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5장12절-16절 (내 계명은 이것이니라 )

남수연 2020. 3. 8. 21:28

오늘 두 번째 영상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여전히 우리 국민들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죠.

살면서 이런 질병 재난은 처음 만나는 것 같습니다.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가는 나날이지만 그런 중에도 피어나는 미담을 들을 때마다 잠시 마음이 훈훈해 지기도 하더군요.

이 질병이 단지 고통과 손해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잊고 있었던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일깨웠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지난 주 참포도나무 비유로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 데 주님 안에 거하는 방법은 계명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 설교에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단 하나의 계명을 오늘 본문에서 일러 주십니다.

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바로 이 계명을 지켜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야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전혀 새롭지 않은 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실은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동안 늘 들어와서 전혀 새롭지 않은 이 계명을 오늘 새롭게 깨닫고 잘 행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1.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위해 지켜야 할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살면 살수록 나와 남을 보며 알게 되는 게 있죠.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듣고 있는 제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 이 말씀에 좀 뜨끔했을 것입니다.

좀 전에도 제자들은 새 왕국의 권력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두 아들을 주님의 나라에 요직에 앉혀 주실 것을 요구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제자들이 같이 주님의 일은 하고 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너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에 뜨끔하기도 하고 한편 발끈하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기 싫은 사람을 사랑하라면 화가 나잖아요?

특별히 내게 해를 끼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왠지 그냥 싫은 사람도 사랑으로 잘 대하기가 힘들잖아요?

사랑하기 힘들기 보다는 사랑하기가 싫은 것이죠.

그 싫은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마음에 문이 쾅 닫혀 버립니다.

그 사람 행동이 나빠서만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선호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안 하면 화가 나잖아요?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있어야 할 열매에 대해 차근차근 말씀을 이어 오셨습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내 계명을 지킴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하기 싫다고, 저 사람은 그런 자격이 없다고 안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랑이 안되는 것일까요?그것은 사랑에 대해 배우고 훈련하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오늘도 너희가 사랑하라고 하셨지 너희가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도 사랑을 배우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사랑하라고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밖엔 다른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진 못한다는 걸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면 이유가 있는 것이죠.

1)오늘 예수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본문 앞에 보면 먼저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9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의 큰 그림이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기억나십니까?

요한복음1721절에 있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된 연합 안에 우리도 함께 있게 하시자는 것이잖아요?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신데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그 영광스런 가족으로 낄 수가 있겠냐를 생각하면 됩니다.

당연히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시고 사랑이 뭔지를 알고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우리 신앙에서 이 고귀한 사랑이 빠진다면 사람들이 자기 이기심을 더 채우기 위해 만들어낸 세상의 종교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또 사랑은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질로 창조되었기에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기부와 선행이 이어지고 있죠.

남을 돌보는 게 자기만 누리는 것 보다 더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그 형상을 받은 우리는 사랑이 교류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신흥 사이비 종교인 신천지에 왜 그렇게 젊은 청년들이 빠졌는지가 그걸 말해 줍니다.

신천지 교인들은 조직적으로 타겟을 정하고 접근합니다.

그리고 청년들이 가정이든 교회든 그 어디서도 받아보지 못했던 관심과 사랑을 여러 명이 작심하고 연출합니다.

우리 나이만 되도 이유 없는 친절에 경계심을 갖죠.

젊은 세대는 아직 순수하기에 이런 위장된 사랑이 먹힌다는 거예요.

취업에 대한 걱정이 많고 미래에 대해 두려움이 많은 세대입니다.

누구 하나 그런 고민을 들어주고 답을 줄 사람이 없었는데 누군가 그걸 이해하고 같이 고민하자고 하니 확 넘어가는 것입니다.

위장 된 사랑이라 해도 사랑 받는 데 이끌려 점점 미혹되고 세뇌당하는 것이죠.

우리는 사랑을 주고 받아야 행복한 존재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상태의 나를 지켜보면 분명히 행복한 기분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시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 다음을 보면 주님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환영받기보다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국가에서 그리스도인은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지하게 철저하게 따른다면 우리 사회에서도 미움 받습니다.

믿음을 원칙으로 세상과 다르게 행동할 때 사람들은 돌아서서 삐죽거립니다.

적으로 둘러싸인 이런 세상에서는 같은 편 성도들이 더 강한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주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하기에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족들을 사랑으로 강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악의 공격을 막지 못합니다.

부모들은 다 자식을 사랑하고 내가 희생했다고 하죠.

그런데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상처받았다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부모의 편애, 표현의 미숙함, 불완전한 인격 같은 것으로 자식들은 사랑보다 상처를 더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런 자식들이 가정을 벗어나 신천지로 가고, 못된 친구들에게로 가고, 세속의 유혹으로 가기가 쉬운 것이죠.

가족들은 다른 사람 그 누구보다도 내가 집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걸 서로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이란 둑이 무너지는 건 가장 큰 불행이기에 미움과 불화라는 작은 균열부터 막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 오늘 말씀의 맥락을 보면 사랑해야만 열매를 맺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맺는 열매는 행복한 가정과 좋은 직업과 물질의 풍요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잠시 땅에서 만지작거리고 향유하다 두고 갈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매달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열매가 영혼을 구원하는 것임을 주님은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쓰고 누리고 즐기는 것도 큰 행복이지만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열매입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너희가 내 면류관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누군가를 구원해 내라고 우리를 보내실 때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따라 오지 않습니다.

사실 성도들이 가족과 이웃에게 잘하는 것도 그 구원의 문제 때문이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해도 영혼을 인도하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렇게 섬기는 사람들 중엔 오히려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내 도움을 당연히 여기고 때로 무례하게 더 요구하기도 합니다.

대체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고 섬겨야 할지로 우리는 늘 갈등합니다.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미 그 한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리를 가 주라고 하셨죠?

그 사람이 얼마나 진짜 힘든지, 염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걸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한 건 그 사람들에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치 않은 사람들은 붙여주지도 않으십니다.

그 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냥 오리를 같이 가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친분에서도 오리까지 가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성도들은 십리까지 가 줄 수 있는 각오가 된 사람들이야 한다는 것이죠.

시간과 여건이 된다면 십리라도 같이 가 줄 더 넉넉한 마음으로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걸 하려다 보면 때로 속이 썩는 것이죠.

그게 바로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는 이치입니다.

정말 코 앞까지 왔다가 내 인내심의 부족으로 원점으로 간 경우도 있습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사랑해야 그들의 마음이 닫히지 않고 성령께서 감동하실 수 있기에 우리 곁에 있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3. 그렇기에 이 힘든 사랑을 해 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절에서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사랑의 본을 따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아는 정도는 성도마다 다릅니다.

아직 쪽쪽이를 물고 있는 아기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본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아는 정도는 다르잖아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도와주시는지를 삼년 공동생활에서 매일 목격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실망시킬 때도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셨고 혼자 짐을 지셨습니다.

좀 전엔 자식을 씻기듯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 주셨습니다.

그 정도면 예수님이 사랑하신다는 걸 알만도 한데, 제자들은 주님의 사랑을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말 저말로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사랑도 상대를 아는 지식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자신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 제자들을 얼마나 친밀한 친구 관계처럼 사랑하시는지의 측면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친구 간처럼 서로의 진심을 숨기지 않고 상대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그런 마음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한동안엔 친구 간의 우정과 의리가 사람 세상에서 아주 큰 덕목이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만 해도 그런 친구 관계가 있었죠.

친구 보증 서 주고, 돈 빌려 줬다 떼여서 자식들 고생시킨 아버지들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러고도 그 친구 죽일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죠.

그 사람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뭔가 사정이 있을거다, 분명히 돈 들고 찾아올 것이다그러면서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야 누가 친구 보증을 서 줍니까?

그러니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너무 허황되다 생각될지 모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대신 죽으셨다는 말씀은 그만큼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윤수야, 난 내 친구인 너를 위해 목숨을 내 줄 수도 있어

제자들은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 목숨을 주신다고 할 때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주님의 목숨이 왜 필요합니까, 살아서 주님의 왕국을 세우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높여나 주십시오

사람들은 지금도 목숨을 주신 예수님 앞에서 당혹감을 느낍니다.

아니, ?’

왜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까지 하시면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지?내게 무슨 문제가 있길래

그러나 내 친구인 너희를 위해 목숨을 주신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말씀으로 미리 알려 주셨고, 그렇게 죽으셨고, 성령께선 그걸 믿을 수 있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론적인 사실을 믿는다 해도 나를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에 또 실감이 안 납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사람도 아니고, 겨우 예배나 참석할 뿐이고, 매일 먹고사는 문제에 허덕이는 나를 그렇게나 사랑하실까?

난 그런 기대에 미칠 만큼 잘 믿을 자신도 없는 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내 기도도 들으신다는 데 확신이 안 드는 것이죠.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을 고침 받았다고 대단하게 헌신하며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주님께서 귀신을 쫒아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자 감사하며 기쁘게 농부로 돌아갔고 장사꾼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평생 그 일을 하면서 소박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평범하고 소박하게 사는 그들을 주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수 천 년 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박해 받고 신앙과 율법을 지켜왔다고 믿었던 유대인들이 왜 십자가 복음에 분노했습니까?

하나님나라에 아무 공헌도 없이 멋대로 살았던 죄인과 이방인들에게도 공짜로 구원이 배당되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지금 친구라고 불리워진 제자들도 그렇잖아요?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냥 성실한 어부였고 대단한 가문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손가락질 받던 세금쟁이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평생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평범한 우리라고 그들처럼 사랑하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다만 우리는 주님이 어떤 사랑의 하나님이신지, 그리고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아는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외롭고 힘들어서 오리를 함께 가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십리를 함께 가 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을 하려면 시간도 주어야 하고 돈과 수고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손해 보는 마음이 들어 그런 희생을 못합니다.

다만 내 의지를 다해서 사랑한다면 죄인의 한계가 금방 나옵니다.

한 만큼 생색이 나야 하고, 상대방의 못마땅한 태도에 사랑하려던 마음은 순식간에 멸시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묵상할 때 성령님은 그 사랑이 지금 내게 향하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사랑을 따르려 할 때 점점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에덴의 두 사람은 사랑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지위가 회복되었으니 우리가 다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그것이 성공할 수 있는 이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하고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반드시 그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점점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 얼마든지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더 사랑하며 예수님 안에 거하고 더 많은 열매 맺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