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독언론에서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신앙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1위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설교’였습니다.
목사들만 설교가 스트레스인 줄 알았더니 성도들도 설교가 스트레스라는군요.
지난 주 살면서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을텐데 오늘 설교가 스트레스가 될까봐 부담이 되네요.
2위는 무엇이었을까요?
교인들 간의 관계였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성도들 간에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신앙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설교에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 우리 성도들 간에도 사랑을 나누는 주일예배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에 대한 윤곽이 조금씩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듣고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거세게 항의했던 일이 있었죠.
그만큼 십자가의 구원은 이해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 잘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토대로 이해되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구원의 진리는 성경이 가르쳐주시는 이치를 배워 이해하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은혜를 모두에게 충만히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예수님의 때’에 대해 강조해 오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지상생애 마지막 주일, 유월절 명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동문서답처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종종 비약과 함축으로 진리를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화법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먼저 영광을 얻을 때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헬라사람들이 찾아온 것을 보고 때가 되었다고 하셨다면 헬라인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즉, 헬라인들도 십자가의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인ㄷ 이것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당연히 알지만 그 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구원은 당연히 유대민족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민족은 저주받은 인간들이고 교제하는 것 자체를 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할 때 빌립과 안드레가 서로 의논하며 망설이는 것 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제자들조차도 구원이 이스라엘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한참 뒤 초대교회 때에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문제로 예루살렘교회가 발칵 뒤집혔지 않습니까?
반대로 우리 사회에서는 왜 남의 나라 종교를 믿냐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둘 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택하셔서 한 민족을 만드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나온 반응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앞 둔 시점에서 헬라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찾아온 것을 통해 예수님은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가 모든 민족을 구원하실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시는 것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셨지만 아무 때나 그 일을 해치우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때로 재촉하는 제자들에게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준비 된 정확한 때를 따라 움직이셨다는 것이죠.
본문 말씀은 그 ‘때’가 멀리서 헬라인들이 찾아온 것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인간 역사와 함께 움직이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시대적으로도 구속을 이루기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이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광활하게 지배하는 때입니다.
그로인해 각국에서 로마를 향하는 도로망이 거미줄처럼 닦입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또 로마제국의 지배에 있던 모든 나라들이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습니다.인구증가 그래프를 보면 이즈음의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본문에서 헬라인이 멀리 예루살렘을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은 이런 준비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헬라인이 유대인인 빌립과 대화를 나눈 것도 그때가 됐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너무 일찍 주님이 오셨다면 언어와 이동의 장벽 때문에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고 이루시는 ‘때’는 이렇게 인간의 ‘때’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굵직한 계획들이 있습니다.
그 계획들은 우리 삶에서 그 때가 준비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획은 오늘 헬라인들처럼 예수님 앞에 나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가장 적절한 때였던 것이죠.
그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여정 속에도 하나님이 기획하신 중요한 때가 요소요소마다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사건에는 주님의 때가 개입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삶이 도약하는 때가 있고, 진로가 바뀌는 때가 있고, 중요한 만남이 이뤄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로 인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때로 갑자기 마음속에 들어온 한 생각이 우리 인생을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제게도 어느 날 문득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어왔습니다.
‘교회나 개척해 볼까?’
그 생각이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잠언이 지혜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6장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일을 빨리 해결하려는 조급한 마음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성급하게 진행했다 결과가 별로 좋지 못했던 경험이 많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때에 맞추는 게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뒷 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가 느껴지지 않으면 좀 미적거리는 게 낫습니다.
신자들은 너무 급하고 과감하게 사는 게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좀 보며 충분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잘 맞춰가는 게 성도들의 지혜입니다.
예수님도 그 때를 얼마나 철저히 맞추며 사셨는지 성경 여기저기에 나타나잖아요?
36절을 보면 오늘도 이런 일이 있은 뒤 예수님이 숨으셨다고 합니다.
우리도 기다리며 인내해야 할 때, 결단해야 할 때, 신속히 순종해야 할 때를 잘 판단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잘 따라 모든 것을 인도받길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때를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체포되고, 부당한 재판을 받고, 치욕스런 십자가형으로 죽으셔야 하는데 왜 그것을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로 판단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과정에는 십자가의 때와 부활의 때가 다 포함됩니다.
때로 십자가의 죽음 같은 힘든 시기도 있지만 그 다음은 반드시 큰 영광을 예비해 놓으십니다.
십자가는 큰 수욕과 고통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특히 십자가의 때를 영광의 때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무엇을 자신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가지고 계신 신의 위엄과 권능과 존귀를 영광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전능자가 번개를 내리고 지진으로 땅을 흔들고 해일로 바다를 뒤집는 능력이 영광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일에 천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영화와 아름다움과 위엄에 가득 찬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가장 큰 영광이 아닌 것입니다.
그만큼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 같은 미천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 더 비천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 주님만이 가지신 진정한 영광일 것입니다.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와 권력이 곧 부모로서의 영광은 아닙니다.
부모로서의 영광은 자식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사랑하며 훌륭한 인격체로 키워내느냐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신의0선수의 어머니를 보십시오.
신선수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 절망에서 아들을 일으켜 세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전에 인터뷰하는 어머니의 밝은 얼굴을 보고 저는 마음이 더 짠해졌습니다.
어머니가 낙담한 모습을 보이면 아들이 힘을 잃을까봐 그 앞에서 얼마나 자신을 애써 추스려 왔는지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부모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가난하던 시절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대여섯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워낸 초라한 부모도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실 수 있는지 극치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28절에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의 신체와 감정을 가진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두려워하며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십자가형엔 단지 극강의 육체적 고통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랑하는 자들의 배신, 진실이 매도되는 슬픔, 가장 사랑하신 하나님아버지가 원수 같이 진노를 쏟아 부으시는 아픔.
정말 피하고 싶은 십자가 아니셨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순종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길 기도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죠.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이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항상 위대하고 항상 영광스럽다 이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이 영광도 예수님이 생각하신 그 영광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과 똑같은 본질의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이 자신을 이미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것은 창조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갓 피조물에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주시고,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신 것,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인 인간에 나눠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유일한 독생자 예수님을 범죄 한 인간들의 대속물로 내어 주셔서 다시 그 지위와 행복을 되찾게 해주시는 그 희생적인 사랑으로 또 다시 그 영광스러움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죄인들을 위해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이 이 땅에서 모든 것을 희생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은 반드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당시 예수님을 해방을 가져다 줄 메시야로 환영했던 사람들의 기대와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밀이 땅에 묻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예수님이 반드시 죽으셔야 온 인류의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을 땅에 심으면 몇 개의 밀알이 나올 것 같습니까?
제가 궁금해서 좀 찾아 보았습니다.
밀 한 알에서 서너 개의 이삭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이삭에서는 40개 까지 밀알이 열립니다.
그러니까 밀알 한 개에서 백 개에서 이백 개까지 낱알이 열린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옥토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진 말씀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신 것은 실제 농사에서 비유한 것입니다.
작은 밀알 하나가 백 개 이상의 낱알이 되고 그 낱알들이 다시 또 심겨진다면 밀알 하나를 통해 기하학적인 열매가 맺히는 것이죠.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렇게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밀알의 죽음이십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요한이 이 놀라운 구원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죠.
요한계시록 7장 9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그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처럼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죠.
왜 예수님은 꼭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죽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실 방법은 없으셨을까요?
십자가의 속죄는 우리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정교하게 가르치는 영적인 원리들을 조합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속죄의 의미를 어느 정도 나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원리들이 우리 머리 속에 어느 정도는 정리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간단히 말씀드릴 때 이런 내용들이 잘 이해되게 머리 속에 들어와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십자가 이전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타락한 죄인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피조물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죄악의 도성을 짓고 삽니다.
이 세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그런 죄악의 도성입니다.
죄인의 특성은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돌이키려 해도 끝까지 달아납니다.
그 관계를 성경은 수 천 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보여줍니다.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잖아요?
신사적이고, 성격도 좋고, 착하기까지 한데 절대로 하나님은 안 믿겠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똑똑하고 뛰어난 재능을 하나님 반박하기 위해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창조주께 순복하지 않고 회개치 않는 모든 죄에 대해 책임을 묻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과 죄를 정확히 찾아 심판하십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과 혜택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유배시킵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참혹한 결말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죄인을 건져낼 때 보석금을 내듯 하나님은 스스로 속죄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성경은 아담이 범죄 한 시점부터 끊임없이 속죄를 통한 구원의 원리를 가르쳐 왔습니다.
그 방법은 죄없는 대속물이 피를 흘려 죽음으로써 죄인의 죄를 속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9장22절 말씀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죄, 피흘림, 용서가 속죄의 공식입니다.
인간의 죄를 속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흘리는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느 인간이든 죄인이기에 남의 죄를 속죄해 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속죄해 주신 것입니다.
이 원리를 히브리서2장14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셔서 죽음으로써...모든 자를 사마에서 놓아주려 하심이라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다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반드시 피흘려 죽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속죄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적용되냐의 문제입니다.
이 속죄는 자동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 속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이 믿음이 애매모호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25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믿음이란 게 그냥 ‘내가 예수님을 믿어’라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생명은 호흡이 멈추면 끝나는 육체의 목숨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태어난 이 목숨이 그토록 좋아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냥 보통 자연인들이 좋아하는 삶을 말합니다.
끝까지 이 생명만을 부여잡고 살면 영생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죄라는 것을 알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가 좋아하고 당연시 하던 것들은 다 색안경을 끼고 보아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과거에 좋아하던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관한 삶이라고 주님은 엄중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씩은 다 옛 습관을 버리고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성향대로 흘러가지 않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느 정도씩은 방탕하게 살려고 합니다.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걸 신앙의 기쁨보다 좋아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단정히 다잡고 경건으로 자신을 지키려면 옛것이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해야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과거의 습관으로 자꾸 돌아가는 사람들을 비유해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합니다.
과거가 결코 더 아름답지 않고, 본성대로 사는 게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을 보며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봐야 합니다.
현세의 성공을 위해 안달하는 마음도, 나를 과시하려는 마음도, 분노와 미움도, 다 다스려야 할 옛 목숨입니다.
이렇게 육체에 속했던 생명을 미워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매순간 결심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이 믿음이고 그런 노력과 인식으로 살아갈 때 목숨을 영원히 보존하게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만 확실한 보상을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는 주님이 계신 곳에 반드시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시죠.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다 지칠 때 마다 주님 계신 하늘을 소망하고 우리를 위해 준비된 영광스런 기업을 생각하고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를 때 하나님도 우리를 귀히 여기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고 귀하게 되려고 애쓴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미래가 두렵게 느껴진다면 예수님을 더욱 바짝 따라 가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히 여기시면 우리 심령엔 담대함과 확신과 기쁨이 옵니다.
남이 뭐라 하든 두려울 것 없이 담대히 행동하게 됩니다.
결국 산처럼 막혀 있는 환경도 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봄이 찾아오니 삶이 참 행복하고 좋다는 생각이 더 듭니다.
밝은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 아래 우리가 걸을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합니다.
이렇게 즐겁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이미 영생 안에서 사는 것이니 얼마나 더 좋습니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좋을 때는 이 행복이 사라질까봐 두렵고, 나쁠 땐 다시는 좋은 날이 없을 것 같아 절망합니다.
그러니 매일이 힘들 수밖에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복된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 모든 복되고 보람 있는 때를 준비하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밀알의 삶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매일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라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과 순종을 우리가 배우며 따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항상 영광스럽게 높여 주실 것입니다.
2018년3월18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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