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종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마다 함께 하시고 예배를 통해 큰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감염병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고 세계 각국도 이 병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조속히 질병이 종식되도록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또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성도님들의 건강과 직장과 사업체에 피해가 없도록 안전하게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제자들과의 고별을 앞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말씀입니다.
그날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정말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사도는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회상합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이 얼마나 두고 가시는 이 제자들을 사랑하셨는지 알 것 같죠.
그 마음이 동일하게 지금 주님의 사람인 우리를 향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열매를 맺는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입니다.
누구나 삶의 많은 열매를 원하기에 더없이 소중한 말씀이죠.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더욱 풍성한 영과 육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참포도나무에, 성도들을 가지에, 하나님을 농부에 비유해서 열매 맺는 삶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 머릿속이 하얗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잘 기억하도록 포도원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좌절하고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탐스럽고 풍성한 과실을 가득 달게 될 거라는 말씀이죠.
우리에게 열매가 없다고 생각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땀흘려 일하는 농부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끝까지 일하실 것입니다.
농부의 목적은 심은 나무에서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름답고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맺기를 꿈꾸시며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자식을 두었는데, 아무 것도 돌보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자녀 된 우리가 귀한 열매를 맺도록 우리의 삶을 경작하십니다.
절대로 망하게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참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면 됩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기에 거기 붙어 있는 성도들은 반드시 주님을 닮은 포도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신령한 열매 뿐 아니라 성도들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열매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어떤 가지는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농부의 근심입니다.
에스겔15장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십니다.
포도나무가 나은 것이 무어냐?
포도나무로 가구를 만들겠냐, 약재로 쓰겠냐 그런 말씀입니다.
오직 열매를 얻는 것이 목적인 것이죠.
농부는 근심스럽게 가지를 살펴보다 결국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잘라냅니다.
2절에 있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농부들이 포도 농사를 지을 때 수시로 하는 일은 열매가 잘 달리도록 곁가지를 잘라주는 것입니다.
포도농사는 시어머니 비위 맞추기 보다 더 어렵다고 농부들은 말합니다.
주인은 매일 가지들을 살펴보고 어느 것을 잘라내야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병든 게 눈에 보이면 이미 되살리기엔 늦는다고 합니다.
농부는 포도나무의 가지마다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가장 적절한 때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게 되는 두려운 일은 어느날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 보이지 않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방금 가룟유다가 방금 예수님께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게 복입니다.
또 종말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온 참 가지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줄 알았는데 주님과 다른 열매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엉뚱한 열매를 달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불법을 행한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고 엄중히 명령하십니다.
지금 물의를 빚고 있는 신천지처럼 겉으로 예수교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상 교주에게 붙어있는 사람들, 이단들의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이 포도나무 비유는 전지가위를 들고 못된 가지를 잘라버리시는 농부하나님의 심판이 포함된 것이죠.
주님은 곧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겠지만 십자가는 구원 뿐 아니라 거부하는 자에는 그들의 죄를 속죄 받을 기회를 영원히 놓치는 심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내게 주님을 닮은 열매가 있는지를 살피며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잘 붙어있는 참 가지는 주인이 원하는 대로 참포도나무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무에도 하나님은 가위질을 하십니다.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지금 열매를 잘 맺고 있는 가지라 해도 그냥 두면 나중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가지가 깨끗하게 되는 지를 알려주시죠.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열매 맺는 깨끗한 가지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멀어져 산다면 잎사귀만 웃자라게 됩니다.
농부는 그럴 때 열매를 얻기 위해 웃자란 잎사귀를 털어내고 잔가지를 쳐냅니다.
농부의 가위질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다루실 때 고통스럽지만 더 나은 열매를 위해서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이 잘 안되고, 예기치 못하게 병이 찾아왔을 때도 ‘그래, 고난이 유익이지’ 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코로나19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방으로 확산되는 이 감염병 앞에서 자만했던 우리 국민들 마음이 낮아져야 됩니다.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잊고 너무 높은 데 올라가들 있잖아요?
이제 세계 각국이 점점 우리 국민들을 전염병 보듯 합니다.많은 나라들이 우리를 향해 빗장을 걸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가난한 나라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아 걸고 차별했던 것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것 중 하나가 남과 비교해서 차별하고 무시하며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무시당하고 환영받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수치심과 상처를 느껴보고 우리 국민이 다시 낮은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리라 믿습니다.
또 한국교회를 볼 때 얼마나 화려하고 부요합니까?
대기업 못지않게 성공한 교회가 많잖아요?외적인 성장과 많은 재물을 갖고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따라 간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렇기에 한국교회는 어느덧 선민의식과 받은 축복에 도취되어 주님의 근심이 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이 상황이 왜 인지를 잘 깨닫고 교회가 주님께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정치인들 뿐 아니라 국민들끼리, 성도 간에, 가족 간에 너무 헐뜯고 다투는 그동안의 모습도 하나님 보시기에 탐탁치 않은 것입니다.
호세아서4장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죠.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다툼이 있는 곳, 서로 탓하고 미워하는 곳에 주님은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가족들끼리도 아끼고 사랑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미워하고 냉냉하게 대하면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가정에 힘든 문제가 있다 해도 가족끼리 머리를 맞대고 똘똘 뭉쳐서 헤쳐 나가는 걸 보시면 하나님도 축복해 주십니다.
저는 또 이번 코로나 사태로 신천지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면서 이탈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리라고도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에서 자식을 신천지에 뺏기고 피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이번 코로나 감염병을 통해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각자의 삶에서 상한 부분을 도려내고 무성하게 웃자란 잎사귀들을 털어 버린다면 앞날에 풍성하고 복된 열매를 허락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을 가르치시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열매들을 풍성히 맺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열매 없는 가지들의 운명을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잘 맺기 위해서 주님은 뒤로 가며 몇 가지 조건을 점진적으로 제시하십니다.
먼저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거하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내일이면 제자들을 떠나가신다면서 계속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떠나갈 사람이면 관계를 정리하고 이별을 고해야죠.
이젠 내게 의존하지 말고 그동안 가르쳐 준대로 강하게 살라고 하셨어야죠.
그런데 예수님의 유언은 정 반대로 너희는 내 안에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진실이고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사람이 만들어 내는 열매의 실상을 로마서에서 바울사도를 통해 말씀하셨죠.
너희가 과거에 예수님 모르던 때 행하던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 아니냐.
예수님을 모르던 그 때, 우리에게 주렁주렁 달려있던 열매들이 무엇이었습니까?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예수님 밖에서 맺는 열매들은 하나님도, 타인도, 심지어 나 자신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좋은 열매가 풍성히 달린 삶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일까요?1)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함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하루를 살 때도 저는 그런 것을 느낍니다.
어쩌다 모든 게 만족스러운 시간이 있잖아요?건강의 상태도 좋고, 마음도 만족스럽고, 당장 큰 염려도 없고, 모든 게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 때입니다.
아, 이 행복감을 계속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그 행복이 얼마 지속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가만히 두면 서서히 평안이 흔들립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시간이 갈수록 저절로 불편한 상태로 변하고 행복감은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오며 점점 부정적인 기분으로 바뀝니다.
저만 그런가요?그래서 저는 아, 내가 예수님을 의식하고 내 생각을 주님께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떤 것을 얻어도 만족하지 못하겠구나라는 걸 새록새록 알아갑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상태에서만 어떤 행복이든 완전함을 느끼는 것이죠.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좋은 열매라 해도 그 자체에 마음을 뺏기고 그 자체에서 행복과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머잖아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불안하고 걱정되는 상황이라 해도 예수님을 생각하며 주님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하면 서서히 나쁜 생각들이 사라지고 마음에 안심이 됩니다.
부정적인 기분들에 소망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만족도 행복도 주님 생각 없이는 온전히 누릴 수가 없구나’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게 머물고 내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연합되어 살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합니다.
또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리고 10절을 보면 너희가 내 말을 지킴으로 내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죠.
부모님의 한마디 유언을 평생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추상적이고 신비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유언을 지키는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쓴다면 분명히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무언가를 선택하며 삽니다.
사람이 뭔가를 선택해 행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본능의 욕구가 나섭니다.
그 다음은 세속적인 판단과 경험이 재빨리 뒤를 따릅니다.
이게 거의 빛의 속도로 나오죠.
그러나 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선택하라 하는지를 떠올려 맨 앞에 세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할 자세로 늘 시동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감정보다는 의지에 가깝습니다.
물론 내 의지로만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끄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가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역사를 우리 생각과 뚜렷하게 구별해 알 수는 없습니다.
가룟유다의 겨우 성경은 사탄이 예수님을 팔아먹을 생각을 마음에 넣어 주었다고 밝힙니다.
유다는 그것이 자기 미래를 위한 자기 생각인지 알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생각도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소원 같지만 우리를 예수님 안에 거하도록 성경의 진리로 감화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한 생각은 우리 본성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 말씀 안에 거해야만 하고 성령께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평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도록 땅에 오셔서 참포도나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붙어있는 가지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이 되었습니다.
살아가며 절절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5절의 말씀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내 안에서는 너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성령님의 에너지와 활력으로 충만케 됩니다.
그 힘으로 역경 속에도 평안의 열매를 맺고 인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순간만 우리는 강해지고 완전해 집니다.
그렇게 조금씩 더 예수님을 닮은 아름다운 열매를 가득 달고 사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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