날 예루살렘을 향해 오시던 예수님은 서서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너도 평화의 일을 알았더라면.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하는구나.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약속의 메시야라는 것을 모른 채 주님을 거부하고 자기 죄의 길을 가는 죄인들을 여전히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을 믿고 구원을 얻은 우리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기에 너희 안에도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지신 본성의 겸손은 아니지만 성령께서 교만한 마음을 일깨우실 때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주님을 닮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면 무시당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교만하고 거만한 걸 보면 정이 떨어지는 것이니다.

베드로사도도 겸손한 성도에게 주실 축복으로 우리를 권면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말씀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가는 모두가 되도록 함께 노력하길 간곡히 권합니다.

2018년3월18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