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6장 (오병이어의 기적)

남수연 2019. 2. 11. 17:48

https://www.youtube.com/watch?v=186NP51nD5Q

<2019년2월10일 설교영상>


요한복음61-15

 

요즘 사람들이 간헐적 단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루 중 8시간은 보통으로 먹고 16시간은 공복상태를 유지하는 다이어트 방법입니다.

그 정도 공복상태가 되어야 저장해 놓았던 지방이 에너지원으로 사용돼서 살이 빠진다고 합니다.

저도 요즘 나잇살이 좀 늘어가서 간헐적 단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 쪽에선 이렇게 다이어트 열풍이 불고 있는데, 한 쪽에선 여전히 맛집, 먹방 프로그램이 또 인기입니다.

먹으려는 와 빼려는 내가 갈등하는 현대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죠.

냉장고만 열어도, 고개만 돌려도 먹을 것이 넘쳐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세대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고 먹을 입을 던다고 자식을 남의 집 수양딸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엔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오늘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큰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음식이래야 보리떡과 소금 간을 해서 말린 생선이 전부였지만 배를 곯던 사람들에겐 감사하고 만족한 식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음식을 어떻게 준비하셨습니까?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먹이셨습니다.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이 오병이어 기적 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기적을 기록한 요한은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썼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말씀을 오늘 다 깨닫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사복음서가 이 기사를 조금씩 달리 보충해서 기록하고 있기에 전체를 아울러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 표적은 인간의 결핍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음식 먹을 겨를도 없는 사역 중에 제자들과 잠시 쉬기 위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한적한 들판으로 가시게 됩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 일행을 알아 본 사람들이 사방 마을에서 달려가 예수님보다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쉬지를 못하시게 된 것이죠.

사람들이 이렇게 일상을 뒤로 미루고 하는 일들은 분명 일상보다는 다급하거나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던 로마식민 치하의 가난한 서민들이었습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내일 먹을 음식을 사지 못할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곳에 가난한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습니다.

삼일 동안 이나 집에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일도 있습니다.

왜 이들은 이렇게 일상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좇아 다니고 있을까요?부족함을 채우려는 기대감 때문이었겠죠.

희망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이 혹시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을 것입니다.

힘들여 번 돈을 세금으로 다 떼 가는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해 줄 사람이길 기대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소문을 듣고 병을 좀 고쳐보려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산다는 것이 이게 다 인가, 저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쳐준다던데.’하나 같이 이런저런 결핍을 채우려고 예수님 앞에 몰려 온 것이죠.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입니다.

간혹 호기심 반, 지인의 간청 반으로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몇 번 나오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발길을 돌립니다.

교회는 물론 특별한 것을 주지만 그걸 알기까지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도 우리가 오래 교회를 나옴으로써 신앙의 실체를 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간절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는 그 결핍, 목마름, 간절함은 복입니다.

반드시 그로 인해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각자의 기대와 갈망을 안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바라보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때 예수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주님 앞으로 나온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불쌍하잖아요?

저는 기도할 때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면 그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남에게 불쌍히 보이고, 동정을 받는 다면 당연히 자존심이 상하죠.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다윗은 시편 10313절에서 이런 믿음을 전합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부모 눈엔 자식들이 언제나 측은합니다.

잘 안 될 때 측은한 건 당연하겠지만, 잘 될 때도 왠지 측은해 보이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자식을 향한 부모 마음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 마음을 깊이 공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 앞에 몰려온 사람들을 위해 병도 고쳐주시고, 말씀도 가르쳐 주셨다고 마태, 마가복음은 기록했습니다.

지난 한 주도 믿음을 위해 작정한 걸 하나도 못 지키고 쫒기듯 살다 나오셨죠?그래도 하나님께 기대할 게 있다 믿고 나온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도 저들에게처럼 꼭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결핍을 불쌍히 여기실 뿐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걸 가르치고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말해 줍니다.

집회는 마을 밖 빈들에서 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녁을 굶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들이 동네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자고 요청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잖아도 해결되지 않은 짐을 지고 나온 사람들, 거기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도시락도 없습니다.

인생은 큰 문제들 틈에 작은 문제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모인 사람들은 오늘 저녁도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굶주림이란 결핍을 만나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이미 이들을 먹여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혼자 해결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끌어 들이십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심지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하셨습니다.

삶이 더 힘든 건 우리가 타인의 고통도 져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가족, 이웃, 남들의 어려움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잖아요?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내 문제를 예수님 자신의 문제로 여겨주시는 반면 우리도 주님이 하시는 사역에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다 하나님나라와 얽혀 있습니다.

우리를 자의든 타의든 영광스런 하나님 경영에 참여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크게는 우리의 직업과 진로를 결정하는 것,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섬기는 일들이 내 삶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영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사건에 방관자가 아니라 당사자로 끌어 들이십니다.

먼저 제자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5,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것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냐고 의논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논하고 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답을 주실 뿐입니다.

지금도 이미 답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이 내신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문제를 던지셨다면 그 안에는 답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갖고 계신 답이 보이지 않기에 현실적인 계산만 하게 됩니다.

빌립이 이렇게 계산을 내 놓습니다.

7,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날 모인 사람 수가 남자만 오천명이라고 하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최소 만 명이 넘어가겠죠.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따져 보면 2천원짜리 백설기 한 덩이 씩 나눠준다 해도 이천만원 정도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볼 때 이 많은 사람들에게 떡을 먹이시려는 예수님이 이상한 것이죠.

빌립은 문제 앞에서 현실의 수만을 계산하는 전형적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갑을 먼저 열어 보죠.

빌립은 이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불치병을 가볍게 고치시고,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앞에 계시건만 계산 속에 예수님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은 곁에 예수님을 모시고도 그러니 우리들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빌립과 같은 방법으론 문제에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 불가능한 계산에 빠진 빌립과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해답의 실마리를 보여주십니다.

8절에 보면 안드레가 한 아이에게서 받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 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안드레가 스스로 도시락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물으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 하시니

빌립은 불가능한 것만 계산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능한 것으로 생각을 바꾸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조건 안된다고만 하지말고, 지금 무엇이 있는지, 지금 현재 상황은 어떤지 내놔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찾아 온 음식은 겨우 한 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안드레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걸 누구 코에 붙이겠냐는 것이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은 만 명 앞에 도시락 한 개처럼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백세 노후를 생각하면 가진 돈도, 건강도, 만 명 앞에 도시락 일인 분 정도 같을까요?

청년들도 어느 정도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결혼도 출산도 엄두를 못 낸다니 얼마나 딱합니까?

꿈은 있지만 실력은 부족하고, 장래의 계획은 있지만 실행할 여력이 없는 현실이 보리떡처럼 초라해 보이기만 한 것이죠.

남들 앞에 이런 내 형편을 솔직하게 내 놓기가 다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제자들이 들고 온 보리떡 다섯 개가 만 명 앞에 얼마나 민망한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걸 갖고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물론 합리적으로 살아가게 인도하십니다.

빌립에게 이천만원이 있었으면 당연히 그걸로 굶주린 사람들의 식탁을 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없다할지라도 하나님은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지갑을 열어보고 현실을 계산하고 한숨을 쉬지만 가진 조건대로 일이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지금 형편과 조건을 뛰어 넘어 이뤄지는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만으로 살아오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새해부터 우리는 계속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것을 되새기고 또 다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 앞에서 합리적인 계산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걸로는 당연히 해결이 안되죠.

해결 될 것 같으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네게 있는 게 무엇인지 내놔보라고 하실 것입니다.

지금 있는 작은 것들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은 믿음, 작은 물질, 작은 재능, 작은 건강, 작은 징조, 이런 걸 긍정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이게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요, 일단 구하고 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지만 구하면서, 의논하면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교제도 다 의논하고 공감을 구하는 것이잖아요?

요즘 젊은 세대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기는 합니다.

카페에서 둘러앉은 젊은이들 보면 제각기 자기 휴대폰만 보고 있더군요.

저는 그걸 볼 때마다 대체 왜 만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논하고 공감을 구하는 게 우리의 교제이듯이 하나님과의 교제도 구하며 하는 것입니다.

저의 기도도 맨 날 구하는 것입니다.

전 정말 달라는 게 많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 현실을 그대로 내놓고 해답을 구할 때마다 예수님은 반드시 주님의 방식으로 일을 움직여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삶의 문제와 궁극의 문제를 둘 다 해결해 주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당장 굶주려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예수님은 해결해 주십니다.

이 작은 도시락으로 만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하시죠.

기적은 우리가 일으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걸 해내려고 하면 힘만 들고 좌절만 옵니다.

하나님이 하실 부분은 맡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을 나누어 식사하기 좋게 모여 앉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수런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끼니를 해결할 음식을 줄거라고 누가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어디 집회에 가서 먹을 것 나눠주면 좋잖아요?

예수님은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떼어서 나눠주시고, 또 나눠주시고, 그 손에서 끝없이 떡이 떼어져 나옵니다.

물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허기에 지친 사람들이 떡과 생선을 푸짐하게 먹는 것이 좋았겠죠.

그러나 이 신비한 기적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더 들뜨고 흥분했을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이런 말도 있습니다.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앉고 보니 피크닉하기에 정말 좋은 보드라운 잔디가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곤고하고 지친 사람들을 편히 먹이기 위해 최고의 조건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죠.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세심하게 대우하십니다.

가시방석이 아니라 푹신한데 우리를 앉히시는 걸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 광경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에겐 풍성함’, ‘만족함이란 말로는 존재하지만 사실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재벌이라고 가진 것에 만족하겠습니까?

있는 게 충분히 풍성하고 만족스럽다면 왜 그렇게 탈세를 하고, 하청업체들을 착취하며 더 수익을 내려고 안달을 하겠습니까?돈만 그런게 아니죠.

연인끼리 왜 다투고, 가족들이 왜 갈등을 일으킵니까?

받고 있는 사랑이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다 자기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기에 다투고 싸우는 것이죠.

공부도, 실력도, 재능도 하면 할수록 정말 만족이란 게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 한 사람에게 참 풍성하다, 만족스럽다그런 삶은 없습니다.

우리 어린이들, 청소년, 청장년들, 노년성도까지 모두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인생을 꼭 체험하며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저도 청년시절에 예수님을 믿었는데, 돌이켜 보면 장년에 이르기 까지 정말 점점 더 많은 축복을 꾸준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 주시는 하나님이 더 친숙해요.

물론 지금 같은 은퇴 후엔 언제까지 재산이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 뿐 아니라 건강이나 사회생활도 다 축소되어 갑니다.

그러나 믿음과 만족과 평안과 여유는 나이가 들어도 점점 더 부요해집니다.

이렇게 평생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삶의 모든 결핍을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점점 더 풍성히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는 단지 실용적인 해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사건 속에는 다 영적인 뜻도 들어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에도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문제를 놓고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기적의 영적인 의미를 알려주는 단서는 4절에 있습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이 표적의 영적인 이유를 뒷받침해줄 완전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유월절에 맞춰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죠.

그동안도 이런 유사한 상황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떡을 나누시는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애굽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던 날인 유월절 절기를 지킵니다.

유월절이 되면 자연히 다시한번 모세같은 구원자를 보내셔서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걸 대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실제로 로마에 대한 폭동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모세는 신명기에서 후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떡을 만들어 내는 기적을 보고 모세의 말을 기억한 것입니다.

본문14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지금 예수님을 바로 그 선지자가 아니냐고 술렁이는 것입니다.

모세와 출애굽한 뒤에 광야에서 기적의 만나를 먹었던 것과도 딱 매치되잖아요?

그래서 15절을 보면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사람이 원하는 게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이 땅의 여러 가지 곤궁과 억압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가 아닙니다.

주를 믿는 자들에게 사망과 죄의 포로에서 풀어주시고 영원한 자유민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 기적 뒤에 예수님은 그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십니다.

그 설명이 6장 마지막까지 길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죠.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너희들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도 또 배고프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무언가에 목마르십니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으시면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는 정말 근원적인 갈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끝난 뒤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던 군중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원한 건 현세의 떡이지 생명의 떡이 아니었던 것이죠.

심지어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오늘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단지 현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스스로 생명이 떡이 되어 자신을 우리에게 떼어주심으로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다 무언가에 목마르고 무언가 결핍되어 예수님 앞으로 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걸 구하고 얻기 위해 계속 예수님을 찾고 따르는 가운데 반드시 주님이 그 이상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으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시험과 시련은 얼마나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때로 고난이 축복이란 말이 미워집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라면 어떤 문제에든 반드시 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떻든, 지금 문제를 헤쳐가기엔 내게 있는 상황들이 어떻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아버지 앞으로 나가 답을 구하시고 풍성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매일 복되게 체험하며 사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