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20장24절-31절 (도마의 부활절)

남수연 2018. 4. 13. 15:35

오늘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만이 기독교라면 기독교는 좀 어둡고 우울한 색조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 믿음은 밝고 명랑한 색조입니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힘이고 소망의 원천입니다.

우리와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의 부활절은 얼마나 더 감격적이었을까요?
그런데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의 아침은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기쁨과 감격보다는 당혹과 혼란에 가깝습니다.

우리 중엔 벌써 사랑하는 가족들을 앞세우신 분들이 많습니다.

참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만일 사랑하는 가족이 어느 날 우리 앞에 살아서 나타났다면 어떨까요?
반갑고 기쁜 마음 이전에 이게 무슨 일인지 두렵고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느꼈던 마음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부활은 이전과 형질이 달라진 신비한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은 인간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딱 죽음까지잖아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차원이 다른 부활에서 받은 충격을 성경은 그대로 전해줍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전해 준 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의심많은 제자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사실이고 믿을만한 것일까요?

오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제자들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의 의심은 역으로 부활의 진실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기록한 제자들은 처음 부활에 대한 의심과 당혹감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의심했다면 더 따져보고 검증했다는 것이잖아요?

만일 부활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제자들이 좀 더 조직적으로 입을 맞추고 의심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는커녕 제자들은 앞장서서 부활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이후의 삶은 백팔십도 달라집니다.

비포와 애프터가 완전히 다르다면 무언가 분명히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되고 사흘 째 되는 날,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죠.

제자들은 일단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그 날 저녁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한 제자들의 첫 반응은 어땠을까요?

본문에서는 그 분위기를 세밀하게 그리지 않았지만 누가복음은 그 순간을 이렇게 첨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심지어 예수님께서 영이 아니라고 손과 발을 만져보라고 하시는데도 그들은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할 수 없이 그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눈앞에 계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제자들 중에 도마는 그 시간에 외출 중이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제자들의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침통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흥분한 제자들은 도마가 들어오자마자 앞을 다투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녀가셨다고 말합니다.

도마는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하는 말은 부활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제자들 열 명이 보았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말을 해야 할 만큼 부활은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절의 불신 소동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제자들의 요지는 우리도 처음엔 안 믿었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러 밖으로 나갔고 부활을 증거하다 태형을 당했고 그래도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하다 순교합니다.

이 놀라운 대 반전은 부활이 진실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도마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그의 생애를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일곱 개의 교회를 세우고 이십여년의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했습니다.

인도의 첸다이에 가면 도마의 무덤과 기념교회가 있고, 인도에서는 도마의 선교를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된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도 부활도 다 실제 역사에서 일어났던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진실 된 증언을 믿으시고 모두가 굳건한 부활신앙을 가지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렇다면 제자들이 보았던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셨을까요?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극단적 발언을 했지만 팔일 동안 은신처를 떠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26여드레가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여기서 제자들을 놀래킨 것은 예수님이 닫힌 문을 통과해 갑자기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첫 번째 찾아오셨던 19절에서도, 본문 26절에서도 문이 닫혀있었다는 것을 반복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단순한 기사회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전 신체와 완전히 다른 상태라는 것이죠.

자연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물질을 통과하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사복음서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십니다.

마치 구약성경에 예수님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구약에서 성자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길손으로, 야곱에게는 씨름하는 천사로, 여호수아에게 군대장관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현현하셨잖아요?

부활하신 예수님께 그런 신비함이 있었기에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서도 의심하는 제자가 있었다고 마태복음은 솔직하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는 있는 대로 기록하고, 믿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다른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보이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했었다는 것이죠.

 

또 이런 신비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이전처럼 이 땅에서 살기 위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17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는 기쁜 마음에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이제 주님이 돌아오셨으니 당연히 이전처럼 함께 있을 줄 알았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이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시며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하늘로 다시 올라가셔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변화 된 부활의 몸은 이 땅에서 다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인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장차 우리의 몸이 어떻게 변해서 영원토록 살게 되는 지를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요한사도는 요한일서32절에서 예수님의 재림 때 우리도 주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와 같았던 예수님의 몸이 그렇게 변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변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첫 열매라는 의미는 모든 열매를 대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신비한 몸은 곧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몸을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몸으로 우리가 변한다면 우리도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영광스런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을 믿음으로만 보장됩니다.

로마서109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주님처럼 생명의 부활을 얻은 것입니다.

22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보증인 것입니다.

로마서811절에서 말씀해주시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모두가 이런 몸으로 부활하실 것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3.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겐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5721절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분명히 전합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나님과 대치하고 있는 죄인들의 공통적인 현상은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특히 믿음이 없는 분들을 보면 지위나 빈부여하와 상관없이 그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평강이 없는 모든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과 대치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가족들 간에도 친구나 동료 간에도 관계가 문제가 있으면 대번에 마음의 평안이 없어지잖아요?
하물며 하나님과 적대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평강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나 알지도 못하고 갖지도 못했던 평강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는 우리 죄를 속죄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강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평강은 현재 삶에서 마음의 평강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평강을 다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평강을 매일 누리면서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왜 때로는 평안을 느끼고 때로는 평강이 사라진 것 같습니까?

왜 어떤 사람은 항상 주님의 평강을 누리며 사는 것 같고 어떤 사람은 환경과 감정에 요동하며 삽니까?

그것은 우선 베드로후서12절의 말씀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은혜와 평강의 생활이 다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강 속에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주 예수를 좀 더 알아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매일 이 평강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믿음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루를 지내다 보면 영낙없이 마음의 평강을 뺏길 일이 생기잖아요?

사실 평안하게 지내는 시간보다 불안하고 염려하며 얹잖게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은 정말 정신을 다 뺏고 믿음이 어디 갔나 모를 정도로 우리를 휘몰아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평강을 잃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꼭 평강 없이 문제에 매달릴 필요는 사실 없더라구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쨌든 수습해야 합니다.

단 평안한 마음으로 하는 것과 불안하고 걱정에 빠져 해나가는 것과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을 유지하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저도 본래 근심이 많은 성격입니다.

미리 앞 날을 대비해야 그나마 마음이 편하기에 몇 달 뒤의 일도 미리 끌어다가 걱정을 해 놓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든 평강을 유지한 채로 일을 계획하고 해나가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하니까 조금씩 되어 갑니다.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불안이 엄습한다 싶을 때 우선 평강을 유지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에 큰 평안을 주셔서 일을 잘 해결해 가게 해 주시길 기도하며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우리에겐 이미 예수님이 주신 평강이 있기 때문에 이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며 어떻게 싫은 일, 나쁜 일이 없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주님께서 주신 평강을 잘 간수하면 어차피 해결해 나갈 일, 더 지혜롭게 실수 없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결정적으로 일을 해결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지 제가 다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믿으시고 저처럼 평안을 유지하며 사는 훈련을 지금부터 열심히 해나가시길 권고드립니다.

우리는 좀 믿음대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존 드라이든이란 사람의 명언이 있습니다.

처음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

마음이 불안해지고 불편해 질 때 마다 평강을 유지하는 습관을 만들면 우리는 언제든 원하는 대로 즉시 평강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음에 평강만 있어도 지금보다 훨씬 살만합니다.

 

4.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도마의 경우를 보실까요?
주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 봐야만 믿겠다고 극단적인 말을 내뱉은 도마 앞에 예수님이 서셨습니다.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지금 예수님께서 누가 한 말을 똑같이 하고 계십니까?
바로 도마가 한 말을 그래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방에 없는 줄 알았던 그 때, 도마와 제자들의 대화를 듣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고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도마가 의혹에 쌓여 팔일 동안 전전긍긍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찾아와 그 의혹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도마는 자기가 말한 그대로 말씀하는 예수님께 놀랐습니다.

그런 순간에 어느 곳에나 제한 없이 계시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전능성에 접촉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물고기 한 마리를 못 잡은 새벽에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전능성을 접촉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렇게 말하잖아요?
나다나엘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무화과 나무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을 때 그런 경이로운 접촉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즉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잖아요?

도마의 입에서도 그 말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도마에게 더 이상 예수님이 선생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에서도 예수님이 그렇게 개입하고 우리에게 접촉하셨다는 오묘함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나셨다면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들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냥 고생하는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도와 줄 방법을 강구하고 도를 연구한 석가와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압제받는 민중들을 위해 몸을 불사른 열사와 뭐가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주님이 그런 인간의 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죄를 속죄하고 영광스런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도마의 고백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의 주인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인이시기에 우리 삶을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총신대 다닐 때 배웠던 한 교수님의 군복무 시절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도처에 지뢰가 매몰 되어 정말 위험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군종병이었던 교수님은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매일 여러 군데 초소들을 찾아 다녀야 했습니다.

걷다가 차가 지나가면 종종 얻어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초소 방향으로 가는 지프차가 있어 얼른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 헌병에게 걸렸는데 내리라고 했습니다.

마침 교수님이 잘 아는 헌병이라 웃음으로 넘기고 계속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안가 또 다른 헌병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내리라는 말에 대충 얼버무리고 계속 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헌병에게 걸린 것입니다.

그동안 그런 적이 없었기에 하도 이상해서 네 번째 걸린 다음 차에서 내렸습니다.

이 분이 내리고 나서 불과 50미터 정도를 달리던 지프차가 앞에서 굉음과 함께 튀어 올랐습니다.

지뢰를 밟은 것입니다.

그 날 타고 있던 두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오 주님이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늘 우리를 따라다니시고 절대로 늦지 않게 우리를 도우러 오십니다.

그래서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리가 복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제자들은 사도행전에서 맹렬한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을 전하지 말라는 말에 굴하지 않고 대신 박해와 수욕과 죽음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 역사 속에만 갇혀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셔서 성령을 주시고 영원한 평강을 주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삶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고 더욱 보람있고 가치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도마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 모습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인 성경을 통해 부활을 믿습니다.

요한사도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잖아요?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기록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를 주님은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보지 못하고 나를 믿는 주는나의산성교회 성도들은 복되도다.

우리는 모두 참으로 복된 자요,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으시고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8년4월1일 부활절설교 남수연목사