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3장1절-17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남수연 2018. 3. 25. 02:20

벌써 17년이 지났습니다.

미국에서 911테러로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던 참혹한 일이 있었죠.

그 때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날 구조대원과 시민들은 난생 처음 보는 가공할 테러의 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무너진 흙더미를 파헤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잿더미 속에서 잘라진 사람 손 하나가 나왔습니다.

참혹한 시신이 너무 많았기에 손 하나 정도는 지나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구조대원이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있는 그 손을 보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까지 저렇게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굳어 있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 보았습니다.

열려진 그 손 안에는 아주 작은 어린 아이의 손이 들어있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결코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사랑하는 자식의 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성경은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 마지막 저녁식사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새벽에 체포되고 로마법정에 넘겨져 아침에 십자가형을 받고 죽으십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그 참혹한 십자가의 길로 이끌었을까요?
요한은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날까지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요한은 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예수님의 그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깊이 만나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2절을 보니 마귀가 벌써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하죠.

마귀가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지는 미스테리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서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면 마귀는 인질을 놓치고 파멸하는 것이거든요.

마귀는 죄지은 인간을 방패막이로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십자가의 속죄를 마귀가 앞장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잖아요?

십자가의 속죄의 비밀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영적 피조물들에게도 감춰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112절에 보면 예수님의 고난의 신비를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철저히 인봉되어 완수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없이는 그 비밀을 지금도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믿잖아요?

오늘 우리가 읽은 교독문이 이사야서53장인데 누가 봐도 하나님의 종인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 눈엔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받는 종은 이사야선지자 자신이다, 혹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렇게 본다는 것이죠.

마귀는 그 비밀을 알 수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갈팡질팡하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가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여서 하늘로 돌려보내면 세상을 다시 장악할 수가 있다는 판단이었겠죠.

본문에서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다는 것을 보면 마귀가 사람의 생각 속에 자기의 생각을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떠오르는 게 다 내 생각은 아닌 것이죠.

그런데 마귀가 생각을 넣을 땐 사람의 약점이 있는 부분과 관계된 생각을 넣습니다.

가룟유다의 경우는 돈이 약점이었습니다.

앞에서 요한사도는 유다가 회계를 맡고 있었는데 그 돈에 손을 댔었다 폭로합니다.

돈 문제에 털어서 먼지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어떤 취약한 부분이건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다보면 죄가 인격이 되 버립니다.

결국 마귀가 그 죄지을 생각을 줄 때 저항하지 않고 끌려가는 것이죠.

그렇게 마귀는 수많은 사람을 불행과 파멸로 데려갔습니다.

며칠 전 전직 대통령 한사람이 돈에 끌려 다니다 구치소에 들어갔습니다.

자기가 돈의 주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돈의 신이 주인이었던 것이죠.

사람이 자기의 약한 부분을 잘 인식하고 이겨나가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문제로 큰 수치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하니 그동안 기대하고 따랐던 수고에 대해 억울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예수님을 잡아들이려는 대제사장에게 돈을 받고 먼저 주님을 넘겨주려고 했던 것이죠.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주님이 잡혀 십자가형을 받을 때 제자들이 받을 정신적 충격은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다의 배신을 제자들에게 미리 예고하시는 것도 그 충격에 대비시키시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요한사도의 진술을 보면 예수님은 정말 제자들을 위해 애들 쓰고 최선을 다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순간까지 오직 제자들을 섬기고, 가르치고, 하나님께 부탁드리고, 위로하시는 모습이 본문 이후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가장 큰 심령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분은 내일 십자가를 지셔야 할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이 작은 걱정거리만 있어도 남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 제자들을 걱정하셨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떠나는 부모같이 몇 번이고 안심시키며 제자들을 다독이시는 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도 헤어지기 전엔 아쉬움을 달래려고 모여서 밥을 먹잖아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식사할 겨를도 없었던 제자들과 오붓하게 가진 식사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내일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말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삼년 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식사를 멈추시고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부으시며 제자들의 발을 한명 씩 씻기기 시작하십니다.

요즘은 이 세족식이 많이 알려져 그렇게 천한 행동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과 섬김이라는 아름다운 행동으로 보이죠.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덥고 흙먼지가 많은 땅을 오픈 된 신발을 신고 다니던 거기 사람들은 늘 발이 더러웠습니다.

당연히 집에 들어가자마자 발을 씻었겠죠.

 

만일 누군가의 식사에 초대받았다면 제일 먼저 그 집의 노예가 손님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우리 어릴 때도 온종일 골목에서 놀다 저녁 먹으로 들어가면 어머니들이 꼭 발 씻고 들어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마당 한 쪽에 있는 수돗가에 가서 물 한바가지를 대충 끼얹고 밥상으로 달려들었죠.

이날 예수님의 저녁식탁 전에 아무도 발을 씻지 못했습니다.

때 묻은 더러운 발로 식사를 하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물로 씻고 꼼꼼하게 수건으로 닦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기분이 좋았을까요?

아무 말도 못한 채 예수님께 발을 맡겼지만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말씀도 그렇고 모든 게 다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왠지 진작 주님 발을 씻겨 드리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었겠죠.

모두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발을 씻던 중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심한 거부감을 숨기지 못하고 발씻기를 거절합니다.

베드로의 자존심이 예수님께 발을 맡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해야 마땅한 일을 누가 대신하면 자존심 상하는 게 있잖아요?

차라리 발 씻을 물을 떠오라 하고 주님의 발을 씻어 달라고 하시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르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이 발 씻어 주시는 이유를 모르는 베드로는 더 완강히 거부합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원어에 가깝게 하자면 내 발을 영원히 씻지 못하시리이다입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기업을 함께 갖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오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발의 때를 씻어주시는 것을 통해 십자가에서 하실 일이 우리의 죄를 씻고 구원하시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히 봉사나 겸손을 드러내시는 게 아닙니다.

스가랴서131절에 이미 예언한 대로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베드로는 예수님께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주님이 죽으시는 이유도 씻으시는 이유도 이해가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의 원리와 해석을 들어도 여전히 이해가 안되는 분들이 있으시잖아요?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모르시면 이후에는 알게 되실 것입니다.

이 날 마지막 저녁 식탁에서 있었던 일을 마태와 마가와 누가도 기록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세 복음서에는 이 날 식탁에서 있었던 가장 기억에 남을 일로 성만찬을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들고 나누어 주시며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대로 우리가 성만찬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성만찬 대신 그날 있었던 세족식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가장 마지막에 씌어졌습니다.

이미 다른 복음서를 알고 있는 사도요한은 성만찬 대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의식인 세족식의 기사를 기록한 것이죠.

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이해되기 쉽게 보여주신 의식입니다.

빵을 떼어서 제자들의 입에 넣어주고, 포도주 잔을 마시게 하심으로 십자가의 속죄가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임을 알려 주시는 것이죠.

물을 붓고 발의 때를 씻어주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배로운 피는 마치 목욕한 것처럼 단번에 우리 모든 죄를 씻으시지만 매일 발을 씻듯 매일 죄로 더러워진 영혼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의 죄를 씻으심을 믿고 모두 십자가 아래로 나가서 깨끗하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리고 발을 씻겨주신 것이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하십니다.

14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하신 대로 따라 하도록 본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죄를 씻고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다고 그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씻겨주신 그 마음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주님은 씻지 못한 발로 거북하게 밥을 먹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정말 좀 시원하게 씻어주고 싶으신 마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만 씻어주고 돌보는 게 아니고 우리의 발을 친히 만지시고, 육체의 모든 것을 돌보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만 가지고 살 수 없잖아요?

육체로 사셨던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육체와 정신을 돌보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의식주를 돌보시고 채워주십니다.

그것만 가지고 안되잖아요?

사람은 살아가는 데 사랑과 용납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내게 호의를 갖고 좋아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용기가 나는 일입니까?

누군가 내 고충을 알아주고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줘도 위로가 되잖아요?

예수님이 그때처럼 직접 우리 발을 만지고 씻겨주지 못하시는 지금 그 일을 성도들이 서로 해주라는 것입니다.

원래 성도들 간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대신할만한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이 현대 교회에선 턱없이 약화되어 버린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이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는 것은 우리 발이 늘 더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겐 서로에게 용서받고 이해받아야 할 약함이 항상 있다는 것이죠.

아무도 흠이 없고 깨끗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져 잘 부서지고 늘 흙먼지가 날립니다.

성경은 우리의 체질이 진토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잘못을 너그럽게 봐주고 서로의 흙의 몸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도 편하고 행복하길 주님은 바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중한 병이나 삶의 짐이나 인생의 어려움들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받아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짐은 벗어나도록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십자가는 오히려 자발적으로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시지 않으십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도 십자가에 대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다 맡기셨을 뿐이지 강제로 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원하는 사람만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일찍부터 피곤한 몸을 일으켜 충성의 십자가를 챙겨서 어깨에 맨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스스로 수고의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하고 누군가를 낮아짐으로 섬기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씻기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알게 될 때 성도들은 스스로 십자가를 찾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렇게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모두를 주님께서 복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일이고 금요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금요일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 더 알고 주님을 따르길 우리는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았다지만 아직 이해도 안되고 마음에 와 닿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은 마음 밭에 심겨져 뿌리를 내리고 싹을 키웁니다.

먹고 자고 일하며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믿음의 나무가 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리와 예수님의 사랑이 모르는 사이에 인격에 스며들고 의지와 감정도 점점 달라져 갈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베드로를 씻기시며 이미 목욕한 제자들은 온 몸이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구원받고 깨끗해졌다고 하는 베드로도 우리처럼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이유를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붙잡히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조금씩 더 알아가며 조금씩 더 좋아하며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 곁에 얼씬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 가룟유다처럼 돈을 찾아, 세상의 쾌락과 영광을 좇아 떠났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은 주님이 먼저 하신 사랑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실 것입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과 은혜가 우리 심령에 또 조금씩 더 부어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번 주 고난주간에, 이어지는 요한복음을 곱씹어 읽으시며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새겨주시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 영혼의 중심에 굳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2018년3월25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